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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村里양촌리(陽村, 골안, 새잿등, 木,西便)
위치 및 환경
양촌마을은 장흥읍에서 동북쪽으로 20km, 면소재지와는
동북쪽으로 50m거리에 있는 마을로 동으로는 장동면 봉동리, 남으로는 용강리, 서로는 등촌리, 북으로는 선정리와
접해 있다.
마을 앞으로는 용강천이 흐르며, 동에서 흐르는 정자천과
합하여 수리조건이 좋으며 평야지는 비옥한 옥토를 이루고
있다. 장평면의 중심지로 고려초부터 치소로 기록되고 있고, 일제시 왜군헌병이 주둔했던 곳이기도 하며 예부터 인구의 전출입이 잦았으며 현재고 75호에 32개 성씨가 거주하고 있다.
풍수지리설과 주요지명
풍수지리설
특별히 전해 오는 것은 없으나 유수원이라는 사람이 장평에 들어가 文千武萬의 吉地(현 장평초등학교 자리)라 하고
장평터를 보존하려면 세 개의 탑을 세우고 용두산 락맥의
하나인 란산소(卵山巢)의 잘린 능선을 이어야 地氣가 바로
보존 될 것이라 하였다. 유수원이 여기는 무서운 자리라 하여 피한 곳은 그후 일본 헌병대가 주재하여 앵국지사와 양민을 학살하는 곳이 되었다 한다.
주요지명
당-등:양촌 뒤에 있는 등성이. 당집이 있었음
담나뭇-골(시목동):부도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 감나무가
있었음
골-안:마을 중앙에 있음. 양촌리
골안-시암:골안에 있는 우물
까죽-시암:양촌 서남쪽에 있는 샘. 가죽을 담가서 불리었음
독샘-골:가장골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 돌틈에서 물이 나는 샘이 있음
들정-거리:양촌 남쪽에 있는 들. 정자나무가 있었음
들-시암:양촌 앞 들에 있는 샘
사치-등: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새
잿등이라 불리움
양촌-교:양촌 동북쪽 용강과 장택을 잇는 다리. 징검다리를 1959년 12월 13일 콘크리트 다리로 준공함
오목-교:양촌교
장구-배미:새잿등 앞에 있는 논. 지형이 장구처럼 되었음
한두-배미:새잿등 동쪽에 있는 논
조리-배미:양촌 뒤에 있는 논. 흉년에 한 조리의 쌀과 바꿨다 함
광대-보:광대바지 여의내가 용강천으로 흐르는 곳. 옛날에
소재지의 관계수로 이용된 보
굿-배미:장구배미 동북쪽에 있는 논. 굿을 했다. 함
부도-리:운수 동쪽 등성이 밑에 있는 마을. 거욱보양의 바위가 있음
부도릿-등:부도리 위에 있는 등성이
비석-등:운수 동쪽에 있는 등성이. 문씨 묘비가 있음
종쇠-배미:부도리 동쪽에 있는 논
마을의 연혁
골안(谷內)마을:고려말 吉氏가 입주하여 골짜기에 취락을
조성하였다고 하며 그후 조선조 때 장흥에서 거주하던 竹山人安 (1574∼1929), 安就珏(1786∼1842)가 이주 정착하였다고 한다. 長澤縣廳의 안쪽이 되므로 골안이라 하였다.
새잿등 마을:鳥재, 혹은 巳峙嶝이라고 부른다. 지형이 새의
등 또는 뱀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말
밀양 박씨인 浚洙가 강진에서 이주해 와 살면서 성촌되었다고 한다.
木마을:양촌리의 골안에 살던 주민들이 옮겨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18세기 중엽 유치면 조양리에서 거주하던 文鳳默(1820∼1895)이 임리의 선산을 관리하다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감나무가 많다 하여 감나무골 또는
시목이라 한다.
