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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芻牟鏡>下 <추모경>하
원문출처{http://mf.history.go.kr/Pdf/MF0020000/00322326.pdf}
<芻牟鏡>卷六 <추모경>권6本紀第七 본기제7
<東明>十五年戊戌,正月,癘疫大行,遣医於各地,施薬給良水. <黃龍囯>「仙王」<昷>公薨,年四十四,<漱帝>之別子也.其母<羊芳>為<羊吉>所逼而死.<羊吉>,以是,待<昷>公甚厚,妻之以女,尊以「天帝」.上之至<黃龍>,<昷>来降,降封為「仙王」,号<中川公>.為人懦弱無能,且多疾病,竟不能夀.賜其妻子年穀. 「太輔」<奧犍>薨,年五十七.<犍>,「順奴王」<奧川>之子也.其母,上姊<凰>主也.為人忠厚愛人為囯盡忠,不與人爭功.其妻<乙旃>氏,為上寵妃,累曠其枕而未嘗慍意亦未嘗移愛故,上累勧<旃>妃敀<犍>.至是<犍>薨,自稱「九如宮太大夫人」.上賜金印‧玉章,寵幸倍前.<旃>好奢侈,有房道,能悅上意.年已五十二而有如少婦. <觧德>「太輔」,<奧命>「左輔」.
<동명>15년무술{BCE23}, 정월, 창질瘡疾{염병}이 크게 돌아서, 의원들을 각지로 보내서 약을 써주고 깨끗한 물을 대주었다. <황룡국>「선왕仙王」<온昷>공이 죽었다. 나이 마흔넷{BCE66年生}으로, <모수제>의 별자別子{庶子}였다. 그 어미 <양방羊芳>이 <양길羊吉>에게 핍박을 받고 죽었더니, <양길>은 이 일로 <온>공을 심히 후하게 대하였으며, 자기의 딸을 그에게 처로 주고 「천제天帝」로 존숭尊崇하였었다. 상께서 <황룡>땅에 당도하시매 <온>공이 찾아와서 항복하였더니, 상께서는 「선왕仙王」으로 낮추어 봉하시고 「중천공中川公」으로 칭하셨다. 위인이 나약하고 무능할 뿐만 아니라, 환후患候와 돌림병疫을 많이 앓더니만 끝내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처에게 년곡年穀{매년 먹을 곡식}을 하사하셨다. 「태보」<오건>이 나이 쉰일곱에 죽었다. <오건>은 「순노왕」<오천>의 아들로, 그 어미는 상의 누님인 <황凰>공주였다. 위인이 충성스럽고 후덕하여 사람들을 아꼈으며 나라를 위해서는 충성을 다하면서 다른 이들과 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의 처 <을전>씨가 상의 총애를 받는 비가 되어서 누차 잠자리가 쓸쓸하였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또한 사랑함을 저버리지도 않았기에, 상께서 누차 <을전>비더러 <오건>에게 돌아가길 권하셨으나, 지금 <오건>이 죽었더니, 「구여궁태대부인九如宮太大夫人」을 자칭하였다. 상께서 금인金印과 옥장玉章을 하사하시고 이전보다 총애하길 갑절로 해주셨다. <을전>후는 사치하길 즐겼으나 방도房道가 좋아서 능히 상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고, 나이 이미 쉰둘인데도 젊은 여인 같았다. <해덕>을 「태보」로 <오명>을 「좌보」로 삼았다.
二月,<燕宜>,與其妻<秋>氏,入朝.<秋>,故<柒>公之妻也,上知<秋>氏之忠不能救其急,生其子女而献其二女于上.一則<柒>公之女,一則<燕宜>之女也.二女皆得上寵而娠故,<燕宜>聞其女言而知上無害意而来也.上,使<扶尉厭>立<燕宜>為「盖馬王」,命<小噲>入朝.<秋>氏,依<柒>公遺命,欲得上子為嗣故,乃留後宮,年已三十九而二齒落.<陜父>諫其留,上重<柒>公之意而不聽其諫. <孟>皇后染疫而崩,春秋四十三,上慟哀之,葬于<真珠陵>側,以其子<桓福>為「主農大加」,<仲室禹>「主賓大加」. 以「九如宮太大夫人」<乙旃>妃為苐三皇后使居<孟>后宮.於是<乙>氏之勢大昌,而<召>皇后寵益加焉. <禾英>后生<穀>太子,請以年老退去.上慰之,曰“汝以<乙旃>之故,怨我邪.”<英>曰“豈敢妬哉.今畨産渋,故恐年老也.”上曰“姑待之,吾所以不階汝者,恐群臣之議也.汝秩當重於皇后位矣.”乃以「禾英宮」為「瓊天宮」. <奧坤>夫人生<黔乙>太子.上與<乙旃>后徃慰之,加其奴婢牛羊.乃<旃>出<犍>女也.
2월, <연의燕宜{潢水上으로 逃走한 盖馬王}>가 자기 처 <추秋>씨와 더불어서 입조하였다{盖馬의 完全한 服屬}. <추>씨는 죽은 <칠柒>공의 처였었다. 상께서는 <추>씨의 충정을 아시고서도 그녀를 위급함에서 구해주지 못하셨더니, <연의>의 아들과 딸을 낳았으며, 두 딸들을 상께 바쳤었다. 하나는 <칠>공의 딸이었고, 하나는 <연의>의 딸이었는데, 두 딸들 모두 상의 승은을 입고 임신하였다. 때문에 <연의>가 그 딸들의 말을 듣고서 상께서 해코지할 의향이 없으심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상께서 <부위염>으로 하여금 <연의>를 「개마왕」으로 다시 세우게 하셨으며, 명을 내려서 <소쾌{燕宜子}>를 입조케 하셨다. <추>씨는 <칠>공의 유명을 좇아 상의 아들을 얻어서 후사를 삼으려하였던 까닭에 후궁에 남았다. 나이가 이미 서른아홉{BCE61년생}에다가 이미 이 두 개가 빠져있었더니, <협보>가 그녀를 머물러있게 하시는 것을 말렸으나, 상께서는 <칠>공의 뜻을 중히 여기셔서 그의 간언을 들어주지 않으신 것이었다. <맹{桂孟子}>황후가 병이 옮아서 죽었다. 춘추 마흔 넷{BCE65년생}이었더니, 상께서 이를 애통히 여기셨으며, <진주릉眞珠陵{桂后陵}>곁에 장사하고, 그녀의 아들 <환복桓福>을 「주농대가主農大加」로, <중실우仲室禹>를 「주빈대가主賓大加」로 삼으셨다. 「구여궁태대부인」<을전{召后姨母}>비를 제3황후로 삼으시고 <맹>후의 궁에서 거처하도록 하셨다. 이에 <을>씨들은 크게 번성하였고, <소>황후에 대한 총애도 보다 더하여졌다. <화영>후가 <곡穀>태자를 낳아놓고서 나이가 들었으니 물러나서 돌아가겠다고 청하매, 상께서는 그녀를 위로하시며 이르시길 “그대는 <을전>의 일로 나를 원망하는 것이오?”라 하셨더니, <화영>이 아뢰길 “어찌 감히 투기하겠습니까? 이번엔 애 낳기가 껄끄러웠기에 나이가 늙었을까 걱정하였음입니다.”라 하매, 상께서는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가 그대를 올려주지 않았던 것은 군신들의 의론을 겁낸 때문이었소. 그대는 마땅히 품계가 황후보다 중重{높아야}했어야 할 것이요.”라 하시고 「화영궁禾英宮」을 「경천궁瓊天宮」으로 하였다. <오곤奧坤>부인이 <검을黔乙>태자를 낳았더니, 상께서 <을전>후와 함께 찾아가 위로하시고 노비 및 소와 양을 더하여 주셨다. <을전>씨 소생 <오건奧犍>의 딸이다.
