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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12월 2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반야심경 무안계내지무의식계無眼界乃至無意識界
여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내용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공중에는 모든 현상이 공인 입장에 있어서는 물질적 현상인 색도 없고,
정신적인 여러가지 현상인 수상행식受想行識도 없다, 그랬고
또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또 의식도 없다,
그리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물질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과 법도 없다,
이렇게 없다는 말을 끊임 없이 했고 밑에 역시 눈의 세계, 귀의 세계, 코의 세계,
혀의 세계, 몸의 세계, 의식의 세계, 이런 모든 것들이 없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거, 문제지요.
신심이 지극한 불교인으로서 또 경전을 매우 신성시하는
그런 입장에서 아주 천진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이 반야심경을
우리가 이해한다고 볼 때,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이렇게 했으니까 그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이요, 관세음보살님의 가르침이요,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절대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우리가 마음 속에서
이미 믿고 있을 때 사실 우리들 자신은 모든 게 있잖아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혀도 있고, 다 있습니다.
있다는 게 오히려 더 신기하죠.
있다는 게 아주 이상하기도 하고 불가사의 하기도 하고 하는 그런 입장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 전체를 유상, 무상, 있고, 없음, 보이는 거, 보이지 않는 거,
이 모든 것들을 계산할 때 항상 내가 이렇게 있음을 중심으로 해서 계산하지마는,
없음의 세계까지 합해서 계산을 한다 하며는 백년을 산다 하더라도 백년을 살면서
어마어마한 어떤 업적을 남겼다 손치더라도, 그 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불과 얼마되지 않을거에요.
없음의 세계는 너무 크고 넓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체를 있음과 없음 전체를 1억이다라고 이렇게 우리가 숫자적으로
생각 한다면 아마도 99,999,999는 없음의 세계일 것이고,
그 중의 1이 아마 있음의 세계가 아닐까, 그렇다고 본다면
이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또 불가사의하고
정말 이상하기도 하고 참 대단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지요.
이 시간적으로 봐도 그렇고 공간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태어난다, 어쩐다, 전생이다, 이런 말을 흔히 쓰지마는
우리들 보통 상식으로 알고 있는 그런 내용으로써는 사실은 태어나기 전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고,
또 죽은 뒤에 언제 어디서 어디 가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서 살지
그거 누가 알겠습니까 .
그래서 시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모르는 것을 우리가 있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물론 없다고도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마는, 모르니까 없는 거라고 볼 때
그야말로 전체를 1억으로 볼 때, 99,999,999 는 없음의 세계고
그 중에 1이라고 하는 것이 겨우 있음이 아닐까,
시간적으로 그렇고요, 공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오히려 더 하지요.
이것도 숫자가 우리 상식에 의해서 조금 이해 하기 쉽도록
이렇게 숫자를 나열해 보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지요. 공간적으로 내가 여기 있음과 우리 지구라고 하는 것이
우주 공간에 있다고 하는 지구가 차지하고 있는 것,
저 달과 해와 기타 눈에 보이는 저 무수한 별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공간의 범위가
아까 내가 이야기 든 99,999,999는 공간, 텅 비어 있는 부분이고
그 중에 지구니 해니 달이니 별이니 수 많은 별들, 다 합한다 손치더라도
그건 아마 그 중에 1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보다 더 미약한 존재일지도 몰라요.
알고 보면 있음과 없음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이 참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으로 따져서 관자재보살이 공중에는 없다라고 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보통 우리의 상식으로 없음을 이해할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본 결과, 그렇게도 한번 쯤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겠나,
이렇게 볼 때 없는게 너무 크고 너무 많고 너무 오랩니다.
없는 기간이 너무 오래죠.
보통 사람이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정말 몇 억만분의 일의 확률에 불과하다, 이런 표현들이 많죠.
손톱 위의 흙과 같다 이런 말이라든지,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고 하는 말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확률이
태어날 수 없는 확률 없는 것과 비교 해 볼 때, 수 억만분의 일의 확률이다
이렇게 표현하잖습니까.
가만히 생각 해 보면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이 존재가 사실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너무 보잘 것 없죠.
무한한 시간 속에 내가 백 년 이백 년 산다 한들 그게 눈 깜짝할 사이도
안되는 거죠.
너무나 미묘한 시간입니다.
또 공간,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지구 전체가 나라 하더라도 그렇죠.
지구가 얼마나 넓습니까. 이 넓은 지구가 통채로 나라 손치더라도
이 드넓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지구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또 얼맙니까.
그거 있다고 할 게 뭐 있어요. 없는 거죠.
