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에서는 삼국지위서동이전을 근거로 3세기까지 한반도에 삼한(三韓) 소국이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삼국사기의 내용과는 상반됩니다. 삼한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조상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으로, B.C.194년 위만에게 밀려나서 남쪽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기자조선의 역사는 40여 世, 1,000년에 이르며 중국과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고대국가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한(三韓)은 어느 정도로 발달된 국가 형태인지, 교수님의 의견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없음
저는 삼국지위서동이전에 나타나는 삼한(三韓)은 3세기 한반도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3세기 한반도에 삼한(三韓) 소국(小國)이 존재하였다면 중국이 어떤 경로로 조사한 것이며, 믿을 만한 것인지 교수님의 의견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없음
마지막으로 중국정사조선전 및 삼국사기 등 고대문헌사료 활용에 한계가 있다면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보돈 교수님 답변) 사료를 신중히 취사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사를 동아시아 역사로 확장하기 위하여 연표를 제작하시겠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신라 아달라왕 재위기와 왜여왕 비미호 시대는 60여년의 차이가 있고, 일본에서는 신공황후 섭정기를 4세기로 보는데 신라 우로태자는 3세기의 인물입니다. 고구려의 아도화상은 고국원왕대의 4세기의 인물이고 신라의 미추왕은 3세기의 인물입니다. 시대가 불일치한다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없을 것인데 극복방안은 있습니까?
(노중국 교수님 답변) 제시한 것보다 많은 부분을 알고 있습니다. 좋은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보충)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아달라왕 20년(A.D.173)년의 일이고, 삼국지위서왜인전에 의하면 비미호가 사신을 보낸 것은 경초2년(A.D.238)의 일로써 65년의 차이가 있다.
→ 남당유고에는 아달라왕 20년(A.D.232)이라고 하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신공황후가 죽인 신라왕은 우로로 보고 있으며, 우리학계에서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우로태자가 죽은 것은 첨해왕3년(A.D.249)이다. 일본은 신공황후를 4세기 인물로 본다.
→ 남당유고에는 우로가 사망한 시기를 미추왕 7년(A.D.331)이라고 하였다.
아도화상이 고구려에 온 것은 소수림왕4년(A.D.374)이다. 삼국유사에는 미추왕대에 아도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23년(A.D.284)이다.
→ 남당유고에는 미추왕이 사망한 시기를 유례왕 13년(A.D.362) 71세였으며 키는 8尺이라고 하였다. 미추왕릉은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가 확실시 되고 있으나,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에 이와 같은 무덤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어, 전(傳) 미추왕릉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첫댓글 잘 알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