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년여의 헤어진 기간동안 그 고왔던 병연의 어머니는 모진역경에 시달린 듯 야위었고, 평민복을 입고 계신 것은 필히 어떠한 변고가 있었음을 어린 병연은 직감했다.
비록 수척했지만 어머니의 눈망울은 예전처럼 인자하게 빛났다.
하루의 해가 다하고 병하와 김성수가 소를 몰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또 한번의 울음이 이어졌다.
지난해 잦먹이였던 동생 병호가 죽었다는 소식과 아버지도 계시지 않는다는 말에 두 형제는 슬픔과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동안 부모님의 사정은 이러했다.
홍경래의 난이 어렵사리 수습되면서 집과 재산은 몰수당했고, 병연의 형제가 곡산으로 피신하면서 김안근 내외는 젖먹이 병호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얼마 되지 않아 관비의 신분으로 있는 어머니인 전주이씨가 사망해 시신을 화장시키고 외가의 주선으로 상을 치루긴 했으나 김안근으로서는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고 해도 뚜렷한 대책을 세울 길이 없었다.
어렵사리 안동 김씨의 입김으로 멸족은 당장 모면할 수는 있겠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돼 있듯이 대역죄에 연좌된 가족들은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게 돼 있어 어디를 가도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보니 더더욱 그의 앞길이 막막했다.
김안근 내외는 광주에서 오래 버틸 수가 없어 젖먹이 병호를 데리고 여주로 갔다.
여주는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노론의 근거지이며 훗날 이천에까지 그 세가 뻗쳐 김조순과 김좌근의 묘를 쓰고 세도가의 전통가옥인 아흔 아홉 칸 집을 짓고 살게 됐던 곳이다.
김안근은 우선 가족의 신변을 위해 여주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사는 집안어른을 찾아갔으나 대역죄인의 아들을 대하듯이 누구하나 김안근의 곁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예전에 아버지인 김익순이 선천부사와 방어사를 지낼 때 양주의 본가에도 자주 찾아오던 집안어른들이었다.
물론 대역죄를 지고 가문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회복 할 수 없이 몰락한 집안을 대하는 태도는 예상했지만 그 수모와 치욕의 과정은 김안근에게 견딜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여주에서의 이러한 생활로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집에서 들고 나온 패물 몇 점이 이미 떨어져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거기에다 잘 먹이지 못한 어린 병호가 병으로 죽었다.
김안근은 궁리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최고의 권세를 쥐고 있는 당숙뻘되는 김조순을 만나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행장을 꾸리고 한양으로 떠났다.
이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 무렵의 일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면서 혹자는 여주와 가평에서, 또는 곡산에서 김안근은 화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었느니 하는 통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안동 김씨 계보에 의하면 1825년에 경남 남해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너무도 먼 곳이었다.
그가 신변의 안전을 위해 더 깊은 곳으로 가족과 함께 떠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머나먼 남해도(南海島)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을까?
예전에는 남해로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야 했고, 이곳 또한 죄인들의 귀양처로 활용되기도 했던 섬이고 보면 이는 필경 대역죄인의 아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아니하고 가족과 함께 버젓이 살고 있고 또한 집권 세도가의 집안이라는 신분에서 특혜를 받아 목숨을 부지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아온 비 집권 세력들의 입에 오르내려 그것이 안동 김씨의 정치적 부담이 돼 늦게나마 유배라는 형식으로 형을 받고 남해로 보내지지 않았을까.
또한 두 아들을 살리기 위한 방도로서 유배라는 형식으로 갔을 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홀로 남은 함평 이씨는 이미 예견은 했지만 행방이 묘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 갈 길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함평 이씨는 이를 악물고 무슨 일이든 했다.
밤이면 삵바느질을 했고 낮이면 밭일과 집안의 허드렛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이는 혼자 살기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곡산에 있는 두 아들의 먼 장래를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일념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