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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갈석산을 찾아서(제2회)
(1) 본래의 갈석산에 대한 기록들
지금까지 『서경』 ‘우공’에 나오는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각종 사서에 나오는 본래의 갈석산에 대한 기록들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1)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위에서 『서경』 ‘우공’에서 살펴본 ‘도이는 가죽옷을 입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은 『사기』 ‘하본기’에도 나온다. 이 본래의 갈석산에 대하여 『사기색은』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났다.’ 하였다. 또 『수경』은 말하기를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 인듯하다.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地理志云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此云 「夾右碣石入于海」,當是北平之碣石).” 『사기색은』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당나라(서기 618-907년) 시대의 사람이다. 사마정은 갈석산을 두 개로 보고 있는데, 이 주석으로부터 갈석산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비롯되었다.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마정이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간다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군의 갈석이다.’고 하였으므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는 갈석산은 동일한 산이다. 그런데 갈석산이 두 개라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은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동일한 산인지 아닌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과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동일한 산이 되려면, 백석산 주변에 수성현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는지 여부와 그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백석산 동편에는 수성현이라는 지명과 만리장성의 유지가 지금도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에는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무경총요武經總要』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 있다(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위의 내용을 통하여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 주변에는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으며, 그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장성의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로써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기록한 갈석산이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과 동일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서두에서 살펴보았듯이 『태강지리지』에서 나오는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하고 그 중심부에 설치한 한나라 낙랑군과 동일한 곳이었다. 그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는 갈석산을 찾음으로써, 한민족 상고사의 최대 쟁점이라 할 수 있는 한사군의 위치와 고조선의 중심지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고조선의 중심부에는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아름답고 웅장한 백석산이었다.
참고로 위의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수성현의 경계에 있는데, 수성산遂城山의 이름은 용산으로 수성현의 서쪽 25리에 있다고 하였다. 수성산이 갈석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갈석산은 수성현의 서쪽 25리 정도의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백석산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봉우리가 110개에 이르고, 해발 2,000M 이상인 봉우리도 5개나 되는 웅장한 산으로 정상인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은 수성현으로부터 서쪽으로 200여리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백석산 전체를 말하기 보다는, 수성현 서쪽 가까이서 우뚝 솟아 있는 백석산의 동쪽 지맥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이제 위에서 『사기색은』이 본래의 갈석산에 대하여 주석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사기색은』은 갈석산을 두 개로 보았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위치한 갈석산’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은 동일한 산으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그러면 자연히 『수경』이 말한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는 갈석산은 본래의 갈석산과는 다른 갈석산이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 갈석산은 바다속에 침몰해버렸다고 한다. 다른 갈석산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갈석산이다.
2) 조‧중 국경선에 위치한 갈석산
『전국책』은 중국 전국시대(BC 475~221)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여기에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전국책』 ‘연책’
이 기록은 고조선과 연나라의 구체적인 강역관계를 알 수 있는 최초의 역사기록으로,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었다. 아울러 연나라의 남쪽에 갈석산이 있었다고 하는데, 앞에서 살펴본 『서경』 ‘우공’의 기록 다음으로 오래된 갈석산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갈석산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보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쪽으로 고조선을 공격하고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한 때는 기원전 300년경의 일이다. 이때 비로소 연나라는 현 중국 북경유역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위에서 소진이 연나라 문공에게 ‘연나라 남쪽에 갈석산이 있다.’고 말한 때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고 연5군을 설치하기 30여 년 전의 일이다. 이때의 연나라는 아직 북경유역으로 진출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연나라의 남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갈석산은 현 중국 북경보다 더 서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연나라 남쪽에 위치한 갈석산에 대하여 송나라 포표鲍彪는 『전국책』에서 『사기정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사기정의』에 이르기를 ‘갈석산은 평주에 있으며, 연나라의 동남쪽이다. 안문산은 대에 있으며, 연나라의 서남쪽이다.’ 하였다(正義云,碣石山在平州,燕東南 ; 鴈門山 在代,燕西南).” 『전국책』 ‘연책’
그리고 『전국책』에서 소진이 연나라 문공에게 연나라 강역을 설명하는 위의 기록은 『사기』 ‘소진열전’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여기서 연나라 남쪽에 있었다는 갈석산에 대하여 『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전국책에) 갈석산은 상산 구문현에 있다. 『지리지』에 대갈석산이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戰國策)碣石山在常山 九門縣. 地理志, 大碣石山在右北平 驪城縣西南).’ 하였다.