三月,<涉臣>送其妹<可突>納後宮,上命置「譯院」使習諸語.<可突>能通<漢>‧<胡>之語故,有是命.「習語之院」始此. 上與<旃>后,如<䟽勒>園観梅,<勒>献黃金七百斤於<旃>后又献猉麟玉盃於上.上與<旃>后醉舞,<勒>之妻女皆助舞,稱曰<梅花舞>,其俗始此. <馬韓>人<甘成>来献翡翠桃盒于<召>后曰“得於<漢>之南方”云.時,<召>后<雙鸞殿>成,飾以金玉‧香木,非初年之宮制也.上以為太侈,后以為不足以為天子之居.<召>后,盖好奢侈,而寵高,頗多自專,每聞<漢>宮之制而不見<穹廬>之居故,其言如是.上雖多后妃,而<召>后常專房多寵.宮室起居之事多出其意,未免始儉終侈之責矣. 以<漢>人<衛秀>為「医薬博士」.<秦章>如<柵城>為<蛙>王所留,<鄭共>乃薦<衛秀>為宮中之医.<秀>,詳敏溫順,謹勤如一,宮中皆稱其賢.比<秦章>之踈濶高傲,反有譽聲.
3월, <섭신{鮮卑王}>이 자기 여동생 <가돌可突>을 후궁으로 바쳐와서, 상께서 명하시어 「역원譯院{通譯員}」을 두시고 여러 가지의 언어들을 교습하게 하셨다. <가돌>이 <한漢>어와 <호胡>어에 능통하였던지라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었으며, 「습어원習語院{外國語敎習學院}」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상께서 <전旃>후와 더불어 <소륵踈勒>의 정원{在黃龍河濫}으로 가셔서 매화梅花를 즐기셨더니, <소륵>이 황금 700근을 <전>후에게 바쳤고 또한 기린옥배猉麟玉盃를 상께 바쳤다. 상께서 <전>후와 더불어 취醉하시어 춤을 추셨더니, <소륵>의 처들과 딸들 모두가 춤을 도왔다. 이에 <매화무梅花舞>라 불리게 되었고, 그 습속은 이리 비롯된 것이었다. <마한>사람 <감성甘成>이 찾아와 비취도합翡翠桃盒을 <소>후에게 바치며 아뢰길 “<한漢>의 남방{西漢의 남쪽 땅, 또는 漢山・漢水・漢河의 남쪽 땅}>에서 얻은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때, <소>후의 <쌍란전雙鸞殿>이 완성되었고, 금金과 옥玉 및 향목香木으로 치장하였다. 초년의 궁전꾸미기가 아니어, 상께서는 지나치게 호사스럽다고 여기셨으나, <소>후는 천자의 거처로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소>후는 개략 사치하길 좋아하였음이며 총애가 높았음에 꽤나 자기 멋대로 하면서 매번 <한>의 궁전꾸미기는 청하여 듣고 <궁려窮廬{北方人居所?}>는 눈여겨보지 않은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셨던 것이었다. 상께는 비록 후비后妃들이 많으셨지만, <소>후가 항상 방사房事를 독차지하여 총애함이 많았다. 궁실宮室의 기거起居에 관한 일은 많은 것이 그녀의 안중에서 나왔었더니, 시초엔 검소하였다가 종당엔 사치하였다는 책망을 면할 길이 없었다. <한漢>인 <위수衛秀>를 「의약박사醫藥博士」로 삼았다. <진장>이 <책성{東夫余都城}>으로 갔다가 <금와>왕에게 붙들려있게 되어서, <정공>이 이에 <위수>를 천거해 궁중의 의원으로 삼았음이었다. <위수>는 상세하고 민첩하였으며 온순하고 삼가면서 부지런함이 하나같았더니, 궁중의 모든 이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칭송하였다. <진장>이 거칠고 으스대며 거만한 것과 대비가 되어서, 오히려 명성이 있었다.
