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초안
[502호] 1987년 10월 26일 (월) 원불교신문
“죽을 몸이면 대종사님 법문 정리나 하자”
사람은 누구나 사심과 사욕이 없을 때 누구라도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다.
나는 매일 산에서 약초를 캐며 기도하며 생활하는데 언듯 한남동에 있을 때의 일들이 떠올랐다.
팔타원님께서 보화원을 하실때였다.
어느날 갑자기 맥아더 사령부 고문으로 있는 신부가 한국에 오면서
사회사업단체로 가볼만한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한남동보화원이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 신부는 예고도 없이 한남동을 들어섰다.
낯선 사람의 출현에 보화원 아이들은 한결같이 보모들과 나의 품에 달려 들었다.
이 신부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는 아무말도 묻지 않고
『진짜 보육원이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볼데가 없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부에 각서 보고를 하고 각 신문에 보도를 하였다.
보화원 아이들이 보모나 내게 안긴것은 평소 한 가족 친부모처럼 다랐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에서 그 신부는 진한 인간애를 본 것 같았다.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단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에
시설의 미비한 점등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에는 관심두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온갖 살아가는 일들이 교차되면서 나는 산에 오르내리며 병마와 싸우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폐결핵의 재발이었다.
나는 약물치료 보다도 맑은 공기 마시며 정신력으로 버티어 나갔다.
모악산과 제비산 구성산등 원평 주변산들을 규칙적으로 다니며 약뿌리를 캤다.
때로 나는 인연 닿는 곳에서 감도 다주고 소제도 해주며 바쁜 농촌의 일손을 돕기도 했다.
이곳 원평은 강증산교의 각파들이 골짜기마다 간판을 붙이고 기도하며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오가며 이분들과도 대화하게 되었고 친숙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어느날 문병 온 중산이 나를 보고 『여기서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중산을 떠나 보내고 바로 「채약송」을 쓰기 시작했다.
有人이 來問母岳山中之事어늘
此問消息을 莫問不見하라
晝遊千山萬水中하고 夜夢三昧大寂光이로다
老松은 曲曲獨守靑하고 恢石은 凡凡聽水聲이로다
又云時有涵養虛空法界之正氣하고
呑下山下大地之精靈하고
不知老之將至하니
羅漢之神眼으로도 不能窺知나
然이나 余汝로 相知오 不可使人知니라.
원기 34년 4얼부터 이렇게 시작된 나의 투병생활은
어쩌면 나에게 또 다른 일을 맡기려 하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늦가을이 되면서부터는 밤낮 없이 신기한 생각들이 쏟아졌다.
때로 글을 쓰려면 어느 대 문장가 못지않을 만큼 많은 시를 슬수도 있을 것 같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이때 대종사님께서 허령이 열릴때를 조심해야 된다고 하신 말씀을 생각했다.
대종사님께서는 허령이 열리게 되면 저 자신 하니만 그르치고 말면 괜찮으나
남의 일생을 그릇칠까 무섭다고 경계해 주셨다.
삼학이 병진되어야 하는데 한편에 치우치면 대원정각의 길이 막히므로 미리 경계해 주셨던 것이다.
대종사님의 이 말씀이 떠오르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기운이 솟아났고 대종사님의 법문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의사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을 때 죽음을 각오하게 되었지만
대종사님 법문정리 하지 못할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대종사님 당시 기록을 하려고 했지만 대종사님께서 극구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후일 네 머리에서 나올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항상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기도와 채약을 하면서 이왕 죽을 몸이라면 대종사님 법문이나 정리하고 죽자는 결심이 었다.
내가 기도를 시작하면 법신불께 올렸던 기원내용은 나이를 더해 가면서 달라졌다.
30세부터 5년동안 진리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기도문이었고
40세부터 5년동안 진리의 큰 힘을 주시라고 하면서 그 가운데
41세때는 전출가 동지들을 위해서였고
42세때에는 전재가 교도를 위해서
43세때는 전국민을 위해서
44세때는 전인류를 위해
45세때는 전생령을 위해
46세때는 유주무주 고혼들을 위해서였으며
47세때는 교단과 국가 세계의 급선무를 찾아 법신불게 기원을 올리며 위력을 빌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내가 해온 공부의 순서도 연령 따라서 달라졌던 것이다.
10대 때의 나는 대서원을 포준하고 했으며
20대와 30대에 걸쳐서는 상당한 고전기였다.
법과 마의 싸움이 있었던 시기라고 볼수 있다.
또 30대와 40대에 걸쳐서는 독공하던 때도 정진하면서 허령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50대에는 지각이 열리면서 모든 것에 전일할 수 있었으며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엇다.
60대에 들어서는 합장하며 다시 준비하는 표준으로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지난날을 되돌아 볼 때
서른 여섯에서부터 2년동안의 원평요양 시절이 허령이 뜨는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대종사님 법문 정리에 총력을 기울이며
정산 종사님께서 수록의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여쭈었다.
처음에는 「회보」에 기재되었던 법문처럼 하려고 했는데
「논어」식으로 하자고 하시어 그렇게 정리를 해 나갔다.
이 법문 정리가 대종경 초안이었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내가 원평에서 이 일을 한동안 『자네가 여기서 힘을 얻었네』라고 격려해 주셨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더욱 정진했다.
그러는 동안에 병고도 잊게 되었다.
나는 한생 흩어진 정신을 모아 깨끗이 이 세상을 떠나니라고 했는데
성현의 남기신 일들을 정리하다 보니까 건강도 회복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