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마라톤’의 유래
마라톤하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42.195km를 달리는 경기란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지만 마라톤의 유래나 왜 42.195km인지는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라톤의 유래를 살펴보면, BC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대왕이 보낸 그리스 원정군(遠征軍)은 낙소스 · 델로스섬 등을 정복한 후 아테네를 공략하기 위하여 아티카(Attika)의 북동 해안에 있는 마라톤 광야에 상륙하였습니다.
아테네의 장군들은 밀티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마라톤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작전을 세우고, 최고무관 칼리마코스 지휘 하에 약 1만의 중장 보병군(重裝步兵軍)을 급파하여 마라톤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포진하였으며, 양군의 대치상태가 수일간 계속되던 중 페르시아군은 주력부대를 승선시켜 해상으로부터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아테네군은 즉시 공격으로 나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페르시아군은 배로 달아났다가 다시 아테네 시(市)로 쳐들어가려 하였으나, 아테네군이 이미 육로로 해서 돌아와 있다는 말을 듣고 공격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군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6,400명의 병사를 잃은 데 반하여, 그리스 측의 전사자는 192명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그리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0 km를 달려 “우리는 이겼노라.”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알리고 절명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마라톤 경주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입니다.
마라톤 거리가 처음부터 42.195km로 정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사에서 유래되어 1896년 근대올림픽 제1회 아테네대회부터 육상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마라톤에서 아테네의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코스를 달렸는데, 이때의 거리는 후일 실측해 보니 36.75km로 밝혀졌으며, 제7회 올림픽까지는 대회 개최지의 여건에 따라 통일된 거리가 아닌 40km 전후를 달렸습니다.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마라톤경기의 거리를 일정하게 통일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는데, 1908년 제4회 런던 올림픽대회 때 달린 ‘윈저궁전에서 올림픽 스타디움’까지의 거리인 42.195km가 마라톤의 정식 거리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마라톤 기록은 코스마다 조건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세계기록은 공인되지 않으며, ‘세계 최고’라는 말이 쓰이는데, 실제로는 ‘세계 기록’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마라톤 공식기록은 마봉옥씨에 의해 작성이 되었는데, 1927년 조선신궁 체육대회에서 3시간 29분 37초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며, 1930년에는 인력거를 끄는 이성근이 2시간 36분 30초의 기록을 세웠고, 1931년엔 김은배가 2시간 26분 12초로 그 당시 비공인 세계기록을 수립하며 우승을 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 LA 올림픽인데, 그것도 한명이 아닌 두 명으로 권태하라는 청년과 당시 고교생이었던 김은배가 그 주인공으로 권태하는 9위에 김은배는 6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사람은 누굴까요?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일 것입니다.
손기정이 바로 그 주인공으로 1935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2시간 25분 19초라는 한국 최고 기록 및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면서 월계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암울했던 일제 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 그 한을 가슴에 안고 달려, 만천하에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한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유명한 일화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엔 당당히 태극기를 앞가슴에 달고서 서윤복이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처음 태극기를 달고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탓인지 서윤복도 민족의 영웅이 되었으며, 1950년 같은 대회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쓸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