四月,<召>皇后親蚕,<旃>皇后親氊,<禾>小后親麻.上,親耕于「東都」南郊,召太史占年豊祭牛神. 「荇南沛者」<祖天>卒,以<奧天>代之. 徵<盖馬>‧<勾茶>‧<黃竜>‧<荇人>‧<卑离>壯丁,修築<南口>‧<鵠林>‧<南蘇>‧<河陽>等城.其費浩創,上曰“戦則傷,守則勞,天下事固不容易也.拓地千里一時之勢也.片土不失万代之力也.馬上之得城而保之然後,不泡馬上之得矣.吾子其安而保吾勞可也.遂决守成之策,而不招安平.” 癘疫以来,遺尸抛野者,命皆埋之.以掩骼埋臠為一功而獎民掩尸. 上謂「主民卿」曰“民之生也以穀,病也以薬矣,有穀無薬安能生民也,宜敎民以薬.”乃置薬田千頃,使民種裁而考其績,能者以為薬師分置各州,州置「刺使」曰「于臺」,三十三人;
4월, <소>황후가 친히 잠사蠶事를 하고, <전旃>황후가 친히 양털로 천을 짜고, <화禾>소후가 친히 마사麻事를 하였다. 상께서는 친히 「동도」 남쪽 교외에서 밭을 일구셨으며, 태사太史를 불러 풍년豊年을 점치시고 우신牛神{豊穰神;≠牛莖}에게 제사하셨다. 「행남패자」<조천祖天>이 죽어서 <오천>이 대신하게 하셨다. <개마>・<구다>・<황룡>・<행인>・<비리>땅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남구南口>・<곡림鵠林{谷林,穀林}>・<남소南蘇>・<하양河陽> 등의 성城들을 고쳐쌓았다. 그 비용費用이 컸었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전쟁을 하면 상傷하고, 지키기는 힘이 드니, 천하를 다스리기는 분명 쉽지 않소이다. 천 리 땅을 넓히기는 일시의 세력으로 되는 일이지만, 한 조각 땅을 잃지 않는 데는 만대萬代의 힘이 드는 것이오. 말 위에 올라서 성城들을 얻으면 지켜야하며, 그리 한 후에 말을 타고 얻은 곳을 번성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자식들이 그 어찌 우리들의 수고愁苦를 지켜낼 수 있겠소. 그러니, 지켜서 이룰 계책을 결행하면서 편안하길 찾지 맙시다.”라 하셨다. 창질癘疫{염병}이 성행한 이래로 시신들을 들판에 놓아두거나 내다버리는 일이 있었더니, 명을 내리시어 모두를 땅에 묻도록 하셨다. 해골骸骨들을 모으고 흩어진 살점들을 땅에 묻는 것을 하나의 공적功績으로 삼아주셔서 백성들이 시신屍身을 묻도록 권장하셨다. 상께서 「주민경主民卿{主民大加}」에게 말씀하시어 이르시길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곡식이 있어야 하고, 병病에는 약藥이 있어야 할 것이며, 곡식은 있으나 약이 없으면 어찌 능히 백성들을 살릴 수 있겠소. 백성들에게 약을 가르쳐야 할 것이오.”라 하셨다. 이에 약초 밭 1,000경{千万坪; 1頃=100苗, 1苗=100坪, 1坪=330㎡}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종자種子를 심어 재배하게 하시고 그 실적을 따지셨으며, 능통한 이들을 약사藥師로 삼아서 각 주州들로 나누어보내셨고, 주州들엔 「우대于臺」라는 「자사刺使」를 두셨더니, 33인이었다.
<觧凍><松江州>刺使, <奧蠻><河南州>刺使,
<奧淸><汗濱州>刺使, <牛太><湯東州>刺使,
<松成><湯南州>刺使, <松喜><湯西州>刺使,
<禾突><湯北州>刺使, <五文><梁山州>刺使,
<契元><大河州>刺使, <祖駿><荇北州>刺使,
<多古><荇東州>刺使, <沙信><荇西州>刺使,
<祖賓><荇南州>刺使, <仇連><淹淲州>刺使,
<乙福><鯤淵州>刺使, <克榮><毛屯州>刺使,
<乙辰><牛壤州>刺使, <正福><汗南州>刺使,
<羊臣><箕東州>刺使, <桓人><桂林州>刺使,
<桂文><桓那州>刺使, <大房允><西河州>刺使,
<楝直><中川州>刺使, <仲室六宗><西川州>刺使,
<魚雲><杜訥州>刺使, <小室甫><梁㹮州>刺使,
<龜三><卑离州>刺使, <張索人><高顯州>刺使,
<尙海><黃山州>刺使, <鄭道東><長岺州>刺使,
<桓卑><豊城州>刺使, <鄭[道]宋><南蘇州>刺使,
<漢悉><南口州>刺使;
皆賜二妻三妾.
<해동><송강주>자사, <오만><하남주>자사,
<오청><한빈주>자사, <우태><탕동주>자사,
<송성><탕남주>자사, <송희><탕서주>자사,
<화돌><탕북주>자사, <오문><량산주>자사,
<설원><대하주>자사, <조준><행북주>자사,
<다고><행동주>자사, <사신><행서주>자사,
<조빈><행남주>자사, <구련><엄표주>자사,
<을복><곤연주>자사, <극영><모둔주>자사,
<을진><우양주>자사, <정복><한남주>자사,
<양신><기동주>자사, <환인><계림주>자사,
<계문><환나주>자사, <대방윤><서하주>자사,
<련직><중천주>자사, <중실육종><서천>주자사,
<어운><두눌주>자사, <소실보><양맥주>자사,
<구삼><비리주>자사, <장삭인><고현주>자사,
<상해><황산주>자사, <정도동><장령주>자사,
<환비><풍성주>자사, <정도송><남소주>자사,
<한실><남구주>자사;
모두들에게 2처 3첩을 하사하셨다.
五月,禁民賣子女為奴婢以娛其身. 上,與<旃>后,如<九如>牧丹園,宴<奧>氏兄弟姉妹及<乙>氏‧<觧>氏之族. 選囯中秀才‧秀媛,使入「宗府」敎以文字‧禮儀以配宗子‧宗女,戚里子女以補諸司之官. 上,東巡至<樂浪>,浮海,納<柴吉>女<鵲>氏為夫人,盖<陜父>之請也.
七月,禁両都蕩子女犯夜穢行以乱風化,乃<大房良>之請也. 上,與<召>皇后,如<胡盧湖>玩月食瓜,而慰二<桂>之靈於湖上神祠. 收民間神馬以為官神馬,使<馬黎>考其優劣而䓁之.
7월, 두 도성都城{西都와 東都}의 방탕放蕩한 자녀들이 밤중에 돌아다니며 지저분한 짓으로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금하셨다. 이는 <대방량>이 청한 것이었다. 상께서 <소>황후와 함께 <호로호胡盧湖{河北省大陸澤 西方 또는 西北方之境?}>로 가셔서 달을 감상하시면서 참외를 맛보셨고, 두 <계桂>후들{桂后, 孟后}의 혼령을 호수 곁 신사神祠{魂靈을 모신 祠堂}에서 위로하셨다{☞胡盧湖 곁에 真珠陵이 있는 真珠河山이 있었나?}. 민간의 신마神馬{종마수컷}들을 모아들여서 관부官府의 신마로 삼고 <마려馬黎>로 하여금 이들의 우열優劣을 살펴서 무리를 나누게 하셨다.