아예 없다고 하는 게 더 편할 정도고 이해하기 쉬울 그런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깨달은 사람의 안목으로 모든 존재를 두고 볼 때
수상행식도 없고,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그리고 눈의 세계, 안계眼界라고 하는거, 안계도 없고 내지 의식계도 없다,
이러는데 안계, 구체적으로 하면요.
이계耳界, 비계鼻界, 설계舌界, 신계身界, 의식계意識界,
이렇게 모든 것이 없다, 내지라는 말이 그런 것들을 생략한 글이죠.
눈의 세계, 눈의 세계는 뭡니까.
눈과 또 눈의 대상인 물질과 그리고 본다는 사실, 이것이 안계죠.
그 다음에 이계는 뭐겠습니까.
귀와 소리와 그리고 듣는다는 사실, 이게 이계입니다.
그리고 비계는 코와 그리고 향기와 향기를 맡는거, 한자로 하면 臭입니다.
견문취見聞臭
그 다음 설계는요. 혀와 맛과 그리고 맛보는 거, 이것이 혀의 세계입니다.
또 몸의 세계는요. 신身과 또 촉과 그 다음에 감촉을 느끼는 그 사실과
이렇게 해서 신身의 세계가 됩니다. 신계身界가 되는 거죠.
의계, 의식의 세계는 의식과 법과 이 법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기타
모든 것을 법이라 합니다.
세월이 흘러간다든지, 밤이 오고 낮이 간다든지, 낮이 오고 밤이 간다든지, 하는
그런 관계, 춘하추동이 바뀌는 거라든지, 이런 등등이 전부 나무가 자란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이런 현상들은 전부 법에 해당됩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의식이 그것을 감지하죠.
그래서 감지하는 것과 그런 현상들인 법과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이게 의식의 세계가 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없다는 거기 때문에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반야심경 입장에서는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없는 것을 이해하는데
주안점을 둬야지, 없다고 하는 것을 굳이 세세하게 파헤쳐서 설명할 필요는 없죠.
그러나 이왕 경문이니까 그것도 우리가 이렇게 설명을 해 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없다 그랬습니다.
공중에는...공의 시각 중에는 또 봐서 공이 아니라 늘 말씀드리지마는
깨달은 분들의 안목으로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지가 그렇고요.
실지가 그런 것을 우리는 캄캄해서 못 보고 깨달은 사람은
실지가 그러한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설명한 거죠.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미혹해서 그것을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까
이해가 안되고요, 이해가 안되니까 설명을 하는데도 구차하게 중언부언重言復言
어떻게라도 조금 이해 해 볼려고 하는 그런 여러가지 상식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음
무무명역무무명진내지무노사역무노사진
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無老死亦無老死盡
이렇게 했는데 이건 십이인연十二因緣이지요.
보통 십이인연 밑에 또 사제四諦가 나오고요.
사제 속에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하는 도道라고 하는 글자 속에는
팔정도八正道가 포함되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십이인연十二因緣,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이것은 불교의 원시적인 근본 교리입니다.
불교의 원시적인 근본 교리인데 이것이 아주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께서도
이 점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많이 둬서 명확하게 깨닫고 계셨고
또 깨닫고 나서 그러니까 설법을 하실 때 이것을 중심으로
십이인연, 사성제, 팔정도를 중심으로 해서 많이 설법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반야심경에서 이런 모든 것들이 없다고 하는 말로 일관되지만
보통 우리들의 상식에서 출발을 해야 되거든요.
아예 처음부터 상식을 뛰어넘는 그런 이야기를 한들 이해할 사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것을 상식선에서 쭉 이야기를 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십이인연도 있고, 사성제도 있고, 팔정도도 있다, 하는 그 있음을
쭉 이야기를 해서 결국은 한 단계 한 단계 높여 가면서 이해를 시키지요.
여기서 십이인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갈 것은
보통 우리 인간의 나이를 계산할 때, 서양사람의 발상법과 동양사람의 발상법
그리고 부처님의 발상법, 이 세가지를 좀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서양 사람의 발상법은 뭡니까.
모체에서 세상에 나온 때로부터 계산하죠.
어느 날 태어났다 그러면 태어난 그 순간부터 계산을 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태어나서 며칠 됐든간에 한 살이라고 하지를 않죠.
태어나서 난 날부터 만 1년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한 살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에서는 어떻습니까. 발상법이 전혀 달라요.
모태에 생명이 들어섰을 때부터 계산합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에요.