『사기색은』은 앞에서 『서경』 ‘우공’의 갈석산에 대해서도 『지리지』를 인용하여 ‘갈석산은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있다.’고 주석하였고, 여기서는 ‘연나라 남쪽’의 갈석산에 대해서도 『지리지』를 인용하여 같은 주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경』 ‘우공’의 갈석산과 『전국책』 ‘연책’의 갈석산은 모두 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이 백석산은 낙랑군 수성현 지역에 해당하는 동시에 연나라의 동남쪽에 해당하므로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에 위치하였다.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선 역할을 하였음은 다음의 기록들로도 확인이 된다.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東, 榑木之地)” 『회남자』 ‘시칙훈’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東過碣石以玄菟·樂浪爲郡).” 『한서』‘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
이들 기록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며, 이 백석산을 지나면 조선이 시작되었다. 『회남자』는 한나라 고조의 손자로 회남왕에 봉해진 유안(劉安, ? ~ BC 123)이 지은 책이다. 이때는 위만조선 시대로 갈석산으로부터 지난다는 조선은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있었던 조선현을 가리킨다.
『회남자』의 이 갈석산에 대하여 3세기초 동한의 학자인 고유高誘는 주석하기를 ‘갈석은 요서계의 바다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 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 樂浪之縣也).’ 하였다. 『한서』는 중국 정사의 하나로 후한의 반고(班固, AD 32~92)가 82년 무렵에 완성했다.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군을 삼았다’는 기록은 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이 들어선 시기를 가리킨다.
3) 평주 노룡현에 위치한 갈석산
당나라 시대의 평주 노룡현은 수나라 시대의 북평군 노룡현이었다. 『수서』 ‘지리지’를 통하여 이 북평군 노룡현의 연혁을 살펴보자.
“북평군은 옛날 평주에 설치했었다.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2,269이다. 노룡현은 옛날 북평군에 설치했다. (북평군은) 신창현과 조선현 등 2개의 현을 다스렸다. 북제(北齊, 또는 後齊)에서는 조선현을 없애고 신창현에 편입시켰으며, 또 요서군의 해양현을 없애고 비여현으로 편입시켰다. 개황 6년에 또한 비여현을 없애고 신창현으로 편입시켰다가 18년에 이름을 노룡현으로 바꾸었다. 대업 초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장성이 있다. 관관이 있다. 임유궁이 있다. 복주산이 있다. 갈석이 있다. 현수‧노수‧열수‧윤수‧용선수‧신량수가 있다. 바다가 있다(北平郡. 舊置平州. 統縣一, 戸二千二百六十九. 盧龍. 舊置北平郡, 領 新昌 朝鮮 二縣. 後齊省朝鮮入新昌, 又省遼西郡并所領海陽縣入肥如.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 十八年改名盧龍. 大業初置北平郡. 有長城. 有闗官. 有臨渝宮. 有覆舟山. 有碣石. 有 玄水 盧水 湼水 閏水 龍鮮水 臣梁水. 有海).” 『수서』 ‘지리지’
당나라 시대의 평주 노룡현은 위의 『수서』 ‘지리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위(386~534)의 평주 북평군에 설치되었는데, 북위의 북평군에는 신창현과 조선현이 있었다. 북제(550~557) 시기에 평주 북평군의 조선현을 신창현으로 편입시켰으며, 평주 요서군의 해양현을 비여현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수나라 개황 6년(586)에 비여현을 신창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평주에는 신창현만 남게 되었다.
