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折戟沈沙鐵未銷(절극심사철미소) 부러진 창이 모래에 묻혔으나 철은 아직 녹슬지 않았는데, 自將磨洗認前朝(자장마세임전조) 내가 그것을 갈고 닦아보니 전대의 역사를 알겠구나. 東風不興周郞便(동풍불여주랑편) 동풍이 주랑을 편들지 않았다면, 銅雀春深銷二喬(동작춘심쇄이교) 동작대 봄 깊은데 이교가 갇혔겠지. |
▶ 배풍대(무후궁)
▶ 무후궁내 공명 입상
▶ 공명과 적벽대전 관련 석화
삼국조소원를 뒤로 하고 언덕을 오르면 남병산(南屛山)이 나온다. 이곳은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동남풍을 부르는 제를 지내던 곳으로 1610년에 지은 동풍각(東風閣)과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 배풍대(湃風臺)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풍대 현판 아래 무후궁(武侯宮)이라는 현판이 별도로 걸려 있다. 배풍대 안에는 학우선을 든 제갈량의 입상 조형물과 적벽대전과 제갈량이 관련된 삽화를 석판에 그려 전시하고 있다.
삼국지에는 황개의 고육지계(苦肉之策)와 방통의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이용한 화공으로 조조군을 무찌를 계책을 마친 주유는 북서풍의 계절에 화공을 쓸 경우 불화살이 조조의 진영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칫 조조군의 불화살 공격에 우군이 위기에 처할 수 있어 고민에 빠지고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된다. 노숙이 주유를 찾아갔다 자리에 몸져 누운 주유를 보고 촉·오동맹을 위해 이곳에 와 있던 공명에게 주유의 병을 이야기하고 공명은 주유의 병을 고쳐준다는 구실로 주유에게 문병을 가 시 한 수를 읊자 속을 간파 당한 주유가 공명에게 동풍이 불 수 있는 방법을 구한다. 이에 제갈량은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아주면 동짓달 스무날 갑자 일부터 세 밤 세 낮 동안 거센 동남풍을 불게 하겠다고 화답을 한다.
欲破曹公(욕파조공) 조조를 깨뜨리려면 宣用火攻(선용화공) 마땅히 화공을 써야 하리 萬事俱備(만사구비) 모든 걸 갖추었으되 兄缺東風(형결동풍) 다만 동풍이 없구나 |
주유와 제갈량은 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다. 주유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요절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설은 의미가 없겠지만 주유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삼국의 운명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주유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이미 주랑(周郞)을 낳았거든 공명(孔明)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라며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숨을 거둔다.
▶ 망강정
▶ 주유 석상
남병산을 내려와 우측 남병산을 따라 5분 남짓 걸으면 망강정(望江亭)이 보이고 길을 따라 좀 더 가면 광장 한 가운데 주유 석상이 보인다. 갑옷과 망토를 입고 투구를 쓴 주유가 칼을 빼 망토 뒤로 숨기고 있는데 머리는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망토도 오른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으니,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의미로 이렇게 조각했다고 한다.
▶ 적벽대
주유 석상을 뒤로 하고 100여 계단을 내려가면 드디어 적벽(赤壁)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절벽이 있는데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규모가 웅장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실망스럽다. 우리나라 강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절벽 정도로 대략 40여m의 벼랑에다 붉은 글씨의 '赤壁'만 덩그러니 쓰여 있다. 이 글씨는 승리한 주유가 호승심에 칼로 새겼다고 전해지지만, 전문가들은 1000년 전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그 위에는 롼(銮)’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라기보다는 도교(道敎)의 문양으로 창장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새겨 넣었다고 한다. 적벽대전 당시 이곳은 창장 중 강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수군이 배를 정박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적벽이라는 글자 아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배들이 정박하기 쉽게 막대기를 꽂던 곳이라고 한다.
▶ 적벽대에서 바라본 창장
▶ 적벽대전 진열관
▶ 적벽대전 진열관 내 파노라마
적벽대를 뒤로하고 주유 석상 앞을 지나 적벽산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지붕이 주유의 투구모양을 한 적벽대전 진열관이 나온다. 투구 모양의 둥근 원형 지붕은 스크린으로 당시 상황을 3차원 영상으로 보여준다. 전시관에는 도자기로 만든 인물상과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진열돼 있는데 진품은 모두 형주의 박물관으로 옮기고 전시품들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전시품이 조금은 허접스러운 느낌이다.
▶ 저자거리
적벽대전 진열관을 나와 우측으로 조금 걷다보면 한대민가(漢代民家)가 나오는데 삼국지 당시의 저자거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 적벽고전 성으로 연결되는 목조다리
▶ 충단문(忠團門)
▶ 적벽탑(赤壁塔)
다시 성벽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해자처럼 호수로 둘러싸인 삼국적벽고전장 성이 보인다. 해자와 성을 연결하는 목조다리를 건너 충단문(忠團門)으로 들어가면 앞쪽에 손권이 오나라 전체 군사를 지휘하던 49m 높이의 7층 누각인 적벽탑(赤壁塔)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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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 곳곳에 전시된 적벽대전 관련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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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에 전시된 이백과 두보의 시
▶ 적벽루에서 본 삼국적벽고전장
누각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는데 계단 높이가 만만찮다. 7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 누각 벽에
는 적벽대전과 관련도 그림과 이태백, 두보 등의 시가 전시돼 있다. 7층 누각에 오르면 삼국적벽고전장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울러 적벽고전장 밖 노랗게 피어난 유채꽃의 물결도 볼 만하다.
