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문에 들어서면 재실 숭모재와 무열사가 자리하고 있다.(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2014년 3월14일 금요일.
서흥김문 경기파 세거지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를 찾아나섰다.
대종회 창립 20주년 특집대담을 위해 먼저 서흥문중의 맏집 기환基煥 종손宗孫을 만나야 했다. 병국炳國 사무총장과 앨범책자 사진촬영을 위해 윤호潤浩 종원도 함께 나섰다. 남안성IC로 나와 시내쪽으로 가다보면 죄측에 현대식 축산농협 건물이 보인다. 안성축협에서 신용(금융) 업무를 책임 맡은 기환 종손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종손은 1986년도에 안성축산농협에 입사하여 30년 가까이 몸담고 계신 안성축협의 산증인이다.
젊은시절 나에게 안성은 남사당패놀이의 중심지 정도로 생각했었다. 사실 지금도 안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3년 전 여름 무열사와 판서공 설단, 서흥김씨삼강정문을 찾았을 때 당시 「자치안성신문」에 고삼면 월향리의 서흥김씨 집성촌을 소개하는 기사가 눈에 띄어 갈증에 물을 마시듯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안성시의 근 20만명 인구 중에 고삼면은 2000명을 조금 넘는다고 했다. 면적도 안성시 전체의 5%에 불과하지만, 뿌리깊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상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고장이라고 지역신문은 전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77호 서흥김씨삼강정려각(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고삼면 월향리의 서흥김씨 삼강정문(瑞興金氏三綱旌門 경기도기념물 제77호)은 안성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서흥김씨 집성촌을 취재한 기자는 이곳 월향리가 적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충절忠節과 효절孝節, 정절貞節 등 이른바 절의節義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설명도 달았다.
선조 임진년에 왜군들이 쳐들어오자 창죽헌蒼竹軒 김충수金忠守공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적과 싸워 백여 명이나 무찔렀다. 그러나 무장한 왜적에 밀려 잡힌 몸이 되자 함께 분전하던 아들 함涵이 부군을 구출하려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부자가 적과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뿐만아니라 효성이 지극했던 며느리 두 분의 정렬貞烈까지 더하게 되니 나라에서 충효정렬忠孝貞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흥김씨삼강정문정문을 세워 안성의 유서깊은 유적지로 보존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 개편시 고삼면은 고동면과 고북면, 고서면이 합쳐져 생긴 이름이다
달의 향기가 묻어나는 동네 월향리月香里,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언제 입향했느지 기록은 찾지못하고 있다. 다만 보감寶鑑에는 효인(孝仁 1450-?) 숙부인 묘소와 큰 아들 석규(碩珪 10世 1473-? ) 묘소가 안성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체로 조선 성종(재위기간 1469-1494)대 초기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열사武烈祠의 창건연대 또한 고증문헌이 없어 그 연혁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초 황해도 서흥瑞興의 봉지封地에 있던 것을 후손들이 사손嗣孫의 세거지인 응봉산鷹峰山기슭 양지바른 곳에 사당祠堂을 지어 서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향을 올려오다 2011년(辛卯)부터 시조님 보공寶公, 2세조 덕인공德仁公, 3세조 서흥군瑞興君 천록공天祿公 세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모시고 있다.
▲자치안성신문(2011.9.25)에 보도된 서흥김씨판서공설단비제막식(1973.8.26)
인터넷 「자치안성신문」에는 문중의 역사가 될 만한 사진도 실려있다. 1973년 8월26일 경기파의 중조中祖이신 예조판서 중건中乾(7世 호 인재仁齋) 조상의 설단비設壇碑를 건수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비문碑文을 찾아 임창순任昌淳옹의 글 일부를 옮겨본다.
『...오늘날 사회풍조가 퇴패하여 선조를 숭앙하는 미풍양속이 무너져 가는 이때 오히려 몇 백년 전 공의 체백體魄이 안장安葬된 곳을 잃어버린 것을 애달프게 여겨 다시 향화香火를 올릴 곳을 마련함은 공의 유덕을 빛내며 오는 세대에 교훈을 드리우는 성사盛事이다. 또한 옛 성인도 신종추원민덕귀후愼終追遠民德歸厚 곧 부모의 장사에 효성을 다하고 선대의 제사에 정성을 바치면 민심이 후해진다 하였으니 서흥김씨일문瑞興金氏一門의 선대를 위한 정성은 사회도의양양에 크게 의의가 있을 것이다....』
▲고삼저수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고삼면은 당시 중공군과 최대 격전지가 되었다.
