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그릇으로 명상하다
/ 법정 스님
뜰에 찬 그늘이 내릴 무렵,
책꽂이에서 오랜만에 시집을 꺼내 들었다.
가을날 오후 두런두런 시를 읽고 있으면 산방이 한결 그윽해진다.
당나라 시인 백락천이
<향로봉 아래 새로 초당을 지어 낙성한 날
우연히 동쪽 벽에 적다>라고 이름 붙인 시다.
해는 높이 떠 잠도 충분한데
일어나기 귀찮고
작은 오두막이지만 이불 겹쳐 덮으니
추위 걱정 없다.
유애사에서 들리는 종소리
베개 괴어 듣고
향로봉에 내린 눈
주렴 걷고 바라본다.
이 여산은 속세의 명리 피해
살 만한 곳
사마 벼슬 노후를 보내기 족하다.
마음과 몸 편안하면
돌아가 의지할 곳이니
고향이 어찌 장안뿐이겠는가.
-김원중 역-
백락천은 <장한가(長恨歌)>나 <비파행(琵琶行)> 등
초기 현실 비판과 풍자 등 사회성을 띈 시와는 달리,
말년에 이르면 자연에 귀의하여
한적한 삶을 노래한 시를 많이 지었다.
‘사마 벼슬’의 ‘사마(司馬)’란
좌천 된 지방관으로 실질적인 업무는 없고
한직이라 그 고장 자연을 한가히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같은 제목으로 남긴 시가 또 있다.
삼간 초당을 새로 지었으니
돌층계 계수나무 기둥에 대로 엮은 울타리
남쪽 처마는 햇빛 받아 겨울에도 따뜻하고
북쪽 문은 바람 맞이해 여름에도 시원하다.
샘물은 섬돌에 떨어져 물방울 튀기고
창에는 대나무 그림자 어지러이 흔들린다.
내년 봄 되면 동쪽채 지붕마저 이어
도배하고 발 드리워 아내를 있게 하리.
옛사람들은 이와 같이 자신의 분수를 알아
조그만 오두막일지라도 그 안에서 즐겁게 살 줄 알았다.
요즘의 수십 억짜리 저택에서 사는 사람들로서는
감히 넘어다 볼 수 없는
맑고 향기로운 삶의 운치를 누리면서 살았다.
그저 많고 큰 것만을 선호하는 현대인들은
그들이 차지한 것만큼 행복하지도 않고 또한 누릴 줄도 모른다.
아직도 곳곳에 ‘최고’와 ‘최대‘의 허세에 가치를 두는
촌스런 생각들이 있다.
어떤 것이 진정으로 최고이며 최대인지 모르고 있다.
그 조형물이 있을 자리에 있을 때,
둘레의 사물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거기에 새로운 숨결이 이어진다.
공간의 비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룰 때 아름다운 창조가 된다.
월간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지난 8월호에 실린
<해인사 싸리비>라는 시가
최고와 최대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본 싸리비
가을이 오면 이 싸리비가 낙엽들을
솨악 솨악 모으겠지
내 마음에도 커다란 싸리비 하나 만들어
잡다한 생각 나부랭이들
허튼 욕심, 바보 같은 버릇
솨악 솨악 쓸어버리고 싶다
나는 해인사에 세우겠다는
세계 최대의 청동불상보다
한 구석에 쌓아 놓은 싸리비에게나
절을 올리련다
불상이 크면 뭐 하나
차라리 큰 싸리비 하나 만들어
세상의 때를
솨악 솨악 비질이나 하지
그게 부처님 마음이 아닐까?
-손인호
<해인사 싸리비>를 쓴 시인은
진정한 귀의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부처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두고두고 읽힐 좋은 시다.
물은 가을 물이 맑다.
사계절 중에서 가장 맑다.
개울가에 물을 길러 나갔다가
맑게 흐르는 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이 개울물에서 세월을 읽는다.
가을 물이 맑다고 했는데 사람은 어느 때 가장 맑을까?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을에 귀가 밝다.
이 말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가을바람에 감성의 줄이 팽팽해져서
창밖의 곤충이 기어가는 소리까지도 다 잡힌다.
다람쥐가 겨우살이 준비를 하느라고
상수리나무에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오관이 온통 귀가 된다.
대상과 하나 될 때 사람은 맑아진다.
너와 나의 간격이 사라져 하나가 될 때 사람은 투명해진다.
이 가을 들어 나는 빈 그릇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서쪽 창문아래 조그만 항아리와 과반을 두고
벽에 기대서 이만치서 바라본다.
항아리는 언젠가 보원요 지헌님한테서 얻어 온 것인데,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낸 그릇이라 그 연한 갈색이 아주 천연스럽다.
창호에 비껴드는 햇살에 따라 빛의 변화가 있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며칠 전에 항아리에 들꽃을 꽂아 보았더니
항아리가 싫어하는 내색을 보였다.
빈 항아리라야 무한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백자로 된 과반은 팔모 받침에 네모 판으로 된 것인데
가로 한자 두 치, 세로 한 자의 크기.
과반치고는 크다.
이 역시 빈 채로 더 듬직하고 아름답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 것도 오려 있지 않은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는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엇을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다
빈 그릇에서 배운다.
《홀로사는 즐거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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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를 읽으며 여유로움 함께 누립니다..항아리 모습이 정겹게 느껴지지요. 누군가 버린 항아리 주어다가 꽃 꽂았지요..날이 더워지고 있습니다. 건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허당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_()_
_()_
眞空妙有라
허. 거기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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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