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7(화) 흥인지문구간
장충체육관-천주교신당동교회-백구컴퓨터크리닝-광희문-동대문역사관-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이간수문-오간수문-흥인지문
13:19 ▲ 장충체육관 후문 ▲
연계하여 흥인지문구간으로 가기위해서는 장충체육관-동대입구역을 가지말고 동호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동호로20길로 진입하면 된다.
00:00 ▲ 위 지도 버스정류장(①~②) 옆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
13:35 ▲ 동호로 횡단보도 ▲
13:35 ▲ 동호로20길 입구(장충동) ▲
13:36 ▲ 장충동 주택가(동호로20길) ▲
13:36 ▲ 천주교신당동성당 ▲
13:38 ▲ 장충동 주택가(동호로20길) ▲
장충동 주택지역
광희문 성벽을 따라 장충동 주택가로 들어서면 한양도성은 다시 자취를 감춘다. 1930년대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일대에 문화주택 단지를 조성하면서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을 훼손했으며, 해방 후 1960~70년대에 신축된 주택들도 성벽을 파괴하였다. 현재 성돌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로 사용되고 있다
13:38 ▲ 사거리에서 광희문 방향 ▲
00:00 ▲ 백구컴퓨터클리닝 위치에서 도성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냥 직진하고 말았다. ▲
13:45 ▲ 현위치..광희문 가까이 왔다. ▲
13:45 ▲ 남아있는 도성 성곽..광희문이 보인다. ▲
13:45 ▲ 청구로 옆 인도를 걸어 광희문으로.. ▲
00:00 ▲ 옛 사진 자료. ▲
13:46 ▲ 광희문 ▲
13:46 ▲ 광희문 ▲
광희문(光熙門)
한양도성의 동남쪽에 있는 문이다.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리웠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년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떨어진 현 위치에 중건하였다.
* 광희문 바깥의 마을, 신당동의 유래 :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던 시구문이다. 일반 백성들도 출입하기를 꺼리는 문이었으나 왕의 신분으로 이 문을 이용한 왕이 있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가 예상보다 빨리 도성에 접근하자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문 밖은 노제 장소였기 때문에 무당집들이 많아 신당리(神堂里)로 불렸는데, 갑오개혁 이후 신당리(新堂里)로 바뀌었다
13:47 ▲ 광희문 ▲
13:47 ▲ 광희문 ▲
13:47 ▲ 광희문 ▲
13:48 ▲ 광희문(대문천정그림) ▲
13:48 ▲ 광희문 출발 ▲
13:48 ▲ 광희문 출발 ▲
13:51 ▲ 한양공고앞 교차로 ▲
13:52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2번 출구 ▲
여기에서 우측 방향으로 꺾어들어 한양공고 뒷길로 가야함에도 1번출구방향으로 그냥 직진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잘못 진행한 도성순성길 보기...옛동대문운동장 터로 가야함
00:00 자료사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옛 동대문운동장 터)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조성된 공원이다. 조선 후기 이곳에는 훈련도감의 별영인 하도감과 화약 제조 관서인 염초청이 있었다. 1925년 일제는 일본 왕세자 결혼 기념으로 이곳에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성벽을 이용하여 관중석을 만들었다. 경성운동장은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개칭되었다가 ‘88올림픽(제24회 서울올림픽)’ 이후 다시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근현대 한국 스포츠의 중심지였던 이 운동장이 헐린 것은 2007년이다. 당시 철거 과정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의 일부와 이간수문(남산에서 발원한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두 칸짜리 수문), 치성(雉城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 하도감으로 추정되는 건물 유구 등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이간수문은 원 자리에 있으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에 있던 건물 유구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이 자리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13:53 ▲ 삼거리 횡단보도 건너 직진 ▲
13:55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
13:55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번 출구에서 우측으로.. ▲
13:57 ▲ 동대문디자인플라자..사람들이 몰려있다. ▲
13:57 ▲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 건물 뒷쪽이 순성길이다 ▲
14:03 ▲ 청계6가 교차로 ▲
14:03 ▲ 청계천 ▲
00:00 이간수문과 오간수문(자료사진)
00:00 자료사진..복원된 .이간수문
00:00 발견된 당시 이간수문
00:00 자료사진..복원된 .이간수문
오간수문 터와 이간수문
<사적 제461호(오간수문 터)>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이 부근은 서울에서 가장 지대가 낮아서 내사산에서 내려온 물이 모두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성벽이 청계천을 만나는 위치에는 수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동대문운동장 관중석 밑에 매몰되어 있다가 발굴된 이간수문은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오간수문은 추정 재현되어 있다. 다만 오간수문이 있던 자리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14:04 ▲ 동대문 신평화시장 ▲
14:04 ▲ 동대문 신발종합상가 ▲
14:04 ▲ 동대문 평화시장 ▲
동대문시장
1905년에 우리나라 최초 민영(民營) 도시 상설시장으로 개장한 광장시장에서 기원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 일대의 상권은 광장시장을 기점으로 계속 동쪽으로 확장되어 현재는 청계천 물길을 따라 광장시장 · 방산시장 · 동대문종합시장 · 평화시장 등이 늘어서 있다. 이 거대한 시장 지역은 세계적인 의류, 패션산업의 중심지이다. 인근의 국립의료원 자리에는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키릴문자 간판이 즐비한 중앙 아시아 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러시아 · 우즈베키스탄 · 몽골 ·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조성된 거리이다.
00:00 오간수문의 옛모습
00:00 자료사진...오간수문터
00:00 자료사진...오간수문터
14:05 ▲ 흥인지문이 보인다. ▲
14:06 ▲ 흥인지문 ▲
14:06 ▲ 흥인지문 ▲
14:07 ▲ 흥인지문 ▲
흥인지문(興仁之門)
<보물 제1호> 한양도성의 동대문이다. 현재의 흥인지문은 고종 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는 동대문이 가장 취약하였다. 동대문 바깥쪽으로 옹성을 하나 더 쌓은 것은 이 때문이다. 1907년 좌우 성벽이 헐려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00:00 ▲ 흥인지문의 참고 자료사진 모음 ▲
00:00 ▲ 흥인지문구간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