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되신 예수님은 순결한 심령에 찾아오시길 기뻐하신다. 이 순결한 심령을 준비하는 방법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로를 입음이다. 그래서 내 죄과와 죄성과 내가 처리될 때 성령의 바람 따라 사랑의 영으로 임하신다. 이 성결은 영적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요건으로 잃을 때 율법과 양심의 돌이 죽이려 한다. 일단 죄악이 처리되면 신랑 예수님은 특별한 사랑인 천상의 경험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하늘의 관점으로 보게 하사 그리웠던 세속은 그만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고 만다.
설 명
1. 배 경
⇒ 신혼의 초야와 신혼여행을 기록한 솔로몬의 노래이다.
2. 적 용
(진단) 파트너로서 다른 이성을 생각하지는 않나요?
(해결) 이건 신앙의 문제이니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십시오.
3. 신혼의 초야
6절 “날이 기울고 -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밤이 오면 신부에게로 들어가겠다는 신랑의 결심이다.
(객) 율법이 끝나는 때에 성자께서 구속사역을 위해 오실 것이다.
(주) 신랑 되신 주님은 순결한 심령에 찾아오신다.
① 준비 방법
몰약 - 죽으심의 공로
유향 - 기도로 말미암는 성령의 적용
② 찾아오심의 모습
저녁 동풍처럼 성령의 바람 따라 사랑의 영으로 임하신다.
4. 신부의 처녀성
7절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영적 순결은 영적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요건이다
이 순결을 잃을 때 율법과 양심의 돌이 죽이려 한다.
겁간에서 보호받는 비결 : 부르짖으라 (신22:23-27).
5. 신혼여행
8절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 내려다보아라”
신랑으로서의 예수가 찾아오시면
세상에 미련 두지 않을 만큼 천상 경험이 주어지며
하늘 관점으로 그리웠던 세속은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바뀐다.
아가 4:6-8
6 (솔로몬)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신랑은 사랑하는
신부를 취하기 위하여
신혼의 첫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밤은 신부의 순결이 확인되는 밤이었고
만약 이 순결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신부는 신랑의 고소로
돌에 맞아 무참히 죽게 됨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그 날 밤 신랑은 신부의
순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후 신랑은 신부를 위로하고
신부의 마음까지도 온전히 데려오기 위하여
신부의 고향 레바논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여행은 다정 다감한 오누이와 같아 보였다.
술람미는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
공원 정상에서 두고 온 고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잊지 못할 오빠들의 학대가 있었던 곳
그러나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정든 고향이 아니던가
신부는 신랑의 고마운 배려에 고향을 잊고
신랑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아무 흠이 없구나” 입니다. 본문 6-8절은 신혼의 초야를 기록한 솔로몬의 노래입니다. 내용을 분해하면 6절은 신혼의 초야를 기다리는 신랑이 마음이고, 7절은 신혼의 초야에 신부의 순결성이 확인되는 장면이며, 8절은 이제 신부를 위로하고 그녀의 마음까지도 정든 고향집에서 온전히 자기에게로 데려오기를 원하는 신랑의 노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 하는 바는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1. 주님께서는 거룩한 성도에게 신랑으로 찾아오십니다.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했습니다.
여기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라고 한 것은 신혼의 초야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신랑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함입니다. 여기 “날이 기울고” 의 원문은 ‘그 날이 숨을 쉴 때까지’ 의 뜻입니다. 솔로몬이 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이스라엘에는 낮 기온은 높고 밤 기온은 낮아 동풍이 불기 때문에 밤을 이처럼 시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에발트, 게제니우스, 로젠뮐러, 퍼시, 바타블루스, 굿, 에인즈워드 등). 그러니까 밤이 오면 그 뜻인데 바람처럼 그러니까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서 혹은 아무도 모르게 신부에게로 들어가겠다는 방법적 은유입니다.