八月,上,與<召>皇后,親閱神馬二千匹于<汗濱>,而試其騎馳而賞其優者. 親行聖母大祭于聖母庙,封「庙主」<奧芳>夫人為上品王大妃,賜翟服花魚.<芳>,<犍>之妹而「松江王」<觧德>之妻也,「刺使」<凍>之母也.時,年四十三,而得上寵生二子,皆敀于<德>而不取. <觧朱>與<都孫>来朝.上,見<都孫>皃,类其母,抱而落淚,賜<朱>一品公服‧<都孫>翟服.<朱>言“<類利>與<觧百>不和.”上命<朱>徃諭<利>義. <召>皇后,方寵隆,欲以己子為嗣,恐<類利>不久来朝,與<旃>后說上曰“今天下稍定,<順>‧<卒>之民,民皆願立正胤.”上曰“朕年尙少而諸子皆幼,立胤似早.”<召>后乃與<乙耕>‧<陜父>動上意曰“上意若在於<類利>太子,則待其来而改之,未晩也.然,<蛙>王質聖母而欲制上,豈肯赦<類利>乎.帝王之事不可豫測故,莫不立胤而副望也.權且立胤以順天意人心,何如.”上曰“平時立長嫡,而難時立智賢.今吾子皆幼而且當難時,誰最可乎.”皆曰“<萱>太子與<沸流>太子,皆嫡長而仁賢,皆懦弱而智不足.<高婁>太子雖賢亦近於不智.請立<斗切>太子為正胤.”上曰“朕意亦然.渠,年尙幼奈何.”衆乃固請,上不得已許之.
8월, 상께서 <소>후와 더불어 친히 신마 2,000필을 <한빈>에서 검열하시고 그들을 타고 달리는 것을 시험하셔서 우수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셨다. 친히 성모큰제사를 성모사당에서 거행하시고, 「묘주廟主」 <오방奧芳>부인을 상의 품계인 왕대비王大妃로 삼으시고 적복翟服과 금화金花와 금어金魚를 하사하셨다. <오방>은 <오건奧犍>의 여동생으로, 「송강왕松江王」<해덕觧德>의 처이고, 「자사刺使」인 <해동觧凍>의 어미였다. 이때, 나이 마흔 셋이었으며, 상의 승은을 입고 두 아들을 낳았었으나 모두를 <해덕>의 아들로 하여서 취하지 않으셨다. <해주觧朱>가 <도손都孫>과 함께 래조하였다. 상께서는 <도손>의 모습이 그 모친을 닮았음에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해주>에게는 1품 공복公服을 <도손>에게는 적복翟服을 하사하셨다. <해주>가 아뢰길 “<유리>가 <해백觧百>과 화목하지 않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해주>에게 명하시어 돌아가거든 <유리>가 엇나가지 않도록 깨우쳐주게 하셨다. <소>황후가 지금 총애가 두텁더니 자기의 아들을 후사後嗣{東宮}로 삼고 싶었던지라 <유리>가 오래지않아서 찾아와 입조할까 두려우매, <전>후와 함께 상을 설득하며 아뢰길 “지금 천하가 점차로 <순노>와 <졸본> 백성들이 평안하게 되었더니, 백성들 모두가 정윤正胤{東宮}을 세우시길 원하고 있사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짐의 나이 아직 젊고, 여러 아들들 모두가 어리니, 정윤을 세우기에는 이른 것 같소이다.”라 하셨다. <소>후는 이에 <을경>・<협보>와 더불어 상의 마음을 흔들며 아뢰길 “상께서 의중에 <유리>태자에게 있으시다면, <유리>태자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바꾸셔도 늦지 않습니다. 허나, <금와>왕이 성모를 인질로 삼아서 상께서 꼼짝 못하시게 하고 있는데, 어찌 <유리>를 풀어주겠는지요? 제왕의 일이란 예측이 불가한 것이어서 정윤을 아니 세울 수는 없음이오며, 지금 <유리>는 두 번째의 물망物望{候補}이옵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시어 정윤을 세우시고서 하늘의 뜻과 민심을 따르는 것이 어떠하시겠는지요?”라 하매, 상께서 이르시길 “평탄한 시절이라면 적장자嫡長子를 세우고, 혼란한 시절이라면 지혜智慧롭고 현명賢明한 이를 세워야 할 것인데, 지금 내 아들들 모두가 어릴 뿐이고, 게다가 혼란한 시절에 봉착하여 있으니, 누가 가장 좋겠소?”라 하셨더니, 모두가 “<훤>태자와 <비류>태자께서는 모두 적장嫡長들로 어질고 현명賢하시나 모두 나약하고 지혜가 모자라시며, <고루>태자께서는 현명하시나 지혜롭지 못함에 가까우십니다. 청하옵건대, <두절斗切>태자를 정윤으로 세우소서.”라 하매, 상께서는 “짐의 생각 역시 그러하지만, 그 애는 나이가 아직 어리니 어쩌겠소?”라 하셨어도, 많은 이들이 이에 굳게 청을 하매, 상께서 부득이 허락하셨다.
十月,以<斗근>太子為正胤,以<烏干>女為太子妃,以<馬黎>為「東宮師」使習文字經籍. <禾>小后生<羔>太子,以<暖>公主為<觧晉>太子妃,皆年十四.<晉>母<羊花>入謝上恩,上思<旒>后而抱主鳴咽良久.上之愛子女出人如此. <鄭共>,與<盖馬>反将<胡雉>戦于<胡海>,中矢而薨.上哭哀之,以左輔禮葬之,陞其子女爵一級.<共>父<漢>人而母<黃龍國>豪族<土垣>氏也.其妻<張>氏,<漢>豪之女,以美色累承上寵而生皇子女,上以是益重之,其兄妹諸侄皆至貴顯.上,納<張>氏「琳宮」,而以皇后例待之. 以<元昜>公主為<沸流>妃.
10월, <두근>태자를 정윤으로 삼고, <오간>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셨으며, <마려>를 「동궁사東宮師」로 삼아서 문자文字와 경적經籍들을 가르치게 하셨다. <화>소후가 <고羔>태자를 낳았고, <난>공주가 <해진觧晉>태자비가 되었는데, 모두 나이가 열 넷이었다. <해진>태자의 어미 <양화羊花>가 들어와서 상의 은혜에 감사하였더니, 상께서는 <류>후를 떠올리시며 공주를 껴안으신 채로 울음을 삼키셨고 오래도록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 상께서 자녀들을 생각하심에 다른 이들보다 출중하시기가 이와 같으셨다. <정공>이 <개마>의 반란 장수 <호치胡雉>와 <호해胡海{山西大同北方葫芦海?}>에서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더니, 상께서 곡하시면서 슬퍼하셨고 「좌보」의 예법으로 장사하시고 그 자녀들의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셨다. <정공>의 아비는 <한漢>인이고 어미는 <황룡국>호족 <토원土垣>씨였으며, 그의 처 <장>씨는 <한> 호족의 딸로 미색이어서 누차 상의 승은을 입고 황자와 황녀를 낳았더니, 상께서는 이로 인하여 그녀를 더욱 소중히 여기셨고, 그녀의 오빠와 여동생 및 여러 조카들 모두가 존귀해지기에 이르렀다. 상께서 <장>씨를 「림궁琳宮{非龍骨出身의 貴한 女人들의 居處 또는 그 宮人}」으로 거두시고 황후에 준하여 대우하셨다. <원양元昜>공주를 <비류沸流>의 비妃로 삼으셨다.