월향리는 이 때 마을 전체가 불에 타는 참화를 겪었다. 그 후 월향리는 또한번의 큰 격랑을 맞게 된다.
1956년에 착공되어 1963년에 완공된 고삼저수지가 바로 그것이다. 농사짓던 대부분의 농토가 수몰되자 많은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삼저수지는 이제 안성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저수지의 물이 들어찬 곳에는 면사무소와 고삼초등학교가 들어선 마을의 중심이었다. 500여년 전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의 집성촌과 내려은 주거 형체가 한국전쟁과 저수지 준공으로 인해 흔적마저 없어져버린 셈이다. 서흥김씨삼강정문 또한 이 지역이 수몰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으니 선조님들의 기상과 기백이 아직 물밑에서 헤쳐 나오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인 일인가...?
안성은 농업도시의 느낌을 준다. 고삼면은 우리나라 최초의 친환경 유기농업이 태동한 곳이라고 신문은 전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준비하여 1995년 친환경농업을 시작했고, 1997년에는 전국최초로 친환경 농업단지를 조성하여 농가소득을 증대하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최근 고삼면에서는 기환 종손이 몸담고 있는 고삼농협을 중심으로 로하스[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사업을 도입해 추진하고 있다. 즉 1차 산업인 농업을 2차 산업으로 전환시키기는 사업방식이다. 축산물을 가공해 2차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고삼면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생명곳간의 도시로 진화하고 있다.
▲서흥군신도비瑞興君神道碑(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무열사를 찾을 때는 입구에 세워진 서흥군 신도비명의 글도 꼭 읽어봐야 한다.
법학박사 강주진姜周鎭씨가 지은 비문을 일부 옮겨본다.
『명문거족名門巨族 서흥김씨는 고려조高麗朝의 명장名將 김천록金天祿 장군이 훈공을 세워 서흥군瑞興君에 봉작封爵됨으로써 시관始貫되었다.(중략) 공의 묘소가 누차의 전화로 실전되었으며 문헌 또한 증빙할 길이 없어 애달프게만 여기어 오다가 이제 안성군 고삼면에 길지吉地를 택하니 앞에는 만경평호萬頃平湖가 그림처럼 펼쳐있고 뒤에는 경승지景勝地로 이름 높은 응봉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무열사武烈祠와 숭모재崇慕齋를 창건하여 위패와 영정을 모시었고 지척에 판서공 설단과 삼강정려각이 우뚝 솟아있다.(중략) 근래 숭조정신이 쇠미해지는 작금에 사손嗣孫 택수보澤洙甫와 문경공 종손[文敬公 宗孫] 병의보秉義甫의 발의로 인득보仁得甫가 거금을 연출하여 서흥군신도비瑞興君神道碑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장거壯擧라 아니할 수 없으며 전통윤리를 바로잡는데 지주지공砥柱之功 될 것이다.』
▲사당안에는 시조님을 위시하여 세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시조님 보寶공과 2세조 덕인德仁공, 3세조 서흥군瑞興君 천록天祿공 세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무열사, 판서공 중건中乾(7世 호 인재仁齋) 설단비, 삼강三綱을 빛낸 선조님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서흥김씨삼강정문이 자리한 곳, 이곳이 바로 서흥문중의 맏집 세손들의 세거지인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다. 무열사가 있는 고삼면을 중심으로 월향리와 가유리, 그리고 양성면 염치 등 일대에서 약 50가구 200여명이 살고 있다고 보감(99년 발간)은 전하고 있으나 기환 종손에 물으니 지금은 채 20가구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기환 종손과 함께 무열사를 찾으니
월동마을 이장을 지낸 의환義煥 안성종친회장께서
오이 밭을 일구던 손을 멈추고 이곳으로 달려와 환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안내해주셨다.
『아픔과 질곡을 딛고 도약할 가능성이 풍부한 고삼면』이라는 지역신문의 제목처럼
월향리에 거주하는 집성촌의 세손世孫들이여,
비록 고될지라도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월향리의 둥근 달처럼
밝고 환하게 펴질 날이 분명 올 것이라 굳게 믿으소서...
▲매년 음력10월 첫 일요일 무열사대제를 모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