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명활은 아닐까...
발굴중인 북문지와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토성이다.
보문호
묘비 같지만 친구들이 친구를 기린 비
토성 흔적
우리 역사에서 몇 번째 장수한(54년)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원에는 4-500년 되었음직한 왕버들이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감산사 대적광전
국보81호
국보82호 - 지금은 중앙박문관에 - 화려함의 극치?
몸통 조금 남은 것을 얼굴 손 무릎을 보수했나 보다
육전에서 이런 통쾌함이
학성
병영성
건너 무룡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 명활산성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 960,000㎡. 사적 제47호.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실성왕 4) 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성방식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이다. 또한, 실성왕은 즉위하던 해인 402년에 왜(倭)와 화평을 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내는 등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왜인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왜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인이 이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수도인 금성(金城)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에 이 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의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阿且城)에서 살해되고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이라든지, 죽령과 동해안을 위협해 오던 고구려의 직접적인 압력 등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았을 때의 둘레가 1,906보이며, 593년(진평왕 15)의 개축시는 3,000보였다고 한다. 지금 이 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몇 군데에서 자연석으로 깨뜨려 아무런 가공 없이 쌓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축조는 진평왕 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북형산성(北兄山城) 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 등에 대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지난 1989년 혹우 때 축성관련 비가 발견되었고,
비에는 551년(진평왕12) 개축하고 작성비를 세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