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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世居地)이야기 (1)
-순천박씨박팽년,여흥민씨 민신후손사례를 中心으로-
편집자 : 박 성채
세거지(世居地)란 조상 대대로 살아온(거주해온) 땅(지역)을 말합니다.
대대로 살아온 그땅에 누군가 최초로 들어오신 조상이 계시고 그 분은 어떤 사정(사연)이 있어 그 지역에 들어오게 됩니다.
함양박씨 1파(군기소감공파)의 시조이신 지문(之文)할아버지는 고려중기-후기대에 벼슬에서 물러나시고
세거지인 경상(남)도 함양(속함)으로 가지 않으시고, 아내의 집(처가)이 있는 전라(남)도 나주(羅州)로
가십니다. 그런 연유로 오늘날 함양박씨 1파(소감공파)의 대부분은 호남지방을 세거지로 합니다.
또 그 1파소감공의 고손자 되시는 득춘(得春)이란 분은 전라도 나주를 떠나 경상(북)도 예천으로 가셔서 오늘날 경상북도 예천에는 소감공파의 후손들이 계십니다.
이렇듯 조선시대 혹은 우리나라가 산업화,근대화되기 이전 즉 1950년대,60년대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부산등 대도시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주하고, 그 대도시에서 출생한 1960년대,70년대이후 자손들은 아버지,할아버지의 고향이 바로 세거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전라남도 보성이 세거지인데 1941년생이신 아버지가 1960년대초에 보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저와 위로 형2분이 모두 서울에서 나고 자랐고, 다시 광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종친들이 그러하리라 봅니다.
앞으로 시간나는데로 세거지에 관해 글을 쓰려합니다.
아래글을 읽으며, 아버지,할아버지때까지 살아온 세거지에 관심을 갖고, 최초 그 세거지에 들어오신 할아버지는 누구이며, 어떤 사연(사정)으로 입향(入鄕)하게 되었는지, 족보와 어른들의 이야기속의 편린들을 모아서 유추하고 추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글은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선생의 후손이 살아남아 세거지(충북충주)를 이룬 내용을 담은글 과 여흥민씨 민신(閔伸)의 자손들이 어떻게 전라도 해남에 세거(世居:대를 이어 삶)하게 됐는지를 담은 글입니다.
1. 피바람 이겨낸 사육신 핏줄 `순천 박씨'
박팽년 종가…충주 땅 정착해 '명문 잇기' 20대 .
시대적배경 설명: 세종이 돌아가시고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등극했으나, 30대초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니, 문종의 아들인 어린 12살의 단종임금이 등극합니다.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등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을 죽이고 왕권을 잡은 세조는 왕위를 물려주고 이미 상왕(上王)으로 물러난 단종을 강등하여 노산군으로 삼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내고 끝내는 죽입니다.
바로 이런 때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이개등이 중심이 되어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復位)시키려는 거사가 일어나는데, 김질 이라는 자의 밀고로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여기에 가담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사육신중 한분인 박팽년(당시 형조참판)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注푸른하늘 208>
1456년 6월 사육신을 포함한 충신들이 피바람 속에 숨져간지 몇 달이 흐른 뒤인 그해 늦가을, 경북 달성군 사빈면 묘리의 교동현감 댁에서는 두아이가 태어났다. 한 아이는 취금헌 박팽년 대감의 손자였고 또 한 아 이는 그댁 노비의 딸이었다.
핏덩이를 손에 안은 박 대감의 둘째 며느리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만감이 교차 했다. 시할아버지 박중림과 시아버지 박팽년의 5형제, 남편 박순을 포함 한 3형제까지 집안의 남자 9명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시어머 니와 동서 등 집안의 여자들과 다행히 형을 면한 사촌 시숙들은 관노비(官奴婢) 가 돼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3족을 멸하는 잔혹한 형벌 탓이었다.
아버지인 교동현감 이철근의 친정댁으로 관노비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사내아이는 곧 죽음이 예정돼 있 었다. `아이가 사내면 죽이고 계집아이면 관노비로 보내라'는 나라의 서 슬퍼런 엄명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걱정이 태산 같은데 마침 친정댁의 한 노비가 비슷한 시기에 딸을 낳 았다.
며느리는 무릎을 쳤다.` 서로 아이를 바꾸면 이 아이는 죽음을 면하 리라.' 박팽년 대감의 손자는 이렇게 현감댁 노비의 아들 '박비'라는 이 름으로 그 질긴 목숨을 잇게 됐다.
그리고 이 질긴 목숨이 바로 5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박팽년 대감의 원 손을 20대나 이어올 수 있는 단초가 됐다. 지명에서 따서 `묫골 박씨'라 고 하는 순천 박씨 충정공의 후손들에게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실화이다.
충주 시내를 이십리쯤 남겨놓은 충북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도로가에 접해 있는 양옥집들 사이에 가려져 가물거리는 기와 지붕이 바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후손이 전해오는 순천 박씨 충정공파 대종가이다. 동네 사 람에게 물으니 `아, 홍문집'하고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성종 3년(1472), 그 아이가 다 자라 17살이 됐을 때, 나중에 좌의정 을 지내게 되는 이모부 이극균(李克均)이 경상도감사로 이곳을 들러 박팽년의 후 손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울면서 나라에 자수할 것 을 권했습니다.