그리고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이란 신부의 준비되어진 몸을 나타냅니다(G. Loyyd Carr, 에발트, 퍼시, 그로티우스. 아가페 성서사전 493p). 신랑은 준비된 신부의 몸에 대해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들의 목욕 문화를 보면 강한 타올을 많이 사용하여 피부가 거친데 이것은 부부의 행복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당시 몰약과 유향은 여성들의 피부를 가꾸는 중요한 화장품으로 신부는 이 날을 위하여 철저히 자기를 준비하기 때문에 준비되어진 몸을 시사합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몰약은 방부제로서 그 동안 지켜 왔던 처녀성을 상징하며 유향은 젖 빛나는 액체의 향이라는 점에서 유방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부의 몸을 산으로 표현함은 어떤 정복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본서의 여러 곳에서 신부를 동산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4:6, 12, 15, 16, 5:1, 6:2, 8:3). 그러니까 이 구절은 신랑이 신혼의 첫 밤에 신부에게 들어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로 보면 신랑 되신 주님께서도 구속의 은혜로 준비되어진 순결한 심령에 찾아오신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대로 죄인으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순결이란 신앙을 통하여 도달한 심령의 거룩을 의미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심령의 순결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순결한 심령에만 신랑의 모습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슨 말이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구주의 모습으로는 심령이 마구간보다 못해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찾아오시지만 신랑의 모습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는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교훈이지만 신령한 의미에서는 신부의 기름 준비 즉 자기의 신령한 단장을 교훈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사랑 안에서의 연합을 경험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거룩합니까? 그 방법이 바로 술람미가 자기를 단장했던 몰약과 유향입니다. 여기 몰약은 화장품이나(아5:5, 에2:12, 시45:8, 잠7:17) 썩지 않기 위해 시체 등에 바르는 방부제로서(출30:23) 십자가의 공로의 상징이요, 유향은 성경에서 기도의 상징입니다. 즉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을 때 성도는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 말고 거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단숨에 되지 않고 에스더와 같이 몸을 정결케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에2:12-13). 에스더서 2장을 보면 몰약과 다른 향품으로 열두 달을 준비하는데 여기서의 12수는 제자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신앙훈련 잘 받아 믿음으로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신앙으로 준비되므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과 같습니다. 신앙 훈련이란 용어를 씀은 신앙이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경건을 연습해야 합니다(딤전4:7-8). 즉 십자가 복음과 아울러 충실한 기도생활은 항상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주의 공로를 믿어도 기도를 게을리 하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의 충실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때 본문의 날이 기울어 찾아오는 동풍처럼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 따라 주님께서 사랑의 영으로 임하십니다.
2. 성도에게 있어서 거룩이란 생명처럼 귀중하다는 점입니다.
7절에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랑이 신부의 순결성을 확인하고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여기 “순전히 어여뻐서”란 원문에 ‘네 모든 것이 아름답도다’ 의미입니다. 이 순전한 어여쁨 혹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독특한 칭찬입니다. 그러나 이 네 모든 것이란 표현은 신부의 처녀성을 암시하는 시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성의 순결성은 생명과 같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혼인 첫날밤 신부에 대한 순결성의 확인은 중요한 절차였으며(신22:13-21), 만약 그 순결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신랑의 고발로 그 여자는 사람들에 의해 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신22:13-21). 이는 친정 아버지의 집 앞에서 행해진 공개적인 처형으로 이럴 경우 그 딸의 아버지는 사회적으로도 매장되는 큰 피해를 당했는데 이는 그 책임이 부모에게도 있음을 뜻했습니다(신22:21). 그래서 처녀의 부모는 사위의 누명으로 딸이 피해를 당할까봐 혼인 초야의 침상에 흰옷을 깔아 처녀성이 파괴될 때 생긴 혈흔을 보존하는 풍습이 있었고(신22:17), 무고죄를 범한 사위는 공개적인 태형과 동시에 은 일 백 세겔이라는(신22:29) 무거운 벌금을 장인에게 주어야 했으며 평생 그 아내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간음한 자를 남녀 모두 처형했으며(신22:22) 약혼한 처녀가 성읍에서 강간을 당해도 둘 다 처형했는데 이는 처녀가 소리질러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22:23-27).