西便마을:조선 중엽(1676년 전후) 文受白이 노년을 보내기
위하여
이곳이 文千武萬地라는 말을 듣고 이주해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안골의 서쪽이라 하여 서편마을이라 하는데 옛날에 馬富者가 이곳에 살았다 하여 마부자터라고도 한다.
1747년(정묘지)에는 富谷으로, 1789년(호구총수)에는 良村으로, 1910년(경술지)에는 陽村,富谷으로, 1938년(무인지)
이후에는 陽村으로 나타나 있다.
마을의 주요사건과 자랑
주요사건
1372년(공민왕 21년) 壬子 6월에 왜구의 침입으로 倉米를
약탈 당함
1910년 8월 5일부터 1925년 5월 10일 경찰지서로 변경될
때까지 일본헌병 분견대가 주둔하면서 많은 항일의병과 항일투사를 투옥, 고문, 학살, 폭행, 노략질을 하였다.
당시 투옥된 지사들을 살펴보면
尹一三, 孫武景, 朱庚錫, 宣道明, 嚴大萬, 鄭士欽, 朱태경,
尹洪八, 周淅鎬, 權 澤, 朱文才, 文乃鉉, 金益洙, 朱亨五, 李世昌, 朱在浩, 高光信, 尹 一, 朱唐錫, 金有根, 白仲墓(鄭士欽은 1909년 4월 26일 오전 6시 사창장터에서 총살 당함)
자랑
양촌농악은 장평농악을 대표할 만큼 유서가 깊고 조예가
있어 보림문화제 행사에는 장평을 대표해서 출전한다.
마을조직
행정조직
리개발위원회:리정 자문결의 기관으로서 7개반에서 선출된 7명과 직능별, 전문성, 의식 수준에 따라 각각 3명을 선출, 당연직인 이장을 포함 11명응로 구성하고 있다. 매년
마을 총회에서 선출한다.
부녀회:마을 부녀자들이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하였으며 현재 길은숙씨가 회장을 맡고 있다.
청년회:농기구를 가동할 줄 아는 사람들이 상부상조와 공동작업을 목적으로 조직하여 현재 임홍종이 회장을 맡고
있다.
민간조직
동계:마을 일 전반에 대하여 논의하고 결정하는 조직으로
마을주민 전원이 참여한다. 구정전에 총회를 개최하고 재산관리,이장선철 등 제반 업무를 토의한다. 舊洞案이 있었으나 소실되고 1946년 이후 것부터 남아 있다.
위친계:상호 친목과 당고시 상부를 목적으로 1945년 조직할 당시 계원은 20명, 1965년 조직시는 18명, 1981년 조직시는 25명이다.
친목계:1975년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9명이 조직하였다.
친선계:선조의 유업을 계승하고 친목을 도모하여 선비추모정신을 앙양하기 위한 모임이다. 1988년 양촌마을 앞에 친선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현재의 계원은 15명이고 계장은 이한송씨이다.
소멸된 과거 조직
양촌 칠성계:文, 安, 趙, 朴, 張, 金, 白의 칠성이 상호친목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1946년에 조직하였으나 현재는
없다.
협동
품앗이:현재는 잎담배 경작농가에서 품앗이를 하고 있다.
공동작업:1년에 4회에 걸쳐 마을안길, 공동우물, 마을 하수구청소와 보수를 위해 공동작업을 하며 홍수피해 등에는
수시로 가구당 1명이 참여하여 공동작업을 한다. 불참시는
"궐전"이라는 부담금을 징수하여 동계의 수입으로 한다. 특히 이 마을은 지역특성상 골목길이 많고 하수구, 우물이 많아 공동작업이 많다.
마을 개발의 역사(문화생활)
마을개발
도로:마을 안길 1974년 새마을 사업으로 80m를 시작으로
현재는 진입로와 마을 안길의 확장과 포장을 완료하였음
버스운행:장평면의 교통중심지로서 1950년대에는 1일 2회
운행하였으나 현재는 직행 및 군내버스가 1일 42회 운행하고 있다.
