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두세대만 지나면 날조가 가능하다.
<앞부분은 생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설은 4,50년만 지나면 날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인기를 끌었던 `야인시대` 드라마에서 김두한이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나옵니다.
이거.. 이거를 사실로 믿으십니까?
쌩거짓말이죠. 1940년대 당시 일제 치하이던 시절, 그 흉흉하던 시절에 수표교 다리밑의 거지이던 한 건달이 자기가 김좌진장군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당근 당시 사람들은 상대도 안해줬죠. 왈가왈부할 가치조차 없으니까.
하지만 6.25동란을 거치면서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그런것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못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두 세대가 지난 오늘, 버젓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전국으로 방영이 됩니다.
이제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아마 그럴테지 하고 생각할 뿐. 지금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이미 오래된(적어도 2세대) 전설이니까요.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는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보다는 독립군 장군의 아들이 거지로 살다가 주먹계의 대부가 되는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즐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거죠. 영웅이야기에는 그 영웅의 사실여부는 중요치 않으니까요. 그 영웅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자신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느냐가 더 중요하죠.
이렇듯.. 신화란 것은 금방 조작이 가능한 겁니다. 김일성도 당대에 신화를 만들어냈죠. 아마 70이상 되지 않은 사람들은 다 진실로 믿을 겁니다. 나뭇잎 타고 대동강 건넌 얘기를. 아빠,엄마 할 때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 테니까요.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그 이야기를 부정하는 어떤 말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는 환경에 살고 있으니까요.
<뒷부분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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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1889.11~1930.1)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6일간 지속됨)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함.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조선일보가 내놓은 사설을 보자면...
" 천황폐하의 생일을 맞아 모든 신하와 백성이 경축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것이다...천황폐하께서 옥체가 건강하시니 실로 황공하고 경할뿐이다...앞으로 충성과 의를 다하여 일념으로 천황폐하와 일본제국에 보답하겠다 " 라고 되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일본에 충성하던 극악한 매국 역적 신문으로 일본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에 의해 기사를 송고하던 시절이었으며
청산리 대첩이 1920년 10월 일어난 이후 김좌진 장군에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있던 시절로 국내의 독립군 연결조직과 군자금 모금책등을 검거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된 시점이었다.
다음은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직후 (1930년 1월 암살당함) 북로군정서의 잔존세력이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함경북도등지에 주제소등을 습격하던 당시의 시절에 실린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김계월(매일신보 조선 동아일보 기사에 따라 추정한 출생연도 - 1904년생)
해석
(1) 김옥균 1851.1.23∼1894.3.28,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1894년 3월 홍종우에 의해서 암살되다.
(2) 김좌진 1889.12.16∼1930.1.24,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 1930년 1월 박상실에 의해서 암살되다.
(3) 김두한 1918.5 ∼1972.11.21
김두한의 주장----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음.
7세때 청산리 대첩 발발 외조모 모친은 투옥 되어 고아됨, 10세때 부친 김좌진 별세함.
하지만
김옥균은 일본에1884년부터 망명중이었고 1894년 일본에서 암살당함, 김좌진은 1889년 충남홍성에서 태어남. 따라서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김두한은 1918년생. 청산리대첩때 김두한 나이는 3세여야 함. 따라서 7세때라는건 날조된 거짓말.
김좌진 장군이 별세한때는 청산리 대첩 발발 10년후인 13세때여야함. 따라서 청산리 대첩 발발 3년 후인 10세에 김좌진이 별세했다는 주장은 날조된 거짓말.
이외에도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기생모친이 맘에 결렸던지
김두한은 상궁의 딸이라는 해괴한 여인을 등장시킴. 그 여인이 김두한의 생모라고 주장.
그럼 상궁은 딸을 1880년 말~1890년 초에 낳았어야 함. (김두한과 나이차를 따져보면 상궁의 딸 김계월은 1904년 출생이어야 함)
하지만
그래...그냥 백번 양보해서 그래 그 무슨 상궁이라고 쳐도
조선 시대에 궁에 일단 들어가면 상궁이든 뭐든 궁녀는 죽어서야 궁 밖을 나옴. 상궁이 저 시기에 딸을 낳았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
그래 더 백번 양보해서 1910년 국권 강탈후 나라가 망해 궁궐의 궁녀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상궁이 밖의 사람이 되서 1910년 후에 딸을 낳았다고 쳐도 그럼 상궁의 딸은 1918년에 기껏해야 몇 살 인데... 그때 김두한이 출생했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날조의 연속... 아무리 망해가는 조선 왕조의 상궁이라고 해도
상궁이 딸 가졌다는 이런 해괴한 소리도 내 김두한이한테서 처음 듣는다. 또 양녀라고 할 텐가? 김두한의 글 일일이 따지자면 횡설수설과 황당무계 궤변의 연속이지만 이 정도로 해두겠다.**
김좌진은 18세에 자기집의 모든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찌감치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을 하였으니 오랜세월 고향과는 멀리 떨어져 연락이 두절이 되었었죠. 김좌진 장군은 일본의 끈질긴 추적과 일본이 이간질한 독립운동세력 갈등속에 암살범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김두한이라는 아들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사실 김두한은 김좌진의 친아들이 아닙니다.