이처럼 성도의 거룩은 생명같이 중요합니다. 율법에 자기 딸의 생명을 악한 사위의 누명에서 지키기 위하여 초야의 침상에 흰옷을 깔아 처녀성이 파괴될 때 생긴 혈흔을 보존하던 풍습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시험 속에서 승리하는 성도의 무고한 고난을 욥의 경우처럼 갑절로 보상하십니다. 여기 갑절은 단순한 2배의 의미를 넘어 완전을 시사하는 용어입니다(약1:4). 마치 무고한 처녀를 누명 씌운 사위가 낸 벌금이 처녀를 범했을 때 내는 벌금의 갑절인 것과 같이 무고한 고난을 이긴 성도에게는 은 일 백 세겔 즉 완전하신 구속의 은총을 경험토록 입혀주십니다. 그러므로 약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약혼자로서 세상 미혹의 세력이 너무도 강하여 원치 않게 겁간을 당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는 신22:23-27의 처녀처럼 죽지 않으려면 소리질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함께 처형당합니다. 그것은 장소가 성읍이므로 소리를 지르지 않은 것은 겁간을 수용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리 없이 범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을 때 그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시험에 들지 않게 도우신다는 진리입니다. 어떤 연고든 범죄를 하면 아담처럼 변명해고 하와처럼 변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범죄한 심령은 죽으리라가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않도록 깨여 기도하고 범죄의 위기에 처할 때는 부르짖어 도우심을 받아야 하며 마음으로라도 범죄를 했다면 속히 회개해야 합니다.
3. 주님께서는 성도가 더욱 적극적인 거룩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8절에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했습니다.
문자적인 배경으로 이 부분은 신혼여행에 해당합니다. 신혼여행을 레바논으로 감은 신부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의 신혼생활은 율법에 기록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얼마나 중요시했는가 하면 결혼한 남자는 일 년간 병역을 면제했으며 일조차 시키지 않았고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특례를 베풀었습니다. 신24:5에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풍습입니까? 그래서 신부는 이러한 신랑의 호의에 듬뿍 빠져 그리운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을 잊고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정의 행복을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엿보면서 더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도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 사랑하도록 세상이 베풀어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신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속히 신랑 예수가 찾아오도록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좀 더 강화된 성도의 거룩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속에서 분리되고 주님만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자꾸만 세속에 대한 그리움이 찾아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본문의 배경과 같이 혼인한 신부가 고향의 부모형제를 그리워함과 같습니다. 과거의 신부들은 결혼이란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에 부모를 잊지 못하고 고향 쪽을 바라보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 마음을 시댁에서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지만 그 도수가 지나치면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신부는 그리워도 몰래 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낯설고 길설고 물설고 설고 선 사람에게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는 나그네에게 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45:10-11에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했습니다. 이 시는 이스라엘 왕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그런데 왕비 중에 열 왕의 딸도 있다는 말은(9절) 애굽 바로 왕의 공주와 같은 왕비입니다. 그러나 이 열 왕의 딸은 결국은 우리 이방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세상을 잊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신부야”(הלכ 칼라) 라는 호칭도 원문에는 단지 ‘신부야’로 되어 있습니다. 지혜의 대왕 솔로몬의 노래 중의 노래에 이렇게 소유격을 뺌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 대목은 아직 신부가 그리워하는 그 마음까지는 데려오지 못한 시점임을 시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신랑 솔로몬의 재치가 본 절에 나타납니다. 즉 신랑은 신부를 위로하고 그 마음까지도 온전히 데려오기 위하여 신부의 고향 레바논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정든 아비 집이 내려다보이고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는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산 정상, 원문에는 이곳을 공원이라고 했는데 이처럼 레바논산은 유명한 관광지였고 이 공원에서 신랑과 함께 내려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랑의 고마운 배려에 신부는 고향을 잊고 신랑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줄거리입니다.