<東明>十六年己亥,春正月,<平>夫人生上女<漢>公主. 「沸流囯王」‧「多勿侯」<松讓>卒,以其子<義>為「多勿侯」爵「中兄」,而<義>妻<奧花>為公主賜翟服花魚,<旃>后出也. 築<河陽>‧<南蘇>‧<豊城>之外城及<黃山>‧<平山>‧<馬山>等城. <禮>后使<皓彬>来献御衣而言“<帶素>大行殺戮,其兄弟多被戮.<蛙>王不能禁之,云.”上,慮<觧朱>等,遣<松義>如<柵城>,使察其動靜而来.<義>母<貫貝>謂<義>曰“汝見<類利>太子,何如.”<義>曰“英雄也.聖上諸子無如此人.”<貫貝>曰“汝何不深結此人乎.汝不聞<呂不韋>之奇貨可居之言乎.”<義>,乃然之,及至<柵城>,與<類利>相通結為兄弟,曰“太子之事,臣當担之.”
<동명>16년기해{BCE22}, 춘정월, <평平>부인이 딸 <한漢>공주를 낳았다. 「비류국왕」・「다물후」 <송양>이 죽어서 그 아들 <송의松義>를 「다물후」로 삼으셨고, 작위는 「중형中兄」이었으며, <송의>의 처 <오화奧花>를 공주로 삼아서 적복과 금화 및 금어를 하사하셨다. <전>후 소생이었다. <하양>・<남소>・<풍성>에 외성外城을 쌓고{☞西南方을 지키는 要地인 듯!}, <황산>・<평산>・<마산> 등에도 성을 쌓았다{☞西南方을 對備한 2차 要地인 듯!}. <예>후의 사신 <호빈皓彬>이 찾아와서 어의御衣를 바치면서 “<대소>가 살육殺戮을 크게 벌여서 그의 형제 여럿이 찢겨죽었으며, <금와>왕도 그 일을 말리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등의 말을 여쭈었다. 상께서 <해주> 등이 걱정되시매 <송의>를 보내시어 <책성>으로 가서 그곳 동정을 살펴오게 하셨더니, <송의>의 어미 <관패>가 <송의>에게 말하여 이르길 “너는 <유리>태자를 만나보았다. 어떠하더냐?”라 하였더니, <송의>가 답하길 “영웅이었습니다. 성상의 여러 아들들 중에 이 사람 같은 이는 없었습니다.”라 하자, <관패>가 “너는 어찌 그 사람과 깊게 결연하지 않았더냐? 너는 <여불위呂不韋>가 진기한 물건을 사두었다가 큰 이득利得을 보았음을 듣지 못하였더냐?”라 일렀더니, <송의>는 그렇겠다고 여기고서 <책성>으로 가더니 <유리>와 상통하여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여 말하길 “태자님의 일은 신이 맡아서 책임을 지겠습니다.”라 하였더라.
三月,上,如<踈勒>園観梅,仍幸<南口>聞<漢素>之言,遂决南下之策,大增水軍及戦艦. <萱>皇后以疾崩,<萱>太子哀毁而亦薨.廢朝三日,上哀痛失聲食不下咽,<召>后慰之曰“南下之計未成而不宜自毁如此,恐<漢素>知之.”<萱>后,以上之至親為上之寵姬,及<都>‧<禮>之為正后,出為<加菽>公妃.上之南下,從而居中宮十九年,專房生子女七人.春秋五十,性寬厚恕人,未嘗妬一後宮,而寵常居首,<召>后次之.常以事委於<召>后曰“我老不及<召>妹,陛下宜從<召>妹言方可無事.”上,猶重<萱>而輕<召>曰“十<召>不如一<萱>.”自<萱>之沈疾以来,<召>寵頗加,無復與之爭寵者.
3월, 상께서 <소륵踈勒>의 정원{黃龍땅西川河濫}으로 가시어 매화를 둘러보시고, <남구{盖馬東北邊땅}>로 거둥하시어 <한소>의 아룀을 들으시더니 남쪽으로 쳐내려갈 계획을 결심하시고 수군水軍과 전함戰艦을 크게 늘리셨다{☞1次로 平定할 天下가 아니었던 馬韓・辰韓 또는 西漢 등을 征伐할 意向?}. <훤화>황후가 병으로 죽자 <훤>태자가 슬퍼하다가 몸이 야위어 역시 죽었더니, 사흘간 조회를 폐하시고 상께서도 애통해 하시다가 목이 가라앉고 음식을 넘기지 못하셨다. 이에 <소>후가 위로하며 아뢰길 “남하하실 계책을 아직 이루지도 못하셨는데, 이처럼 스스로 몸을 망가뜨리심은 온당치 않으십니다. <한소>가 알까 걱정입니다.”라 하였다. <훤화{柳花妹}>후는 상의 지친至親{姨母}으로 상의 총희寵姬가 되었었다가, <도>씨와 <예>씨가 정후正后로 되기에 이르자, <가숙加菽>공의 비妃가 되어서 출가하였었다. 상께서 남쪽으로 내려오시매{還鄕하시매} 붙좇아 나서서 중궁中宮에서 19년을 지냈고,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아들 딸 일곱을 낳았다. 춘추 50이었으며{BCE71年生}, 성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을 두터이 헤아려주어서 어느 한 후궁도 투기하지 않았더니, 총애가 항상 으뜸이었었고, <소>후는 둘째였었다. 항상, 정사政事는 <소>후에게 맡겨놓고서 아뢰길 “저는 늙어서 <소>매{召西奴}에게 미치지 못하옵니다. 폐하께서는 <소>매의 말을 좇으시면 장차 탈이 없으실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도리어 <훤화>후를 중시하시고 <소>후를 경시하시며 이르시길 “열 <소>가 <훤> 하나만 못하다.”고 하셨으나, <훤>의 환후가 깊어진 이래로 <소>후를 총애하심이 꽤나 늘었더니, 누구도 다시는 <소>후와 총애를 다툴 수 없게 되었더라.