충남 홍성출신인 김좌진과는 달리 김두한은 개성,서울출신의 고아였습니다. 자기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김두한은 어려서부터 거지들과 어울려다니면서 거지생활로 유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김두한은 민족주의자로서 일제와 뒷골목에서 맞선 영웅이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김두한은 일본깡패두목 하야시와 라이벌로 맞서 대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 그 당시 김두한은 하야시와는 라이벌관계라기 보다는 조직폭력계에서 서로 상호 공생하는 형님 아우하는 사이였습니다. 거기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하야시가 일본사람이 아니고 조선인 이었다는 것입니다.
평안북도 출생인 선우영빈은 어릴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야쿠자의 계열 조직 '시미즈 구미'에서 활동했고 조선으로 돌아와 야쿠자 오야붕이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 경성에 있던 일본 야쿠자 오야붕이 바로 '하야시'이며 본래이름은 선우영빈으로 역시 처세술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인이면서도 출세를 위해 거물급 일본인의 총애를 받으며 수양아들로 들어가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키웠던 인물입니다. 일본 야쿠자의 창시자 도루야마 마쓰히로(두산만)는 일본 총리대신도 눈치를 볼정도의 거물인데 그 두산만의 직계 제자 고노에의 사위가 하야시(선우영빈)입니다. 조선정무총감(국무총리), 총독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하야시의 세력과 영향력은 김두한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합니다. 하야시는 김두한과 종종 술자리도 같이했으며 김두한에게 큰 액수의 용돈도 선뜻 주곤 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은 아직 생존하는 김두한의 친구 김동회가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하야시의 나이는 김동회,김두한의 7~8살 위였으며 하야시의 신뢰를 받은 김동회는 혼마치칸의 살림에 관여했고 재정위기에 몰렸던 김두한은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두한의 육성 증언 테이프엔 "하야시와 의형제로 지냈고 매달 1000원씩 받았다" 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선우영빈은 해방후 대한건설협회의 이사직을 맡을 정도로 출세를 하였습니다. 해방후라도 뭐... 친일파들이 얼마든지 득세를 하는 세상이었으니까요.
결국, 김두한은 민족주의 정신이 깊어서 일제에 맞섰다기 보다는 그저 종로의 상인들에게서 돈을 뜯는 조폭깡패였을 뿐입니다. 하야시와 적당한 거래를 하면서 동반자적인 관계로 공생을 하던 것이었죠.
김좌진 장군 후손이라는 후광으로 한국에서 유명세 위세를 떨치고 정치판까지 진출해 경제적으로도 잘사는 김을동은 김좌진 장군의 진짜 후손이 확실한 분이(대부분 독립운동가들 후손들이 그러하듯) 한국 국적도 얻지 못하고 밑바닥 생활을 하는데 모른체 한다고 함.
김두한이가 안동김씨 족보에 오른것은 바로 그가 안동김씨문중에 가서 애걸반 협박반으로 뗑깡을 부려서 호적에 억지로 이름을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때문에 안동김씨 종친회에서는 골머리를 앓았었는데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안동김씨문중에 있으니 확인을 할 수도 있답니다. 유명한 깡패 주먹계출신에 해방후에도 권력을 쥔 친일파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며 반이승만세력,독립운동가들 때려잡는 정치깡패로 활개 치고, 이승만 박정희를 등에 업고 정치판에서도 위세가 대단했으니... 다만 이후로 김두한이 안동김씨를 내세우면서 국회의원도 하고 영웅처럼 묘사가 되면서 사회에 부각이 되니 안동김씨문중에서는 유야무야 침묵을 지키는 것이라더군요.
맨처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김좌진과 전혀 연관없는 기생,김두한을 장군의 가족으로 연출해냈음. 그리고 총독부의 지시에 충성하는 조선 동아일보가 (김좌진 장군 암살직후) 그 날조기사를 확대재생산했음. 이후 김두한이 자작해서 상궁의 딸이라는 여인을 등장시켜 모친이라고 주장함. 김계월의 실제 존재 유무도 아무런 근거,증언,자료도 없음. 김좌진이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는 주장도 그어떤 근거도 없이 김두한만이 주장하는 것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라는 주장의 원천은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날조 기사물에 김두한의 횡설수설하는 입이 전부임. 김좌진 장군이 김두한의 친아버지란 증거는 단 한개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