그걸 우리가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
요즘 태교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높은데 이미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어떤 가치와
어떤 능력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교육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교육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그만치 인정해주고 들어간다는거죠.
인정해 주고 들어가고 당연히 교육을 시킨다면 어떻습니까.
반드시 모태 내에 있을 때의 나이도 계산해야죠.
그러니까 태어나서 첫 울음을 낼 그 때부터가 아니죠.
그 전부터 벌써 10개월간의 모태에서의 생명 활동이 인정이 되는 것이고
그거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우리 인간의 진실에 맞는지 이건 각자가 생각해서 판단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한 살이 돼 있는 거지요.
만 몇 살...이렇게 해 가지고 나이를 그렇게 계산하는 것은 우리 동양사람들의 어떤
깊은 사고와 서양 사람들의 현실주의적인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만을 따지는
그런 사고가 차이가 엄청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물론 성인이시고요, 그러니까 더욱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서양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친다면 동양사람은 모체에 입태했을 때
10개월 전으로 거슬려 올라가서 계산을 했고,
부처님은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태에 생명이 들어서는 사실이
무슨 원인에 의해서 어떤 인연에 의해서 그 어머니의 모체에
생명이 들어서게 됐는가 이거부터 따지는 거죠.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모하고 인연이 되기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거죠.
그래서 그 원인을 추구하고 그 원인을 추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에 의해서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집착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이런 문제도 해결하려고 하는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서
또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폈습니다.
초기 불교는 거의 이런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써 전체적인 교의를 삼았죠.
십이인연을 여기는 반야심경에는 무무명역무무명진내지 해가지고
내지라는 말로해서 생략을 했습니다. 생략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하며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이렇게 십이인연이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아까 동양의 나이 계산법, 서양의 계산법, 그 다음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람이 태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체에 들어오기 이전의 문제까지도 명상을 해서 말씀을 하셨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이렇게 하는데
무명과 행과 식은 정신 세계의 이야기입니다.
정신 세계의 이야기라서 부처님이 추구하고 또 사색해서 밝혀낸 부분이에요.
그 다음에 명색부터 동양의 어떤 나이 계산법이 되는거죠. 명색과 육입부터
왜냐하면 모체에서도 명은 정신적인 요소고 색은 육체적인 요소이지요.
그것이 더욱 더 뚜렷해질 때 모체 안에서 육근이 생기지 않습니까.
육근이 뚜렷하죠. 태어나기 직전에는 육근이 아주 뚜렷합니다.
그게 전부 그걸 육입이라 그럽니다.
그 다음에 서양식 사고는 촉부터입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모체의 체온이 한결같기 때문에 감촉에 대한 게
별로 약간의 느낌은 물론 있습니다.
어머니가 찬물을 먹었다든지 뜨거운 데 들어갔다든지 하며는
다 느낄 수 있지만 그건 그렇게 크게 따지지 않고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물론 표현을 하기도 하고 또 하는 것을 우리가 잘 모르기는 하지마는
태어나서부터죠.
왜냐하면 모체의 온도와 바깥 온도가 다르기 때문에 비로소 촉의 활동은
감촉의 활동은 태어나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촉,수,애,취,유,생,노사, 이것이 서양식의 나이 계산법이죠.
나이 계산법은 촉부터입니다.
동양의 계산법은 명색부터고요. 명색 육입부터 그 다음에
부처님의 계산법, 나이 계산법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변천 과정,
죽기까지 그것이 죽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그야말로 둥근 원과 같아서
계속 그것이 진행되는 것으로 그렇게 부처님이 파악하셨기때문에
이 십이인연 무명,행,식,명색,육입, 촉,수,애,취,유,생,노사,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이건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로써 이런 것은 상식이니까
이 정도 설명해도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부연을 하며는 무명은 그야말로 밝음이 없다는 뜻이죠.
의식 세계에 있어서 아무런 자기 의지가 없고 자기 의지를 행사를 할려고 해도
뭔가 보이는 게 있고 생각 되는 게 있고 이래야 자기 의지를 행사할텐데
자기 의지를 행사할 만한 밝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명이에요.
근본 무명, 우리가 그런 표현을 하는데 이건 그야말로 캄캄한 세계이기 때문에
누구도 몰라요. 깨달은 사람밖에는 달리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무명의 실체에 대해서 그런데 그 무명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행, 그게 움직여요.
무식한 사람이 가만히 있고 미련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가만히 있질 않고 움직이니까 문제를 일으키지요.
집안에 문제를 일으키고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고 그러듯이 인간의 근본 무명도
깨닫지 못한 정신인데 그것이 움직여요.