四月,大閱水軍于<河濱>,入「河濱侯」<漢素>之<湖宮>幸<漢素>妻<大房>氏及<仇>氏.<仇曼>,本上之寵姬,時年二十六.<大房暖>,本<素>之正妻,亦累經寵幸而生上子女,而終始以老自処而不近于上.上,雖爱其豊厚有德,知其有閨範而不奪其志者亦多矣.至是,又被寵而娠.時年三十九,未嘗小耗而稱老故,上嘲以為此“吾老妻君.” 移<河濱>軍於<南口>,分十二部,将攻<安平>.以<鄭共>副妻<桓曼(福妹)>妻<漢素>為苐三妻,亦上之所累幸者也.上,每以寵姬賜寵臣,又好幸寵臣之妻如是矣.上,以<鄭共>之妻妾皆賜<共>子<道東>為妻妾,而唯<張>氏‧<桓>氏入後宮.至是,又以<桓>氏賜<漢素>.<素>,以<仇>‧<桓>為上陛,澤而事之如君,稱臣而侯之,上益敬<漢素>.
4월, 수군水軍을 <하빈河濱{潮白河下流沿邊}>에서 친히 사열하시고{☞南進準備}, 「하빈후河濱侯」<한소>의 <호궁湖宮>으로 들르셔서 <한소>의 처들인 <대방>씨 및 <구仇>씨에게 승은을 내리셨다. <구만仇曼>은 본시 상의 총희였으며, 이때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대방난>은 본시 <한소>의 정처였으며, 역시 누차 승은을 입고 상의 자녀를 낳았는데, 시종 나이가 들었음을 자처하며 상을 가까이하지 않았었고, 상께서는 비록 그녀가 얼굴이 통통하고 덕이 있음을 어여삐 하시면서도 그녀가 규방의 도리를 지킴을 아시는지라 그녀의 의지를 꺾지 않으려 하신 적이 많았으나, 이번에는 승은을 입고 아이가 생겼다. 이때 나이 서른아홉으로 흠이 생긴 곳이 없음에도 늙었다고 하였더니, 때문에 상께서 이를 조롱하시며 “내 나이 드신 마누하님”이라 하셨다. <하빈>군{水陸軍}을 <남구>로 옮겨서 12부로 나누었다. 곧 <안평국安平國{이미 服屬・征伐된 卑离・紫蒙・盖馬・勾茶・荇人・黃龍・桓那・涉羅・沸流・卒本 등 이외의 西・南쪽 지역인 山西省西南部沁水流域安邑地境일 것이고, 아직 西漢 또는 馬韓의 侯國이었던 듯!}>을 칠 참이었다{戰艦을 利用하여 현금山西省 汾河나 南流黃河를 順流할 듯!}. <정공>의 둘째 처 <환만桓曼(桓福妹)>을 <한소>에게 처로 주셔서 셋째 처가 되게 하셨는데, 역시 상의 승은을 여러 번 입은 이었다. 상께서는 매번 총희들을 총신들에게 하사하셨고, 또한 총신의 처에게 승은을 내리심이 이와 같으셨던 것이었다. 상께서는 <정공>의 처와 첩 모두를 <정공>의 아들 <정도동鄭道東>에게 처와 첩으로 하사하셨으며, 오직 <장>씨와 <환>씨만은 후궁으로 들이셨다가 지금에 이르러 <환>씨를 <한소>에게 하사하셨더니, <한소>는 <구>씨와 <환>씨를 상전上典으로 여겨서 은덕을 베풀기는 하였으되 임금처럼 섬기면서 신하를 자칭하고 그들의 시중을 들었더니, 이에 상께서는 <한소>를 한층 더 존경하셨다.
七月,與<安平>王<鍾离>戦于<﨎山>,大破之.<离>,奔入<安平>,固守不出.粮盡而退,掠其生口七千人為奴婢,多美女才男. <鍾离>遣使于<鄭宋>請和,上命<宋>遣其使于<漢素>,約歲貢牛馬各千頭‧彩段二千疋‧黃金二千斤‧薬七十種‧豆粱三万石,稱臣‧納女‧生口男三百人‧女七百人為式. <﨎山之戦>「右将軍」<宝燕>身被十創而卒,囊尸而来.上,與其妻<克>氏,撫尸而哭曰“汝乃吾<曹叅>也,當血食千秋.”<克>氏,<再思>女也.時年二十五,只有一子一女而幼未能授爵故,納<克>氏于後宮為夫人.<燕>,學釼于上,以釼術為當世之宗,大戦十余次,身被数十槍,竟死於其術,可謂死於道者也.善攀者墜善泳者沈之謂也. <暖>公主生<觧晉>子<焄>.上,與<羊花宮>,如公主宮撫慰賞賜甚多.
7월, <안평>왕 <종리鍾离>와 <쌍산雙山{山西省南部의 冀城東隣 옛羊角山之境? 王屋山・析城山? 橫嶺關之境?}>에서 싸워서 그를 대파하였더니, <종리>는 <안평{山西省南邊 中條山脈中 安峪? 安邑地境? 沁源隣近安澤舊城?}>성으로 도망해 들어가서 굳게 지키며 나오지 않았다. 군량이 다하여서 물러났으며, 그곳의 생구 7천인을 잡아다가 노비로 삼았는데, 미녀와 재주 많은 남자들이 많았다. <종리>가 사신을 <정도송鄭道宋>에게 보내와서 화친을 청하였기에, 상께서 <정도송>에게 명하시어 그 사신을 <한소>에게로 보내게 하셨더니, 약속을 받아내길, 해마다 소와 말 각각 천 두, 채단 3천 필, 황금 2천 근, 약재 70종, 콩과 기장 3만 석을 조공하고, 칭신稱臣하며 딸과 남자생구 3백인 및 여자생구 7백인을 바치도록 규정規定하였다{☞安平國服屬}. <쌍산전쟁雙山戰爭>「우장군右將軍」 <보연>이 몸에 열 군데의 부상을 입고 죽어서, 시신을 주머니에 넣어서 돌아왔더니, 상께서 그의 처 <극克>씨와 함께 시신을 어루만지며 곡하고 이르시길 “그댄 나의 <조참曹參{劉邦 立國時 蕭何의 戰略을 韓信과 더불어 잘 수행한 武臣}>이었으니, 마땅히 천년토록 나라에선 제사할 것이오.”라 하셨다. <극>씨는 <재사再思>의 딸로 이때 나이 스물다섯이었으며, 단지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으나 아직 어려서 능히 작위를 줄 수 없으셨더니, <극>씨를 후궁으로 들여 부인으로 삼으셨다. <보연>은 칼 쓰기를 상께 배웠으며, 검술로는 당대제일이었으나, 큰 전쟁 10여 차례에 몸에 수십의 상처가 생겨서, 끝내는 검술로 죽었더니, 도道를 위해 죽었다 할 만하였다. 잘 오르는 이가 떨어지고 헤엄 잘 치는 이가 물에 빠진다 함이었다. <난>공주가 <해진>의 아들 <훈焄>을 낳았다. 상께서 <양화궁>과 더불어 공주의 궁으로 가시어 토닥여서 위로하셨으며 상賞으로 하사하신 것들도 심히 많았다.