학자들도 대부분 술람미의 고향을 레바논 지방의 수넴으로 추측하고(Lange, James Smith, 박윤선, 강병도, 그랜드종합주석 등), 2장 8절이나 12절 등에도 그녀의 고향이 산중이 시사되어 있습니다. 또 이 구절을 상당수 학자들은 술람미에게 이 전에 살던 산악지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말고 왕도인 예루살렘에 함께 거하자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James Smith, 박윤선, 강병도, 그랜드종합주석, 데오도레트 등). 그래서 “레바논에서부터” 란 “레바논에서 출발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라는 문구에서 이제는 신부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온전히 데려오고자 하는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시73:25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감아도 떠도 세상이 아른거리지 않고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오직 예수만을 소망 삼아야 합니다.
그럼, 어떠한 마음이 강화된 거룩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어야 합니다.
8절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 내려다보아라” 했습니다.
여기 나타난 명칭들은 레바논 산맥의 유명한 세 산으로 ‘아마나’(הנמא 아마나)는 ‘끊임없이 흐름’ ‘영구 불변의’ 뜻으로 아마나 강의 발원지요(왕하5:12), ‘스닐’(רינשׂ 세니르)은 ‘흰 산’이란 뜻으로 눈이 많은 높은 산이며(대상5:23), ‘헤르몬’(ןומרה 헤르몬)은 ‘성별 된’의 뜻을 지닌 레바논 산맥 중에서 해발 2,814m의 가장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은 요단강의 귀중한 수원지이며 이곳의 찬 기류로 인해 발생한 구름은 시온의 여러 산들에 은혜로운 비를 내려 주며(시133:3), 이곳에서 발생한 폭풍으로 갈릴리 바다를 예고 없이 강타하기도 한 두려움의 장소이기도 합니다(마8:24-27, 14:30-32, 막4:39). 그런데 이 높은 산들은 오랫동안 성별된 산으로 여겼습니다(삿3:3, 대상5:23).
신령한 의미에서 이 거룩한 세 산 그러나 한 산맥의 세 산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상징합니다. 구분하자면 물이 흐르는 아마나 산은 성령의 은혜를, 사철 흰 눈으로 덮인 스닐 산은 성부의 사랑을, 이스라엘까지 찾아와 영향을 미치는 헤브론 산은 성자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일단 죄악이 처리되면 신랑 예수님은 신부들에게 특별한 사랑인 천상의 경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관점에서 보게 하사 전에 그토록 미련을 두었던 세속은 그만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산에서 내려다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라 혹은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인간의 온갖 일들은 손꼽 장난보다 보잘 것이 없게 보입니다. 조개보다 작은 그 지붕 아래서 무엇을 염려하고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다투는지 가소롭고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이란 결코 아름답지 않고 하찮고 더러운 배설물처럼 보일 뿐입니다. 도리어 세속은 계시록에 나타나듯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단의 도구로서 악하고 흉측한 괴물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할 때 성도는 적극적인 거룩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거룩은 세상을 나의 원수로 보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는 문구에 나타납니다.
사자 굴과 표범 산은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은 지형의 험난함과 또 사자와 표범의 서식처로 유명한데서(Robinson)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위험한 맹수의 처소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라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는 고도의 시문학적인 표현인데 즉 굴속의 우는 사자는 신부가 아비 집이 그리워 억제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묘사함이요, 빠른 표범 산은 아비 집을 향해 달려가는 신부의 마음을 묘사합니다. 암3:4에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했습니다. 이처럼 신부가 이별할 고향을 마음에 품고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원의 전망대는 망향의 동산처럼 그 곳에 선 신부의 마음을 사자 굴과 표범 산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사자와 표범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양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난 사자처럼 혹은 내 밥으로 알고 덤벼들려는 표범처럼 죄악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죽이고자 하는 원수시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처럼 내려다보아야지 올려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얼마나 세속과 이별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울며 부르짖었습니까? 성경은 육신의 생각과 세상 사랑함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땅히 원수시해야 합니다.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고 대대로 영원히 저주받게 만드는 대상을 원수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단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속에서 자기를 지킬 정도가 아니라 아주 우리의 철천지원수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의분이 충만할 때 비로소 적극적인 거룩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여 기도하므로 거룩함을 이루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 죄를 원수로 아는 신령한 거룩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