그게 행입니다. 행할 행자니까 움직여요.
행하다 보니까, 움직이다 보니까, 인식 작용이 거기에 생겨 그게 식이야.
요건 무명,행,식은 정신 세계죠.
인식 작용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자 하는 게
이게 본능입니다.
사람의 업을 가진 사람은 사람으로 생활하고싶은 거죠.
그래서 말하자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찾아갑니다.
그게 행과 식의 일이죠.
그래서 어머니 모태에 들어가게 되면 저절로 정신적인 요소인 명과
육체적인 요소인 색이 처음에 결합을 하는 거지요.
결합을 해서 세월이 가면 육근이 차츰차츰 명확해지잖습니까.
그게 육입입니다.
태어나게 되면 감촉을 알아요.
춥다, 덥다, 이걸 알고 어머니 살갗이다, 다른 사람의 살갗이다, 그걸 알고
그 다음에 수는 말하자면 어머니의 어떤 체취는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 낯선 사람의 것은 물리치고 하지요. 그게 수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자기 습관과 자기 업에 맞는 것은 애착하게 되고요.
또 자기 습관과 자기 업에 맞지 않는 것은 애착하지 않습니다.
애착하는 걸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이걸 취할려고 들어요.
취할려고 드니까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지요.
그래 취해서는 뭐라고... 소유... 소유하게 되지요.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 이게 명예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물질이 그렇고, 온갖 것이 그래. 자기 능력이 그렇고, 자기가 익힌 것도
영원히 자기 능력으로 있었으면 싶고 지식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요.
명예도 그렇고, 부귀영화도 그렇고, 이런 모든 것들을 전부 애착하고 취해서
영원한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생! 생이 계속 되는거죠. 삶이라고 하는 것이 계속 되죠.
그래서 늙고 죽게 되고, 늙고 죽게 되면 결국은 또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는데
육신은 지수화풍 사대로 돌아가죠.
그러면 그 정신은 무명, 행,식으로써 떠돌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여서 어떤 인식 활동을 하고 또 인연을 찾아서
새로운 생을 받게 되고 그런 거죠.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하게 돼 있습니다.
어쨋거나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반야심경에서는 없다 그랬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먼저 돌아가신 분에게 무상게를 읽어주는데 거기에 보면
오늘 영가는 아주 수 없이 길고 긴 세월 이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이 행을 인연하고, 행은 식을 또 인연하고, 식은 명과 색을 인연하고,
명색은 육입을 인연하고, 육입은 촉을 만들어 내고,
인연한다고 하는 것 또는 반연 한다고 하는거 이것은 끌어온다,
만들어낸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명이 행을 만들고, 행이 식을 만들고, 식이 명색을 만들고,
명색이 육입을 만들고, 육입은 촉을 만들고, 촉은 수를 만들고, 수는 애착을 만들고,
애착은 취하는 것을 만들고, 취하는 것은 소유를 만들고,
소유는 삶이 연장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은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고 살아가서
결국은 늙고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은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을 만들고
늙고 병들고 또 근심과 슬픔과 고뇌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행이 소멸하면 식이 소멸하고,
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육입이 소멸하고,
육입이 소멸하면 촉이 소멸하고 이렇게 해서 쭉 소멸로 또 나아가는
그런 이야기들을 무상게에서 해줍니다.
그게 사람이 죽고 또 다시 생을 맞이하고 하는 그런 과정에서 이런 이치를 또렷하게
제대로 알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이런 내용이 담겨 있는 무상게를 일러주죠.
그러면 육신을 벗어 던진 이 영혼은 아주 정신이 초롱초롱하기 때문에
이런 이치를 평소에 공부를 안했다 손치더라도 아주 잘 알아 듣는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만 있기 때문에 장애 요소가 없어졌어요.
육신과 함께 하고 있을 때는 온갖 육신을 중심으로 한 장애 요소들이 많은데
육신을 벗어 버렸을 때는 그렇게 장애 요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아주 총명하고
어떤 둔한 사람도 총명하고 영리하다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십이인연의 내용이고 이것을 부처님께서 역관, 순관, 이렇게 하면서
십이인연의 이치를 인간의 근본 존재를 깨달았다, 이런 표현도 있어요.
그래서 십이인연의 이치를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존재하는가.
이것을 쭉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보니까 이러이러한 과정으로
오늘 이 순간, 나라고 하는 것이 있게 되었고, 또 오늘 이 순간의 나는
이러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또 이렇게 순환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서 깨달았다고 해서 십이인연을 초기불교에서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에서는 말씀드린대로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 해결 돼버려
없어진 것까지도 없다 그래서 노사도 없고 노사가 다한 것까지도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고집멸도苦集滅道 는 잘 아시는대로 사성제죠.