지붕개량:1971∼1973년 50동을 지붕개량하고 1977년 소도읍 가꾸기로 25동을 신축하였다.
교량:1.구천교-여의동에서 용강으로 흐르는 00. 1933년 5월 24일 나무다리를 콘크리트 다리로 준공.
2.양천교-용강천과 마산사이 다리 1959년 12월 13일 콘크리트로 준공.
3.시목교-양촌에서 마산사이 다리. 1971년 11월 10일 준공.
생활변천
시장:장평시장과 장흥시장을 주로 이용. 생필품은 농협연쇄점에서 구입한다.
전기:1973년 전 호가 가설하였다.
식수:1978년 이전에는 마을 안의 6개의 공동우물을 이용하였으나 현재는 20호가 공동우물을 이용하고 55호는 자가자동펌프를 이용하고 있다.
전화:1971년 일부 가설하였으며 1987년 60호가 가설하여
현재는 70호가 전화를 보유하고 있다.
연료:기름보일러 16호, 연탄 40호, 나무연료 19호
학교:1918년 3월 20일 장평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여 현대식 교육이 시작되었으며 1930년경 일인들이 그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양촌 공립 심상소학교를 세워 교육하였다.
1950.5.13일 장평고등 공민학교 인가 중하교육실시. 고등학교는 장흥읍소재지 학교나 기타 광주 등 타지에 진학
※일제시 보통학교의 월 수업료는 80전이었다.(쌀 한 되 값은 20전)
마을의 산업
농업
경작규모:3단보미만 3호, 3∼5단보 8호, 5∼10단보 17호 1∼2ha 17호, 2∼3ha 3호
주요작물 생산현황:벼 2,300여가마 수매, 보리 1,300여가마 수매
특산물:도라지, 담배
경지정리:1968년 개보평 완료. 경지정리 가능지역-새재들
30ha
수리시설:①개보(3ha) 1968년 몽리민이 자력으로 축조.
②무시댕이보(1ha) 일제때 몽리면이 자력으로 축조
③광대보(1ha)1747년(정묘지)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시설이다.
품삯:작업의 종류에 따라 다르나 보통 1일 남자 20,000원,
여자 15,000원이다. 예전에는 남자는 백미 1되, 여자는 5홉이었다.
농기구 임차료:300평당 콤바인, 이앙기-30,000원, 트랙타
15,000원, 경운기 20,000원
축산
1∼2두씩 기르는 집은 많으나 집단적으로 사육한 사람은
신옥동씨가 한우 10두, 문현채씨가 한우 5두 등이다.
상업
떡방앗간(새마을 떡 방앗간):마을에서 운영
식료품상:1973년 김진근, 1970년 김채순, 1993년 이만규
목공소:1953년 길익근
정미소:1975년 박귀영
만물상회:1991년 김종철
마을의 인물
안의(1574∼1629):본관 죽산. 의금부도사, 절의비가 마을
앞에 서 있다. 장흥읍 건산에서 입주
조병진(1846∼1920):본관 창녕. 강진 성전에서 이주. 몽학선생이며 기적비가 장평체육공원 아래에 있다.
김달수(1870∼1927):동재 조성에 공이 많음.
문찬흠(1879∼1961):대동계, 향약 서문
안종채(1896∼1971):보림보감. 기념비가 마을 앞에 있음.
문홍익(1915∼1957):향약계 안에 발문
안계순:1976년 향교에서 효자 표창
이건님:1976년 장평 향약계에서 열녀 표창
정덕순:1977년 장흥군수 효부 표창
이순님:1977년 전라남도지사 효부 표창
정사흠:의병으로 활약하다 1909.4.26 사창 장터에서 총살
문내현:의병으로 활약하다 1908.8.23 사창 장터에서 총살
정창현:의병으로 활약하다 1908.8.23 사창 장터에서 총살
이기주1982년 군민의 상 체육상 수상
길우근:농악상쇠
안종원:고수(농악설소리)
박기섭:장고의 명인
문덕수:고약제조.「문고약」으로 널리 알려졌다.