上姊<蘋花宮>崩,春秋四十四,葬以皇后禮.以其子<宝臣>為「羊花宮大夫」,<宝得>子也.<蘋>乃<羊花>所生<漱帝>之女也.初,入于<羊吉>之後宮生<宝臣>,時年二十二.<蘋>,皃美而善歌善畵.然,左目眇,常着靑玉鏡,以紅玉尺裁袈裟,甚妙繡花鳥為屛.自乙酉歲,從上侍於「瓊府」.上愛重之,事之甚恭如太后禮.<蘋>亦事上,以至誠,生三子一女,曰“不敢希天寵,唯願多生子.”至是,難産而崩.上悲哀而歌曰
“靑玉鏡紅玉尺何處更相見,
翡翠鳥鴛鴦鳥無使我心傷,
蘋花依旧發空洲寒雨滴.”
<琉离明皇>時,有鳳凰來儀於<蘋>太后陵,乃作<鳳凰池>而立<二聖祠>.後人題詩曰
“蘋花初發<鳳凰池>,
回憶當年「比翼」時,
一日三秋脊令愛
如今猶在<鳳凰池>.”
상의 누이 <빈화궁>이 춘추 마흔넷에 죽어서{BCE65年生}, 황후의 예법으로 장사하셨으며, 그녀의 아들 <보신>을 「양화궁대부」로 삼으셨더니, <보득>의 아들이었다. <빈화궁>은 <양화>소생인 <수제漱帝>의 딸로, 애초에 <양길>의 후궁으로 들어가서 <보신>을 낳았으며, 그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빈화>는 미모인데다가 노래와 그림에 능하였으나, 왼쪽 눈이 사시眇視{애꾸눈}여서 항상 청옥靑玉{사파이어} 안경眼鏡을 쓰고 있었고, 홍옥紅玉{루비}으로 된 자尺로 가사袈裟{仙人이나 僧侶의 것 옷}를 지었으며, 심히 기기묘묘한 꽃과 새를 수놓아서 병풍屛風을 삼았었다. 을유년{BCE36} 이래로 상을 따르면서 「경부瓊府{龍骨族들이 거처하는 官府 또는 그 宮人}」에서 모셨더니, 상께서는 애지중지하시며 공경하심이 태후를 모시는 예법과 같았었으며, <빈화> 또한 상을 지성으로 섬기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말하자면, 감히 천자의 총애를 바라지는 않았어도, 많은 아들 낳기는 원했음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난산으로 죽었더니, 상께서 슬퍼하시며 불쌍히 여기시어 읊조리시길
‟청옥안경靑玉眼境과 홍옥척紅玉尺을 어디에서 다시 본단 말인가.
물총새 원앙새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건마는,
빈화蘋花{개구리밥꽃}가 옛날처럼 휑한 모래섬洲에 피었더니,
차가운 빗줄기만 듣는구나.ˮ라 하셨다.
<유리명황琉璃明皇{琉璃光明大皇帝}> 시절엔 봉황이 날아와서 <빈>태후릉을 알아보았더니 <봉황지>를 만들어 <2성사>를 세웠으며, 후세 사람들은 시제詩題로 삼아서 읇조리길
“빈화가 <봉황지>에 처음 피어나서,
「비익」하던 그 시절 돌이켜 생각하노니,
하루가 3년 같았던 아름다운 사랑은
지금은 오직 <봉황지>에만 있었던 것 같더이다.”라고 하였다.
八月,<扶尉厭>伐<九里城>拔之置<句麗縣>入<紫蒙城(昆都)>.<紫蒙>王<西川>以其妻<婁洽>乞命,<尉厭>遂通<婁洽>而妾之,<西川>又以其<雀舌>来乞命.<尉厭>亦取之,約歲貢牛馬二千匹‧薬草二十種‧虎皮七十張而退軍<湖海>,献<紫蒙豕>大如牛者及<婁洽>‧<雀舌>.上問<婁洽>曰“汝,欲敀<西川>乎,敀<尉厭>乎.”<洽>曰“願,作陛下婢.”上曰“汝與<西川>作夫妻十七年,生子女多矣.何可薄情,相棄乎.”<洽>曰“<西川>多美妾,以妾為老朽而棄之.”上遂笑而納之,以<雀舌>為<尉厭>之妻.召<紫蒙豕>翁,養豕于御園取其大牡大牝為種,獎于民間,歲餘牛豕遍滿國中.人稱<尉厭豕>. 上遣使<烏桓>,欲迎<廣>公,公不来.初,公娶<西川>母而為「紫蒙」王,以<西川>為嗣.<西川>長不恭於公,公遂讓位而如<烏桓>.<烏桓>王妃,公之姨也,以公為「囯太王」而與其政,云.
