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앞에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약(The New Testament of our Lord and Savior Jesus Christ)이 놓여 있다. 성경의 이 둘째 부분에 이 표제가 붙어 있는데, 이는 새 언약(The New Covenant)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전(略傳)을 다루는 것으로 볼 때에는 이것을 유언(遺言: testament)이라 번역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유언자(testator)이시며, 또한 그것이 그의 죽으심으로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히9:17,17). 또한 언약이 유언자의 자유롭고 선한 뜻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새 유언이라 부르는 것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것(이것은 케케묵은 것이 아니다)과 구분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것이 언제나 새로우며 절대로 낡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책들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는 그 은혜의 충만한 발견뿐 아니라, 그 구원을 모든 신자들에게 전달하며 그들에게서 확정되도록 하는 법적인 도구도 포함되어 있다.
이 유언은 도저히 헤아릴 길 없는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모든 풍성한 것들을 우리에게 보장해 주고 있는 너무도 귀한 유언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받아 쓰게 하신 것이요, 그가 죽으시기 전 날 밤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열두 증인 앞에서 서명하시고 인치시고 반포하신 것이다. 물론 이 책들이 후대의 유익을 위하여 영구한 기념물로 기록된 것은 그보다 몇 년 후의 일이지만, 우리 주 예수님의 새 유언은 그의 죽으신 때로부터 하나의 구술된 유언으로 확정되고 확증되고 선포되었으며, 이에 대해 이 기록들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 일들이 기록되자 구전은 뒤로 물러나고 이 기록들이 새 유언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이 점은 많은 헬라어 사본들에 붙여진 표제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테스 카이네스 디아떼케스 하판타- 새 유언의 총체, 혹은 그에 속한 모든 일들. 이 속에 우리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 전체가 선포되어 있는 것이다(행20:17).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한 것처럼(시19:7)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러하며, 따라서 거기에 덧붙일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전부이며, 다른 것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네 복음서가 있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신 역사야말로 의심의 여지 없이 하늘에서 땅에로 임한 소식 중에 최고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신약 전체가 복음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내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가 그 복음 선포자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거기에 굴복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 네 복음서는 일찍이 초대 교회에서 받아들여졌고 그 이후로 줄곧 기독교 교회들에서 읽혀졌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지 약 일백 년 후에 살았던 순교자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의 기록들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더도 덜도 아닌 네 권의 복음서가 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고 선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