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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 |
참고로 위 글에 나오는 『관창해』라는 시는 조조가 건안 12년(207) 9월에 북쪽의 오환을 정벌하고 원소의 잔류부대를 소탕한 후 회군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읊은 시로 전해진다.
<관창해觀滄海>
東臨碣石 以觀滄海 동쪽으로 갈석산에 임하여 창해를 바라보니
水何淡淡 山島竦峙 물은 넉넉하고 섬은 우뚝 솟아 있도다.
樹木叢生 百草豐茂 수목은 울창하고 백초가 무성한데
秋風蕭瑟 洪波涌起 가을바람 소슬하니 큰 파도 일어난다.
日月之行 若出其中 해와 달의 운행이 그 속에서 나오는 듯
星漢燦爛 若出其裏 은하수 찬란함도 그 속에서 나오는 듯
幸甚至哉 歌以詠志 기쁨을 가눌 길 없어 그 뜻을 노래하노라!
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이 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산해경』에 기록된 곽박의 주석이다. 『산해경』‘해내동경’에 나오는 제수濟水에 대하여 곽박은 아래와 같이 주석하였다. 참고로 곽박 당시에는 황하 하류가 제수와 합류하여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 방면으로 흘렀다.
“지금 제수는 형양군 권현으로부터 동쪽으로 진류를 지나 잠음 북쪽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고평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제남을 지나 낙안 박창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지금의 갈석이다. 모든 물의 나오는 곳이나 지나는 곳에는 착오가 있다. 무릇 산천은 혹 이름이 같으나 실지는 다르며, 혹은 실지는 같으나 이름이 다르며, 혹은 실지는 하나이나 이름은 여러 개이며, 옳은듯하나 그르며, 그른듯하나 옳으니, 이는 세월이 오래되고, 예와 지금이 다르며, 말에는 초나라 말과 하나라 말이 있으며, 부르는 이름이 같지 않으므로 상세함을 얻을 수 없다(今濟水自滎陽卷縣,東經陳留至潛陰北,東北至高平,東北經濟南至樂安博昌縣入海,今碣石也 。諸水所出,又與水經違錯。以為凡山川或有同名而異實,或同實而異名,或一實而數名,似是而非,似非而是,且歷代久遠,古今變易,語有楚夏,名號不同,未得詳也).” 『산해경』 ‘해내동경’
여기서 곽박은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을 지금의 갈석산이라고 하였다. 곽박은 이 갈석산이 아닌 예전의 갈석산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후한서』 ‘군국지’에 실린 갈석에 대한 곽박의 또 다른 주석을 살펴보자.
“『산해경』이 말하기를 갈석산은 승수가 나온다. 산 위에는 옥이 있고, 산 아래에는 청벽이 많다. 『수경』이 말하기를 (갈석산은) (임유)현의 남쪽에 있다. 곽박이 말하기를 ‘혹은 말하기를 우북평 여성현 해변산이다.’ 하였다(山海經曰:「碣石之山, (綱)[繩]水出焉, 其上有玉, 其下多靑碧.」水經曰在縣南. 郭璞曰:「或曰在右北平 驪(城)[成]縣海邊山也.」.” 『후한서』 ‘군국지’ <요서 임유현조>
곽박은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 뿐만 아니라, 본래의 갈석산인 ‘우북평 여성현 서남쪽에 위치했던 갈석산도 알고 있었다. 곽박(郭璞: 276~324)은 서진시대 사람이므로 4세기 이전에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에 학자들의 착오에 의한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착오 갈석산은 한민족 상고사와 큰 관련이 없다.