사제라고도 하고 사성제라고도 하고 이런 표현이 있었는데
화엄경에서는 사성제품이 있습니다.
왜 성제라고 하는고 하면 성스러운 진리다 그냥 사제 하면 4가지 진리
이런 뜻이고 사성제 하면 아주 4가지 성스러운 진리 이런 표현인데
괴롭다고 하는 거. 이거 우리가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불교의 목표죠.
그런데 그 괴롭다고 하는 사실이 한 생각 돌이켜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기만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하고 또 아주 성스러운 진리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사제 하면 이것은 괴로움 그대로 진리다, 그런 말이고 사성제 하면
고성제 하면 괴로움은 아주 성스러운 진리야. 너무도 당연하고 성스러운 진리야.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안 괴롭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죠.
당연히 괴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괴로워도 그 괴로움을 피할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아둥바둥 그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그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노력을 기울입니까.
물론 당연히 그 괴로움을 벗어날려고 해야겠죠.
그러나 성제라고 했을때 고성제, 이를테면 괴로움
이것은 참으로 너무 당연하고 성스러운 진리이다.
이렇게 우리가 고통을 이해했을 때 그야말로 無 고집멸도죠.
그렇게 이해하지 않고는 無苦 괴로움이 없다라고 하는 이 말 이해가 잘 안됩니다.
당연히 괴로운데요. 뭐 당장에 괴롭지 않습니까. 괴로움 투성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고집멸도가 없다고 할 수가 있느냐 이거죠.
어째서 괴로움이 없다고 말 하느냐 너무 억울하고 엉터리 이야기 아니냐 이거지.
고제, 사성제, 사제, 성스러울 성聖자에다가 진리 제諦자입니다.
괴로움 그대로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성스러운 진리이다,
이것이 집멸도 이것도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오늘 무고無苦까지 설명을 드리는데 그 괴로움의 문제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해도 역시 그 범주 속에 다 포함 되겠죠, 그렇습니다.
괴로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반고반락半苦半樂이라는 말도 있고
또 감인세계堪忍世界라 그러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고통의 삶이 연속되는 그런 세상이다.
이런 표현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괴로운 것이 당연하죠.
괴롭지 않다 고통이 없다 하는 사람 오십보 백보입니다
괜히 빈 말이고 그냥 듣기 좋아라고 하는 소리이죠.
모든 사람은 다 괴로움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수용하느냐.
이것만 개개인의 신앙과 지식과 지혜에 따라서 다를 뿐이죠.
성인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괴로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용이 있어야겠다는 그런 생각 해 봅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
이런 많은 분들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금요일이고요. 연말입니다. 주말이고 아울러 연말입니다.
2006년 12월 공부 여기까지 하고 1월1일도 공부합니다.
월요일이기때문에요. 차질 없으시기 바랍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니 반갑습니다. 동질류를 느낍니다.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오늘의 퀴즈: 깊은 산~속 옹당샘 누가 와서 먹나요? 김 안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는 말은 이지님을 두고 이른 말이구랴!!!
여기의 거사님께서도...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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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하는데 급급해서 ....명성화님 말씀대로 가는 해 오는 해에 (그러고 보니 제야의 종소리도 못 들었네요..ㅎㅎ) 큰스님 법문에 빠져 있었네요...올 한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새기고...도반님들 가정마다 소원성취 하시기를 빕니다...()()()
이지님, 잘 읽습니다. ()^^*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많이 행복하세요~~ ^^*()
이지님 ..정말 멋지십니다..새해에는 부처님의 가피로 복 많이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_()()()_
이지님! 수고 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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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_
12연기를 천천히 음미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중 하나만을 끊어도 그 고리는 끊어지고...결국은 모두 공한 것이지만, 그 괴로워하는 이치를 소상히 알려주는 이치가 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그 해결법도 있다는 사실...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지님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괴로움이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수용하느냐? 이것만 개개인의 신앙과 지식과 지혜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 이지님!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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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제! 괴로움은 아주 성스러운 진리다.. 너무도 당연한 진리다. 그렇다면 안 괴롭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당연히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게 진리다. 감사합니다.
괴로움을 어떻게수용 하느냐는 각자의 신앙과 지식과 지혜에 따라서 다를 뿐이다.------------나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_()()()_
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이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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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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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佛文 - 第11講 般若心經 5. 無眼界乃至無意識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