▶ 금성으로 들어가는 성문
▶ 금성
▶ 촉오동맹교
▶ 토성
삼국적벽고전장 내부 성의 구조는 촉오동맹을 기념하는 동맹교를 사이에 두고 고전장 입구 쪽 토성은 일반 병사들이 주둔하던 지역이고, 적벽탑 쪽 금성은 고위직인 장군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금성과 토성 사이엔 두 개의 성문이 있는데, 황동 못이 박힌 방어대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 흉물스런 콘크리트 배
동맹교 부둣가에는 당시의 배 모양을 재현해 놓았는데 콘크리트로 만들어 페인트로 칠한 것이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흉물스럽다.
금성과 토성 곳곳엔 기념품가게와 음식점이 중간중간 자리하고 있다. 가게 이름도 소교두부, 방통서점, 주유주점, 제갈공명사진점 등 삼국지 내용을 테마로 구성돼 있다. 이곳 소수 민족인 토후족 특산품 등 기념품을 파는 곳이 있어 좋은 눈요기가 된다. 가격표가 붙어있지만 바가지요금이다.
다시 적벽광장과 신무대를 거쳐 삼국적벽고전장 밖으로 나온다. 적벽고전장은 츠비시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삼국지 관광개발사업일지는 몰라도, 강택민 전주석이 관심을 가지고 추진했던 것에 비해 너무 조잡스럽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건축물과 배, 다리 등을 모두 콘크리트로 만들어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테마파크를 개장한지 3년도 안되었지만 벌써 군데군데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갔고 페인트칠도 많이 벗겨져 적벽대전 테마파크로서 명성에 흠집을 내고 있다. 150元이라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받으면서 관리상태가 이리도 허술해서야 테마파크를 찾는 관광객에게 실망을 안겨 줄 뿐이다. 그리고, 단체관광객이 아닌 일반 관광객을 위해서라도 버스가 테마파크 정문 앞까지 운행해야 할 것이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삼국적벽고전장을 나온다. 이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몰살한 83만 조조군의 무덤이 된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으로 간다. 류커쭝씬에 맡겨 두었던 짐을 찾아 이곳으로 올 때 버스에서 내렸던 곳으로 가 오림(烏林)으로 가는 배를 타는 부두를 물으니 이곳에서 기다렸다 훙후(洪湖)시로 가는 버스를 타면 부두에서 배가 버스와 함께 도강시켜 준다고 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지도를 펴 놓고 오림을 보니 유적지가 여기저기 한참 떨어져 있어 걸어 다니며 구경하기란 불가능하고 택시를 전세 내 타고 다니는 방법 밖엔 없는 것 같아 오림은 건너뛰고 오늘 징저우(荊州)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몰살한 83만 조조군의 무덤이 된 곳이다. 이곳 여행은 이웃 츠비(赤壁) 시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적벽(赤壁)을 중심으로 당시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이곳 훙후 오림이다. 적벽 부두에서 철선을 타고 하류로 20여분 내려가면 강 건너 오림 부두에 닿는다. 창장(長江)의 폭이 의외로 넓다. 안개가 짙어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 2km는 정도 되는 것 같다.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걸 보니 창장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형 물류 운송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인들이 창장을 ‘어머니의 젖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만하다.
오림 부두에서 버스가 배 밖으로 나오자 일부 승객을 내려놓고 다시 홍호시로 출발한다. 부두 한쪽으로는 한국의 매운탕 집처럼 음식점 10여 곳이 죽 늘어서 있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오림 부두 주변은 유채꽃이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다. 이곳은 그 옛날 적벽대전의 숨겨진 전장 오림 전투가 펼쳐진 곳으로 적벽이 승자 손권과 유비의 역사라면 오림은 철저하게 외면된 패자들의 역사다. 적벽대전 당시에는 이곳에서 수km 내륙까지 창장이었다고 한다. 17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 바뀌어 인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현재 창장 물길도 1988년 대홍수 이후 대규모 관개시설 공사를 통해 새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적벽대전 당시 창장 변인 이 오림부두 주변은 83만 조조군의 주력군 진영으로, 주유와 제갈량의 화공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였던 주 전쟁터로 당시 조조 군사들이 불에 타고,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그야말로 아비귀환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 이백의 적벽대전
다행히 후세에 이백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이 참혹한 전쟁터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魏吳爭鬪快雌雄(위오쟁투쾌자웅) 위와 오 자웅을 겨루던 곳 赤壁樓船一掃空(적벽루선일소공) 적벽에는 배 한 척 보이지 않네 烈火初張雲照海(열화초장운조해) 매서운 불길 구름을 찌를 듯 강물 비칠 때 周郞曾此破曹公(주랑회차파조공) 주랑은 여기서 조공을 깨뜨렸네 |
그런저런 생각과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버스는 어느덧 홍오 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