2)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갈석산
황하 하류의 흐름이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으로 흐르면서 이곳에 새로운 갈석산이 생겨났으나, 이 갈석산은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전인 『서경』‘우공’에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인 항산恒山을 지나서 갈석산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체현의 갈석산은 비록 당시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지만, 항산恒山보다는 500여리 동남쪽에 위치하므로 『서경』‘우공’에 나오는 갈석산과는 방향이 맞지 않는다. 당시의 학자들은 경전의 구절에 부합하는 갈석산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갈석산이 바다속에 잠겨버렸다는 설이 나왔다. 『수경주』를 통해서 관련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항산은 북악으로 중산 곡양현 서북에 있다. 갈석산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다. 대우가 그 돌을 뚫어 오른쪽을 끼고 황하를 받아들이게 했다. 진시황과 한무제가 모두 올랐는데, 바닷물이 서쪽으로 침범하기를 세월이 흘러 그 산을 삼켰으므로 물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恒山為北嶽, 在中山上曲陽縣西北, 碣石山在遼西臨渝縣南水中也. 大禹鑿其石, 夾右而納河. 秦始皇、漢武帝皆嘗登之, 海水西侵, 歲月逾甚, 而苞其山. 故言水中矣).” 『수경주』 ‘우공산수택지소재禹貢山水澤地所在’
『수경주』는 위의 기록 외에도 ‘하수河水’조와 ‘유수濡水’조에서 갈석산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산해경』에 이르기를 갈석산에서 승수가 나온다. 동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간다(山海經 曰:碣石之山, 繩水出焉. 東流注于河).” 『수경주』‘하수河水’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장군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다. 임조에서 일어나 갈석에 이러렀다(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 至于碣石).” 『수경주』‘하수河水’
“유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삽현 갈석산에 이른다. 문영이 말하기를 ‘갈석은 요서 삽현에 있다. 왕망의 선무이다. 삽현은 임유에 합해졌다. 왕망은 임유를 다시 빙덕이라 했다.’ 하였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대갈석산이 우북평군 여성현의 서남쪽에 있다. 왕망이 고쳐서 갈석이라 했다.’하였다. 한무제 또한 올라서 큰 바다를 바라보았으며, 그 돌에 공적을 새겼다. 지금 바닷가에 돌담 같은 돌이 수십 리에 걸쳐 있는데, 산 정상에 기둥 같은 큰 돌이 있어 왕왕 큰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조수가 크게 일면 사라지고 조수가 밀려나면 움직이지도 않고 잠기지도 않으니 깊은지 얕은지 알지 못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천교주라 부른다. 사람이 만든 형상 같으나 역시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졌으며, 위소는 역시 이를 가리켜 갈석이라 했다...중략...옛날 한나라 시절에 파도가 크게 일어 땅을 넓게 삼키니 마땅히 갈석도 큰 파도에 빠졌을 것이다(濡水又東南至絫縣碣石山, 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德. 《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揭石也. 漢武帝亦嘗登之以望巨海, 而勒其石于此. 今枕海有石如甬道數十里, 當山頂有大石如柱形, 往往而見, 立于巨海之中, 潮水大至則隱, 及潮波退, 不動不沒, 不知深淺, 世名之天橋柱也. 狀若人造, 要亦非人力所就, 韋昭亦指此以為碣石也.....中略.....昔在漢世, 海水波襄, 吞食地廣, 當同碣石, 苞淪洪波也).” 『수경주』‘유수濡水’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수경주』는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갈석산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하수河水’조에서는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우공산수택지소재禹貢山水澤地所在’조와 ‘유수濡水’조에서는 요서 임유현의 물속에 위치한 갈석산을 소개하고 있다.
『수경주』는 ‘우공산수택지소재禹貢山水澤地所在’조에서 『서경』 ‘우공’에 나오는 갈석산을 요서 임유현 남쪽 물속에 있는 갈석산으로 보았다. 또 ‘유수濡水’조에서는 여러 가지 전설을 소개하면서 이 갈석산이 『서경』 ‘우공’에 나오는 갈석산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이 갈석산은 발해 바다속에 빠져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황하 하류의 흐름이 바뀐 줄 모르고 당시의 황하 하류 해변가에서 갈석산을 찾으려다 찾을 수 없자, 궁여지책 끝에 나온 착오 갈석산이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