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원래 연주사람으로 조실부모하여 집이 넉넉하지 못하였다.8,9세때부터 몸집이 매우 크고 지혜와 용맹이 뛰어났다.
연주 첨각산 깊은 골자기는 나무숲이 우거져서 밤에는 사람들이 다니기를 꺼려하는 곳이였다.
공이 어릴때에 볼일이 있어 이 길을 가게되었는데 산에서 날이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다.
이 때에 시커멓게 생긴 귀신이 나타나 횃불을 들고 앞을 인도하면서 말하기를 "현장군님이 오셨다하니 가히 이상스러운 징조를 이제 앞으로 볼 수가 있으리라"고 하였다.
공의 연세가 열 아홉이 되었어도 아직 결혼을 못하였었다. 이 때에 흉노가 국경을 침략하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그를 전멸시켰다. 고려 의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연산부사를 제수하시고 또 명문가족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이 사실은 기록되어있다.
북송이 여진국의 난리를 만나자 고려에 원병을 청해오니 공을 원병대장으로 임명 출정케 하였던바 공은 대공을 세웠다.
북송의 국왕이 겅에게 큰상을 내리고 또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높은 벼슬에 임용되도록 하여주었으며 본국에서도 크게 시상 할것을 논의 하였다.
고려 명종때 조위총의 난리에(서기1174-1176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정중부, 이의방을 치고자 일으킨난) 공은 아들 형제와 함께 힘써싸워 적을 물리쳤다.
그 이듬해 금나라에서는 고라장군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게하고 연주지역 성중에 주둔케 하였다. 성중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니 고라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너희 나라 여려성들이 왕명을 거역하여 적에게 항복 하였으나 오직 너의 성만이 그렇지 아니했다.
그래서 도적들의 핍박을 받은지 오래된다하여 내가 구원병을 거느리고 왔으니 당신들은 의심하지말라"하였다.
공이 본래 은신으로 금국인에게 알려진 고로 고라의 진지에 가 이 사실을 고하니 고라가 감격하여 말하기를 "국왕으로부터 들은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였구나, 위급한 이 때에 내가 도와 주리라".(이 내용은 고려사에 있음) 그 후 위총의 난리를 평정하고 원훈공신으로서 벼슬이 평장사가 되시고 연산군에 봉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 장례시의 일이다. 상여가 오리정에 이르니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와 상여를 멈추고 간단히 주과를 차려 예를 올렸다.
예식이 끝난후 상여를 움직이려 하여도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아니했다. "이 곳에 묻히시고 싶으신가 "하고 누가 말한즉 그때야 비로서 상여가 움직였으므로 결국 그곳에 장사하셨다.
공의 별장이 있던터에 양씨 성을 가진사람이 집을 지었더니 밤에 큰 장수가 나타나서 위의를 갖추고 그 양성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꾸짖었다. 크게 겁을 먹은 양씨가 즉시 집을 헐고 다른곳으로 이주하여 갔으며 공의 묘소를 찾으러 할 때에 개천,박천에사는 종인들의 꿈에 공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광중을 깊이 파보면 무슨 징상이 나올 것이다"고 현명하였다.
오랬동안 땅을파니 대봉 세마리가 광중에서 날아 나오니 이는 공의 무덤이 틀림없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신령스럽고 신기한 일을 다 기록할 수 없다.
이 때부터 자손들은 음력9월 15일에 한번씩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연주현씨 대동보 제1권 137-139쪽에서 26세손 경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