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는 국사國史가, 씨족에는 족보族譜가 있다. 조상님의 “얼”(넋.혼.精神)로 밝은 미래를 가꾸는 길을 열어 서흥인瑞興人의 긍지를 높이는 주체가 바로 종친회宗親會라 여겨진다. 광양종친회가 자리잡고 있는 광양光陽은 일찍이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1691-1756)가 조선팔도朝鮮八道를 암행暗行하고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꼽은 지역이다. “朝鮮之 全羅道 全羅道之 光陽”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德禮里 덕산德山마을은 500年 세거지世居地로 지금도 서흥김씨집성촌을 이루며 100여 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선조들은 원거리에 산재되어 있는 묘소를 마을 근거리로 이장移葬하였으며 매년 중추절仲秋節 전 121위 묘소墓所를 며칠 동안에 걸쳐 벌초하고 음력 10월 13∼14일 양일간 12개소 44위 시제제향時祭祭亨을 유사有司 제도를 정하여 윤번제식으로 시행하는 등 서흥인의 뿌리와 조상의 “얼”을 받드는 일들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진력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비포장도로로 교통수단이 열악한 시절임에도 열차와 버스편을 이용 일주일에 걸쳐 경기 안성 무열사武烈祠와 전라남도 영광靈光 죽림재竹林齋를 비롯 영남지역의 달성과 창녕 등 선조님을 모시는 시제향에 빠짐없이 참제하여 왔다.
광양종친회는 1995年11月 26日 화수회 이름으로 첫 발기 모임을 갖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납골당 서산영대西山靈臺를 만들게 된 것은 관리가 부실해 질 경우 보전자체가 어려워져 조상님들의 묘지가 실전失傳될 위기마저 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2001년 정기총회 때 문중 유지들의 결의로 세장산世葬山 서산西山에 납골당을 건립키로 하고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재원마련이 난관에 부닺혔다. 추진위는 57명 종원에게 분담금 1인당 500,000원과 출가자 남편(고숙姑叔, 자형姊兄, 사위壻)에게 십시일반의 협조를 구하는 안내문을 발송했다. 이렇게 해서 성금 3천8백4십만원(특별찬조금:6,000,000원 협찬금:5,400,000원 분담금:27,000,000원)이 모아졌다.
2002년 5월 7일 60칸 120위 문중 납골당 기공식에 이어 입광양入光陽 조상 8世 참의공參議公 휘 순손順遜, 9世 부사공府使公 숙인叔仁, 10世 참봉參奉 신행臣行 48위를 이봉 봉안移封奉安하였다. 세천비世阡碑와 사실기비事實記碑, 시비詩碑 등을 세우니 명실공히 서흥김씨 판서공파判書公派 광양문중光陽門中의 영지靈地의 모습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납골당 이름 「서산영대西山靈臺」는 청도淸道에 거주하는 대종회 전 상임고문 고 희구熙久옹의 자문을 받았고 비문의 글은 남구복南九福 삼성고전연구소장이 맡아주셨다.
그해 11월17일(음10.13)에는 서산영대 준공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헌관獻官이하 제관들은 도포를 차려입고 파록爬錄 홀기笏記에 의거 유림의식으로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이날 병의秉義 한훤당종택 종손을 비롯 미국 LA 거주 고 석렬錫烈, 화섭華燮, 남영南永, 희우熙于, 태인兌仁, 철동鐵東 전 대종회 사무총장 등이 고유제에 참제했고 안성, 영광, 해남. 나주, 광주, 달성, 창녕 거주 종친분들을 비롯 광양 종원 전 가족, 순천. 낙안향교 전교典校, 도유사都有司와 지역 유지 등 약 100여명이 고유제를 지켜보며 광양 문증을 빛내 주셨다.
글 동규東圭(25世 전남 순천) 광양종친회 자문위원
첫댓글 시비내용입니다.
척고서산흘 : 그리운 부모님 서산이 우뚝하고,...... 회망덕례평 : 정다운 내고향 덕산이 평화롭네.
영대화수무 : 새로만든 영대엔 꽃나무가 무성하고. 석탑채하생 : 아담한 석탑엔 아지랑이 엉기었네.
송경훈풍지 : 훈훈한 바람은 솔 밭에서 불어오고... 죽림여일명 : 고운 햇빛은 대나무 숲 밝혀주네.
창쌍여일명 : 어지러운 세상에도 이렇게 하고보니. 숙불고원정 : 누군들 고원정을 느끼지 않으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