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경남 함양군수로 부임한 점필재 김종직은 동헌 앞의 학사루(學士樓)-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지었음-에 올라가 벽에 걸려 있는 유자광의 현판 글씨를 보고 저 못된 놈의 글씨를 당장 떼어내라고 호통을 친것이 발단이 되어 이 소리를 들은 유자광(柳子光)이 사관으로 있던 이극돈과 함께 후일 복수를 한것이 戊午士禍였읍니다. 이로 인하여 그 자신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국가적으로는 성종조때 길려 놓은 많은 성리학자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추사 김정희는 1840년 54살의 나이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는데 草衣禪士를 만나려 해남 대둔사에 들른 그는 金生이래 한석봉을 거처 동국진체의 맥을 이어오던 圓嶠 李匡師가 쓴 大雄寶殿 현판을 떼어버리라고 티박을 주고 제주도로 떠납니다. 1849년 63살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른 추사는 이광사가 쓴 글씨를 다시 제자리에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춥고 외로운 유배지 생활에서 그의 인생관이 달라진 것입니다. 1851년 66세의 노구로 헌종의 묘 이장 문제로 또 귀양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추사는 만년에 거처하는 집을 수졸산방(守拙山房)-보잘것 없는것을 지키는 집-이라고 하여 늦게나마 자신을 한없이 낯추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점필재와 추사는 시기적으로 400년의 시차가 있고 집안도 점필재는 선산 김씨,추사는 경주 김씨이며 학맥으로는 점필재는 영남학파 그 중에서도 북인의 씨를 뿌린 사람이고 추사 집안은 서인들 중 소론으로 율곡의 학맥을 이은 기호학파로 학연이 다르지만 당대에 뛰어난 천재로 자기자신을 낯추는 처신이 부족하여 역사에 비극적으로 기록된 것이 비슷합니다.
만약 그들이 젊은 시절 낮은 자세로 남을 포용한 삶을 살았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만과 편견은 높이 올라 갈 수록 꼭 필요한 덕목인가 봅니다. 이 시대 지도자에게 필요한 역사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첫댓글 겸손의 미덕도 한계가 있을 거고, 언제나 인생 살이는 낮은 자세가 필요한가 봐. 그러나 실행하기란 참 어려운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