대종가댁을 지키는 박종덕(63)씨의 `박비 이야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성종은 이때 자수한 아이를 보고 무척 기뻐하며 `일산'이라는 이름 을 지어주고 노비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름자의 뜻이 `유일하게 남 은 옥구슬'이었으니 사육신의 충정은 후대의 임금마저 감동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가는 그렇게 뿌리를 이었지만 그 후 수백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은 불 행한 운명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이 있고 난20년 뒤 대부분이 노비에서 풀렸지만 벼슬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려말, 조선초 쟁쟁한 고관대작을 낳은 이 집안의 후손들도 다수가 하급 관리나 평범한농사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여파가 이어온 탓일까. 박팽년 종가댁은 현대에 와서도 이렇다 할 종답마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옛살림이 궁하다.
참 재산이 없었어요. 제 기억엔 할아버지 때도 그랬어요. 종답이라 고 있는 게 4마지기 남짓이고 기껏 산소가 있는 자그만 야산이 하나 남 아있을 정도였어요. 남들은 수십 마지기 하는데 말이죠.
1973년 종손이었던 형 종진씨가 55세로 타계했을 때 남은 재산은 빚 더미뿐이었다. 둘째 형은 다른 집으로 양자를 갔기 때문에 남은 셋째 종 덕씨에게 종가집을 지킬 의무가 주어졌다.
박종덕씨가 아쉬움을 남긴 채 서울서 사업을 정리하고 이곳에 처음 들 어왔을 때 종가는 낡은 초가집 3채 뿐이었다. 그 초가집 앞으로 나라에 서 내린 홍살문과 후손과 유림들이 만든 사우만이 이 집에 사육신의 후 손들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고 한다.
사육신의 후손이라고 대우가 대단했죠. 헌데 그 체면 치레 하느라 빚 만잔뜩 늘어났어요. 워낙 손님 출입이 잦고 제사도 많다보니까요.
그러나 종덕씨가 이곳에 내려와 지낸 26년간 종가집은 번듯한 모습으 로 다시 자리를 잡았다. 낡은 초가집은 자그마한 2층 양옥집으로 개축됐 고 사우도 중창 공사를 벌여 단청색의 화려한 고가로 되살아났다.
종덕씨는 번듯한 종가를 만들어보겠다며 과수원과 택시회사를 함께 운 영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형이 진 빚은 모두 갚 고 기반을 잡는데도 성공했다. "대낮에 술취해서 돌아다니는 일이 한번 도 없었다"고 할 만큼 그는 박팽년 후손임을 애써 의식하면서 살아왔다 고 한다.
청백리로 꼽히기도 했던 박팽년에 대해 족보에는 다양한 일화들이 전 하고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함께 자랐는데 성격은 서로 달랐다. 삼문 이 농담도 잘하고 방랑하며 담소를 잘하고 앉고 눕는 것이 절도가 없어 서 외면으로 봐서는 허술했으나 내심이 확고했던 반면, 박공은 종일토록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일게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세조 1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임금에게 올린 장 궤에 신(臣)자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비슷한 모양의 거(巨)자를 썼다.' 세조의 녹(祿:봉급,급여)을 먹지 않기 위해 월급으로 나온 곡식을 하나도 쓰지 않고 창고에 보 관했다는 얘기도 원칙에 관한 한 고지식하다 할 만큼 양보하지 않았던 박팽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종손 대리 격인 종덕씨도 그의 19대조 박팽년에 못지 않은 일 화를 갖고 있다.
종손인 형이 아들 없이 작고한 지난 73년의 일. 그는 독자인 완순(30) 씨를 형 앞으로 양자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완순씨가 독자여서 법적 으로 양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7살난 아들의 사망 신고를 낸 뒤 형 앞으로 다시 출생신고를 하는 방법으로 사육신 종가의 후손을 이었다. `어떻게 이은 핏줄인데 대를 끊겠습니까?' 겉으로는 한 없이 유해보이는 종덕씨도 종가를 지키는 데는 이런 모진 면모가 있었다.
종덕씨 부부가 함께 일하는 인근 야산의 과수원 바로 위에는 박팽년의 부인인 천안 전씨(天安全氏)의 묘가 있다. 그의 10대조가 경북 달성의 묫골에서 충북 충주의 터전을 옮겨온 것이 바로 이 묘소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묘소 앞에서 지금도 방영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 대해 물어보았다. `누구나 공유하는 역사니까 뭐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너무 과장도 많고 왜곡도 심해요. 옛날에는 서운해하기도 했는데…. 신숙주 가 과연 그런 사람이었습니까?'겉으로는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섭섭한 표 정이 역력했다.
