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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안셀름,Anselmus,1033아오스타~1109.4.21,이탈리아)
(1) 안셀무스(안셀름)의 생애
안셀무스는 안셀름이라고도 하며, 1033년, 부르고뉴왕국의 아오스타(현,이탈리아 피에몬테주)에서 귀족 가문인
아버지 곤돌포(Gondulfo)와 어머니 에르멘베르가(Ermenberga)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안셀무스의 아버지 곤돌포는 롬바르디아의
귀족이었으며, 어머니 에르멘베르가는 유명한 부르고뉴 가문 출신으로 상류층에 속하였습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으로 부모님들은 안셀무스가 정치가로서
성장해 가기를 원했지만 안셀무스는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를 희망했습니다
1057년, 베크(프랑스 노르망디지방)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가는 도중 그가 존경하였던 랜프랭크 수도원 부원장이
로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리옹, 클뤼니, 아브랑슈에서 시간을 보낸 안셀무스는 1060년 베네딕트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1061년 안셀무스는
수사가 되었고 1063년 그의 스승인 랜프랭크가 캉의 대수도원장으로 승진하자 그의 후임으로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훌륭한 고전교육을 받고 당대의 우수한 라틴어 학자로 평가 받았으며 수도원에서 높은 지적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많은 존경심을
받았습니다
1077년, "독백론"(Monologium)을 기록하고 이듬해인 1078년, 베크의 대수도원장이 되었습니다
독백론은 변증론적 기독교의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신의 현존과 속성을 초기 중세 사상가들처럼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이성에 의존하여 논증하려
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정의, 지혜, 능력과 같은 완전함의 측면들이 불균형하다는 점을 분석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절대규범이 있고 인간정신이 절대규범을 이해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안셀무스가 대수도원장으로 있는 베크는 수사들의 신학탐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신의 본성과 현존에 관한
질문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안셀무스가 쓴
"대어록"(對語錄,Proslogium, 원제,지성을 찾는 신앙 Fides quaerens intellectum)은 신의 현존에 관한 존재론적 논증을 확립하였습니다 마르무티에의 고닐로가
쓴 "신은 없다고 말하는 바보들을 위한 변명"(Liber pro insipiente)에 도전을 받은 안셀무스는 "고닐로에 대한
반박서"(Liber apologeticus contra Gaunilonem)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대어록"의 존재론적 논증을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1066년, 잉글랜드 정복왕 윌리엄은 베크 수도원의 후원자로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토지를 수도원에 기증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체스터에 수도분원을 설립하였고 1093년 3월, 윌리엄왕의 태자 윌리엄2세 루퍼스는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윌리엄왕이 몰수한 캔터베리의 주교 토지를 반환하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대신 우르바누스 2세를
적법한 교황으로 인정하자 잉글랜드교회 개혁을 위해 1093년 12월4일 캔터베리 대주교에 부임하였습니다
윌리엄왕은 안셀무스 대주교에게 성직임명 명목으로 금품수수를 요구했고 안셀무스는 이것을
성직매매행위로 규정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윌리엄은 우르바누스 2세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성직자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는가
왕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로 2년간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095년 3월11일, 로킹엄교회회의결과로 인하여 교황의 사절이 로마에서 팔리움을
가지고 왔을때 안셀무스는 윌리엄 2세로 부터 성직임명을 받는 것을 거부하고 로마로 되돌아갔습니다
1098년,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바리 공의회에서 필리오케(Filioque,'그리고 성자[聖子]로부터')에 관한 교리조항을 옹호하는 등 공의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099년, 안셀무스는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를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구원보속론에 관한
고전적 연구서가 되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스콜라철학의 창시자로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셀무스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인간의 이성과 철학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로마카톨릭의 "원죄없는 동정녀 마리아"를
교리화하는데 일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109년 4월21일, 세속적인 왕의 성직임명과 성직간섭을 거부하였던 안셀무스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며 그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2)
속죄론(贖罪論,The Doctrine of the Atonement in
Anselm)
안셀무스는 보속에 관한 속죄교리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일관성있는 논리로 설명한 최초의
신학자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속죄론에 대한 명확한 해결없이 죄와 구원에 관한 신앙인들의 고민과 과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099년, 안셀무스는 잉글랜드를 떠나 로마로 가며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를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구원보속론에 관한 고전적 중세신학의 대표적인 연구서가 되었습니다
유한성과 한계성을 가진 인간은 무한성과 영원성을 가진 하나님께 죄를 짓고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지위에 따라 보상과 보속을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왕에 대한 죄는 귀족과 농노에 대한 죄보다 훨씬
더 많은 보속이 필요했슴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피해자 한사람의 목숨보다 더 큰 것을 내 놓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규범에 따라 유한성을 가진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께 대한 보속은 그 방법적 측면에서 해결방안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원한 죽음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자비에 의해 인간은 공동체적 재창조 행위속에서 정화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죄의 정화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안셀무스는 인간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악마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고전적 견해를
반박하고 구원의 본질을 성찬식(聖餐式)과 그리스도와의 개별적이고 개인적으로 화평하는데서 발견하였습니다 세례는 성찬식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개개인은 교회와 일치가 되고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범죄하였고 영광을 위한 존재로서의 가치는 상실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중요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어 속죄의 죽음을 통하여 보상을 받으시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하신 일들에 대하여 신앙하여야만 보속의 길이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신앙하지 않거나 부인하는 인간에게는 그가 왕이든, 귀족이든, 로마카톨릭의 주교라 할지라도 구원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