문화유적·유물
시목 고인돌 군:마을에서 북서쪽으로 100m쯤에 있는 구릉
정상부 밭에 3기가 있다. 2개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1개는
상석이 옮겨져 있다.
양촌 고인돌 군:마을 뒤편 구릉에 있는 안종철씨 밭에 북동-남서의 타원형으로 군집되어 있다. 칠성바위라 불리며 옛날에는 제를 올렸다.
節 義 碑:죽산인 안의(1574∼1629)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10대손 鍾埰가 세움
惠 烈 閣:前章陵參奉陞嘉善大夫戶曹參判 田公在平紀念碑.
진재평(1863∼1922)이 1903년에 재산 20석을 마을의 구휼사업에 희사하였으며 그의 며느리 수우너 백씨도 남편을
잃고 노부모를 봉양하고 가솔, 선영을 돌봄에 그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향민들이 세웠다.
施 惠 碑:前通政大夫 敦寧府都正張公致明 施惠碑.1985년
4월 장평, 장동면민이 세웠다.
善 績 碑:면장 문재봉 선저거 부망비. 1931년 12월에 세움.
施 惠 碑:유인 김해김씨 시혜비. 회관부지를 희사하므로써
1973년 양촌리민이 세움
紀 績 碑 :慕山 曺炳振 선생 기적비. 1976년 세움.
親善契追慕碑:선비추모정신과 선조유업을 계승하고 친목을 도모하고자 1988년 12월에 세움.
紀 念 碑:寶林洑監 安鍾埰 기념비. 1906년 장서면민이 세움
紀 念 碑:면장 임유춘 기념비. 1917년 장평면미이 세움. 비면의 마모로 1991년 3월 재건
민속(놀이포함)
가정신앙:각 가정에서는 기제사나 명절 때 차례를 지낸후
"사자밥"을 대문밖에 짚을 깔고 놓아두며,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조금씩 떼어 주위에 버리면서 "고수레"를 한다.
세시풍속:겅칩에는 논이나 들, 계곡에 가서 개구리 알을 먹는다. 이를 "용알 먹으러 간다"고 하며 허리 아픈 이에게는
약이 된다고 믿는다. 또한 벽을 바르면 빈대가 없어지고,
물에 재를 타서 그릇에 담아 집안 네 귀퉁이에 놓아 두는
것도 빈대를 없애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민속놀이:6월 유두나 7월 백중날에는 농주를 마시며 윷놀이와 농악놀이를 하면서 즐겼다. 부녀자들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손수건을 몰래 옆 사람의 손에 건네주며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하는 사발통문놀이를 한다. 이는 원래 갑오동학농민혁명이후 연락문서를 전달하는 방법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씻김굿:3∼4인의 무당을 초빙하여 무덤이나 집안에서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밤새워가며 씻김굿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당제:당산나무에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냈으나 6.25이후
없어졌다.
굿배미당제:거북알 당 앞에서 장씨 부자가 년 2회 농신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전승노래
쌍가락지 노래
제보자:임흥종
쌍금 쌍금 쌍가락지
먼제보니 천일런;
저-처녀 자는방에
오라버니 오라버니
거짓말씀 말으세요
문풍지가 떠는소리
물명제라 석자수건
앞동산도 묻지말고
연대밑에 묻어주소
가랑비가 오거들랑
소나기가 오거들랑
우리친구 날찾거든
뒷동산도 없다하고
호적질로 닦아내서
저해보니 다리로다
숨소리가 둘이로다
옹달복송 오라버니
동지섣달 설한풍에
거짓말씀 라으세요
목을매어 죽었으니
뒷동산도 묻지말고
삿갓으로 덮어주고
거적데기 덮어주고
앞동산도 없다하고
연꽃속에 보라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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