8월, <부위염>이 <구리성九里城{古玄菟땅}>을 빼앗아 <구리현句麗縣>을 설치하고서 <자몽성紫蒙城{河套五原北方紫赤根祠周邊? 山西省지역?}>으로 들어갔더니, <자몽>왕 <서천西川>이 자기 처 <루흡婁洽>을 내어놓으며 목숨을 구걸하기에 <부위염>이 <루흡>과 상통하여 첩을 삼았으며, <서천>이 또다시 <작설雀舌>을 바치며 찾아와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부위염>이 또한 취하고는, 매년 소와 말 2천 필과 약초 20종 및 호피 70장을 조공하기로 약조를 받고 군대를 <호해胡海{山西大同北方葫芦海?}>로 물렸으며, 크기가 소만한 <자몽시紫蒙豕{돼지의 종류}>와 더불어 <루흡>과 <작설>을 상께 바쳤다. 상께서 <루흡>에게 “그대는 <서천>에게 돌아가고 싶은가? <부위염>에게 돌아가고 싶은가?”라 물으셨더니, <루흡>은 “바라옵건대 폐하의 비첩婢妾이 되고 싶습니다.”라 아뢰기에, 상께서 “그대는 <서천>과 더불어 17년을 내외內外{夫婦}로 살면서 낳은 자식들도 많은데, 어찌 그리 박정薄情하게 서로를 저버릴 수 있는 건가?”라 이르셨더니, <루흡>이 아뢰길 “<서천>에겐 예쁜 첩들이 많은지라, 첩을 노후하였다면서 버렸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녀를 거두시고 <작설>은 <부위염>에게 처로 주셨다. <자몽시>를 기르던 노인을 부르시어 돼지를 어원御園에서 길러 큰 수퇘지와 큰 암퇘지를 종자로 삼게 하시고, 민간에서도 기르도록 권장하셨더니, 한 해 남짓하여 소만한 돼지가 나라 안에 널리 가득하였다. 사람들이 <위염시尉厭豕>라고 불렀다. 상께서 사신을 <오환烏桓{옛 朝鮮 一派 鮮卑에서 갈려나간 一派. 현금 몽골국의 서방지경? 烏桓이 현금 赤峰市 인근이었다는 學說은 虛無孟浪한 虛說임}>땅으로 보내시어 <광廣>공을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광>공이 오지 않았다. 애초에 <광>공은 <서천>의 어미와 혼인하여 <자몽>왕이 되었고 <서천>을 후사로 삼았었는데, <서천>이 자라나더니만 <광>공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광>공은 이에 보위를 넘겨주고 <오환>땅으로 갔더니, <오환>의 왕비가 <광>공의 이모姨母인지라 <광>공을 「국태왕國太王」으로 삼고 정사政事를 그에게 넘겼다는 말이 있었다.
九月,大豊,宴父老於<西河>行宮.皇后,親酌勧酒,而觸寒入溫宮生子而夭,悲哀不豫,上爱之抱后度夜.群臣請禱山川,許之.
十月,<鍾离>,遣使請減歲貢,許之.納<离>女<鍾>氏為後宮,年才十三.上,以其年幼,幷求其母<晉>氏為<安平宮>夫人.
9월, 큰 풍년이 들어서 <서하西河{順義縣東鄰 물줄기? 桑乾河 中上流의 西洋河? 山西省西邊 黃河? 河套中西部 西河? 甘肅省東部의 黃河?}>행궁에서 부로들에게 잔치를 베푸셨다. <소>황후가 친히 술을 따라서 마시길 권하다가 한기寒氣를 느끼고 온궁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낳았으나 죽었더니, 슬프고 서러움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상께서 후를 끌어안고 밤을 지새우셨더니, 군신들이 산천山川에 빌기를 청하여, 그리하게 하셨다.
10월, 「안평왕」<종리鍾离>가 사신을 보내서 매년 바치기로 한 공물을 감減해주시길 청하매, 허락하시고는 <종리>의 딸 <종鍾>씨를 거두어 후궁을 삼으셨으며, 나이가 겨우 열 셋이었더니, 그녀의 어미 <진晉>씨를 보내오게 하시어서 <안평궁安平宮>부인으로 삼으셨다.
十二月,「紫蒙王」<西川>與其子<忽赤>入朝.白髮如雪,問其年,四十二也.問其早白之由,“臣自幼好色多房而致如此.”上笑曰“朕亦好色而尙靑.卿之早白非有於好色也.”<西川>曰“臣好少艾而易衰,陛下好腆腴而補陽故也.<洽>勢旺,恐不利於陛下.”上笑曰“卿,與<洽>,十七年「比翼」而棄如弊履乎.”<西川>曰“臣之髮皆為渠之所白也.雖然,深染之女,豈可忘哉.”上,然之,命率<婁洽>而去.<西川>感泣欲留<忽赤>為質,上曰“朕知卿忠厚,何必留子耶.<婁洽>,離鄕日久,娠吾子矣.生子卿子之,生女卿妻之.”<西川>叩頭而去. 以<禾>小后為苐三天后.
12월, 「자몽왕」<서천>이 자신의 아들 <홀적忽赤>과 더불어 입조하였다{☞鮮卑族紫蒙國,服屬?}. 흰 머리가 눈과 같아서, 나이를 물으셨더니 마흔둘이었고, 일찍 하얗게 된 연유를 물으셨더니 “신은 어릴 적부터 색色을 즐겨서 방사房事가 많았다가 이리 되었습니다.”라 하기에, 상께서 웃으시며 이르시길 “짐 또한 색을 즐기나 아직 청청하오. 경이 일찍 희게 된 것은 색을 즐겨서가 아닐 것이오.”라 하셨더니, <서천>이 아뢰길 “신은 나이어린 털북숭이들을 즐겨서 쉬이 쇠한 것이고, 폐하께서는 예쁘고 통통한 여인을 즐기셔서 보양하신 때문이옵니다. <루흡>은 힘이 왕성하니 폐하께 이롭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웃으며 이르시길 “경과 <루흡>은 17년을 「비익比翼{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부부}」으로 살고서도 헌 신짝처럼 버린 것이오?”라 하셨더니, <서천>이 “신의 머리칼 모두는 <루흡> 때문에 희게 된 것이옵니다만, 설사 그랬다 하여도, 속속들이 몸을 섞었던{오래도록 몸을 섞었던} 여인을 어찌 잊을 수야 있었겠습니까?”라 하였다. 상께서도 그리 여기시어 <루흡>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명하셨더니, <서천>은 감읍하여 <홀적>을 인질로 남겨놓으려 하였고, 이에 상께서 이르시길 “짐이 경의 충정이 두터움을 알고 있는데, 하필 아들을 남겨놓겠단 말이오? <루흡>이 고향을 떠난 지 오래이어서 내 자식을 가졌소. 아들을 낳거든 경의 아들로 삼고, 딸을 낳거든 경의 처로 삼으시오.”라 하셨더니, <서천>은 머리를 조아리고 돌아갔다. <화禾>소후를 제3천후로 삼았다. // - - 계속 - -
"安平國"의 위치를 산서성 서남부 정도로 추정하지만, 보다 적확한 비정을 위한 도움을 필요합니다.
아울러서, 후세 역사{前燕・後燕・南燕・北燕}의 적확한 해설을 위해서라도 "자몽성紫蒙城" 위치 비정이 중요합니다. 제현님들의 도움이 있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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