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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맨 호킨스는1924년부터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색소폰의 개척자라고 불리우는 그의 연주법은 30년대 모든 색소폰 주자들의 모방이 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 때가 1933년 경으로 호킨스에 비해 9년 정도 데뷔가 늦은 레스터 영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레스터 영은 1930년대에 캔사스밴드인 <블루 데블즈>의 일원이 되었으나 밴드의 운영이 어려워 고생만 하다가 탈퇴하게 되고 킹 올리버 악단에 들어가 약 1년 정도 활동하고 있었다.
이후 블루데블스 시절 동료였던 카운트베이스를 찾아갔다. 그렇게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 머물기 로 했으나 곧 뉴욕의 플레처 헨더슨으로 부터 편지를 받게 된다. | 이렇게해서 레스터 영은 뉴욕으로 떠나게 되고 코튼클럽에서 플레처 헨더슨 악단의 오디션을 받게 된다. 오디션에서 콜맨호킨스의 남성적인 연주에 익숙해 있는 단원들로선 여성스럽고 멜로딕한 연주를 하는 레스터 영은 부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호킨스의 제자인 츄 베리(Chu Berry)를 쓰자는 단원들도 있었다. 츄 베리는 콜맨 호킨스처럼 강렬하고 남성적인 소리를 내는 연주자였다. 호킨스적인 연주를 원했던 단원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나 레스터는 플레처의 악단에 일원이 되었고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지냈는데, 플레처의 와이프 는 아침마다 레스터 영에게 콜맨 호킨스의 레코드를 들려주는 것이었다 레스터영에게 조금이나마 호킨스적인 소리를 얻고 싶었던 플레처가 시킨 일이었다. 결국 콜맨 호킨스처럼 불고싶지 않았던 레스터 영은 플레처 헨더슨 악단에 사임의사를 스스로 밝히고 떠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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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년 정도의 활동을 마친 레스터 영은 다시 카운트 베이시 악단으로 복귀하였고 콜맨 호킨스적인 화려한 즉흥연주는 아니었지만 점차 자신만의 개성을 부각시키며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마침 부드러운 스윙을 개성으로 했던 카운트 베이스 악단과 궁합이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레스터 영의 연주력에 대해서는 츄베리와 둘이서 연주력 대결을 벌인 일화가 있다. | 호킨스가 없던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츄 베리와 잼 연주를 벌였을때 레스터영의 연주는 츄 베리 뿐 아니라 좌중을 압도하였다. 모든면에서 레스터가 우세했으나 츄 베리에 비해 소리가 작았다. 레스터의 단점이라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레스터 영의 연주자 진정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그보다 10년 정도 후에 발생한 모던재즈 시대에서 였다. 콜맨 호킨스가 언제나 최고의 대우를 받았을때 레스터 영은 인정받지 못했지만 1950년대 등장하게 될 쿨(Cool)재즈의 대표적인 연주자들 즉, 마일스 데이비스, 쳇 베이커, 스탄 게츠와 같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레스터 영의 영향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콜맨 호킨스와 레스터 영|작성자 ifairsa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