수나라 개황 18년(598)에 이르러 평주 신창현을 노룡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나라 대업(大業, 605~618년) 초에는 이곳에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이곳 북평군 노룡현 지역은 북평군 또는 평주로 번갈아 불렸다. 그러므로 이 평주 노룡현은 북위로부터 당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평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지명이다. 아울러 북위가 설치한 조선현의 위치도 알 수 있다. 위의 『수서』 ‘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평주 노룡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다. 이 갈석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앞의 ‘조‧중 국경선에 위치한 갈석산’ 항목에서 『전국책』에 나오는 ‘연나라 남쪽의 갈석산’에 대해서 송나라 포표鲍彪가 『사기정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사기정의』에 이르기를 ‘갈석산은 평주에 있으며, 연나라의 동남쪽이다. 안문산은 대에 있으며, 연나라의 서남쪽이다.’ 하였다(正義云,碣石山在平州,燕東南 ; 鴈門山 在代,燕西南).” 『전국책』‘연책’
이 ‘연나라 남쪽의 갈석산’이 현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임을 살펴보았는데, 『사기정의』는 이 갈석산이 평주에 있다고 주석 하였다. 『사기정의』의 저자 장수절은 당나라 측천무후(624-705)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므로 『사기정의』가 말하는 평주는 당나라 평주 노룡현이며, 이곳에 위치한 갈석산이 곧 연나라 동남쪽에 위치한 갈석산으로 백석산과 같은 산임을 알 수 있다.
『사기정의』의 또 다른 주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사기정의』는 『사기』 ‘하본기’에서 ‘기주冀州’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按理水及貢賦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直南至華陰,卽東至懷州南,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 東河之西,西河之東,南河之北,皆冀州也).” 『사기정의』
위『사기정의』의 주석에 의하면 기주는 황하로 둘러싸인 현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지역을 말한다. 본 글의 서두에서 살펴본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황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은 『서경』 ‘우공’에 나오는 본래의 갈석산과 동일하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이다. 그런데 『사기정의』는 이 갈석산이 평주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평주 노룡현의 갈석산은 바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다.
오늘날 통설에서는 이 평주 노룡현의 갈석산을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에 위치한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본래의 갈석산인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이 요나라(916~1125) 시대에 지명이동된 것이다. 이때 갈석산과 더불어 평주 노룡현의 지명도 같이 이동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가짜 갈석산’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4) 본래의 갈석산에 대한 종합
지금까지 『서경』 ‘우공’에 나오는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는 본래의 갈석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갈석산은 『서경』및 『사기』와 『한서』등에 나타난 학자들의 주석을 통하여 그 위치를 밝힐 수 있다. 또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와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해서도 그 위치를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갈석산은 시간적으로는 ‘하나라 우임금 시절’이며, 공간적으로는 ‘황하 하류 해변가’라는 뚜렷한 시공간의 역사 좌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그 위치를 규명할 수 있다.
이 갈석산이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기록한 갈석산이다. 한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 그 시공간의 좌표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갈석산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밤하늘의 천문현상을 이해하려면 북극성을 알아야 하듯이 한민족의 상고사를 이해하려면 갈석산을 알아야 한다.
본래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다. 좁은 의미로는 백석산의 동쪽지맥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을 이르기도 하였다. 이 갈석산은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기 전까지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었다.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에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 등의 연5군을 설치하였을 때는 우북평군 여성현 서남쪽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중국대륙의 진말‧한초 혼란기를 이용하여 고조선은 진번과 조선지역을 다시 회복하였으며, 갈석산은 다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 되었다. 이 과정을 『사기』 ‘조선열전’ 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이 연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에 소속시켰는데, 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에 복속시켰다(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사기』 ‘조선열전’
기원전 195년 경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건국하였을 때에도 갈석산은 여전히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이었다. 『회남자』에서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동쪽 부목榑木 땅에 이른다.’고 한 갈석산이 이것이다.
그 후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한사군을 설치하였을 때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 지역에 해당하였다. 『한서』에서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토와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 후 갈석산 지역은 수나라 개황 18년(598)에 이르러 평주 노룡현으로 바뀌며, 당나라 시기까지 평주 노룡현 또는 북평군 노룡현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본래의 갈석산을 둘러싼 역사 기록의 대강이다. <다음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