<푸른하늘 208 注>
한편, 이시기보다 조금 앞서 세조(수양대군)가 고명대신인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주요대신을 살해하고 왕권을 잡는 계기가 된, 계유정난때 피살된 이조판서 민신(閔伸)의 어린 손자(중건)가 집안의 종의 등에 업혀 외숙인 당시 전라도 진도의 군수로 진도군수 김종에게 왔다가 인근의 해남에 정착하였고 오늘날 해남에 세거지를 갖게된 여흥민씨 이조판서 민신의 자손들이 있습니다.
조선 정조때 민신의 후손 민치상이 상소를 올려 민신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충정이라는 시호를 받아,
전라도 해남을 세거지로 한 여흥민씨 충정공파가 되었습니다.
고명대신 : 임금의 임종때 유언으로 부탁을 받은 대신(신하)
2. 충정공 민신의 후예들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전라도 해남(海南)에 정착한 시기는 조선초이다.
계유정란이 일어났던 당시 이조판서였던 민신(閔伸)은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단종계유정란에 연루돼 다섯 아들인 보창, 보해, 보석, 보흥, 석이와 함께 참형을 당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민신의 손자인 중건(仲騫)만이 용케 살아 남아 해남으로 낙남(落南)하게 된다. 즉 당시 집안의 종이었던 사람이 7살 먹은 중건을 항아리에 넣어 지게에 짊어지고 중건의 외숙인 김종 진도군수에게 내려왔다는 것이다.
옛 진도땅이었던 삼산면(당시 삼촌면)에서 자랐다는 중건은 성장하여 초계정씨(草溪鄭氏)와 결혼, 해남읍 으로 분가해온다. 그리고 그의 후손대에 이르러 마산면 양지리(화내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내력으로 인해 해남지역에서 거주하는 민씨들은 입향조인 중건의 조부 민신을 중시조로 삼고 있으며 여흥민씨의 충정공파에 속하고 있다.
현재 충정공 민신의 후손은 해남전역에 7백호가 살고 있고 타지로 나간 사람까지 합하면 2천여호가 족히 넘는다.
또 민신의 후손으로 일제시대에 의병을 일으킨 민병호(일제와의 투쟁 참고)을 비롯하여 21대까지 (희자 돌림까지)이어지고 있고, 주요거주지는 마산면 중앙을 위시로 마산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또 해남읍 해리, 남송, 계곡면 상면, 산이면 송천, 황산면 연호, 원호 등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민신은 정조왕데 이르러 그의 후손인 민치상이 올린 상소문등으로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민신은 그의 아들 보창, 보해, 보석과 함께 미산서원에 배향되어졌고 아들 셋과 함께 서림공원 사층문에도 모셔져 있다. 그의 제사는 음력 10월 10일 마산면 남계리에서 부조묘 제사로 지내고 있다.
여흥민씨는 고려때부터 명문중 명문집안으로 일컬어졌던 만큼 해남에서도 여흥민씨의 세도는 꽤 컸다.
특히 정조때에 이르러 계유정란의 희생자였던 민신에게 충정공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면서 여흥민씨의 세도도 이지역에서 더욱 높아졌다. 때문에 매일아침 아침재를 넘어 아침문안인사를 해야하는 등 해남으로 내려온 현감들이 시달렸던 얘기며,
지역세도를 꺾기 위해 우슬재와 아침재를 석자 세치씩 깎아내렸다는 얘기등 지역토착세력중 하나이기도 했던 여흥민씨의 세도를 짐작케하는 얘기들은 많이 전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마산지역에서는 원주 이씨, 무안박씨와 함께 여흥민씨는 중심적인 성씨로 자리잡고 있고 얼마전까지만해도 이 세 성씨의 텃새가 마산지역에서 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흥민씨와 얽힌 재미있는 설화도 전한다.
산이면 상공리에 백로와 새우형국을 한 바위가 서 있었는데 그 바위 바로 �쪽에 여흥민씨 선산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서구가 해남군수로 재직시(1782년 2월-1783년 6월)여흥민씨의 세도가 높아 일하는데 불편함을 느껴 백로새우 바위를 파괴시켜 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렇게 위새가 당당하던 여흥민씨 백자 돌림들이 한해에 여럿이 죽은 일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또 명문거족답게 여흥민씨와 관련된 초당이 많이 존재했음을 사료등에 나타나고 있다. 귤주공 시가 쓰여있었다는 남곽초당(해남읍 용정리), 해리에 있었다는 삼해정, 동백정, 금강골 부근에 터만 남아있는 금강초당 등이다. 또 민씨 집안에서는 아직까직도 집안에 사당을 모셔놓고 고조부 까지를 모시고 있는 집도 있다. 해남읍 백아리에 거주하는 민정기씨댁과 해남읍 해리 민두삼씨댁이 그 장본인.
한편 여흥민씨 충정공하는 학자들을 두루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민선식씨와 남식, 지식 3형제가 모두 이학박사이고, 그의 조카 다석이 모두 박사학위를 수여할 정도. 또 서울대 사학과 교수인 민두기(閔斗基), 민영규(연대교수 역임), 민방기(전남대법대 학장역임)씨등 이외에도 여흥민씨 충정공파는 많은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해남 신문에서-
이렇듯 세거지의 유래는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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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다음이 기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