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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자군운동(The Crusades)
1096년:교황 우르바노 2세, 군중 십자군
1096~1099년:제1차 십자군원정
1147~1148년:제2차 십자군원정
1189~1192년:제3차 십자군원정
1202~1204년:제4차 십자군원정
1208년:알비 십자군
1212년:독일과 프랑스에서 계시받은 소년의 선동, 어린이십자군 3만여명
1218~1221년:제5차 십자군원정
1228~1229년:제6차 십자군원정
1248~1249년:제7차 십자군원정
1270년:제8차 십자군원정
(1) 십자군운동(十字軍,croisade)
3세기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동선을 따라 성지순례를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이슬람제국들은 종교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하였슴에도 불구하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Battle of Manzikert)를 기점으로 군사적 원정을 단행하기 시작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제국과 셀주크제국 군대간의 전투로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근교에서 발생하였으며 비잔티움제국의 패배로 결정이 난 전쟁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서유럽은 교황 우리바노 2세를 중심으로 안디옥, 예루살렘 등 기독교 성지에 대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의 목적은 성지회복보다 동방정교회를 로마카톨릭 통치아래 두려는 권력구조의 일원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으로 괴로워하던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요청을 받아들여”라는 칙서의 기록은 알렉시오스 1세의 딸인 안나 콤네나가 쓴 "알렉시아드"의 기록과 상반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 정확성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뉘어 지고 있습니다
① 군중 십자군(1096년)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은자 피에르를 이용하여 전쟁을 선동합니다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 ~1098)는 중세 유럽의 광신도로 은둔자였습니다 그의 일과는 성 베드로가 꿈에 나타나 자신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이슬람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헛된 주장을 이용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카톨릭신자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군사행동을 호소하며 전쟁에 참가하는 신자들에게는 전대사를 주겠다고 반포하였습니다 전대사(戰大赦, Indulgentia)란 "은혜", "관대한 용서"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죄로 인한 벌을 탕감하는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카톨릭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당대의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 등 여러 영웅들이 성지를 회복하려 전선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앞서 은자(隱者) 피에르(Pierre l'Ermite)가 기사 레이날도, 걸인 월터와 함께 일반 민중들을 모아 십자군보다 먼저 출발하였는데 이들을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도 모른 채 무조건 나아갔으며, 독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베오그라드에서 약탈을 일삼는 등 가는 곳 마다 약탈을 자행하였으나, 헝가리 왕국 기병대의 반격으로 대패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군중십자군은 동로마제국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다시 셀주크투르크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다시 약탈을 일삼다 셀주크 투르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전멸당하면서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피에르는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도주하였습니다
②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
이슬람의 통치자들은 양대 파벌로 인하여 분열이 심각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십자군에 대한 대대적인 승리로 인하여 그들의 사기는 진작되어 있었습니다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을 지휘군으로 하는 십자군은 1096년, 콘스탄티노플을 접수하고 1097년, 니케아를 공격하여 단시일내에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게릴라전으로 전열을 갖춘 이슬람에 의해 안디옥전쟁은 8개월이 걸려서야 달성되었습니다 십여년의 영토확장으로 1099년,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은 많은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만행으로 유명하여졌습니다 그로 인하여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중동지역에 예루살렘 왕국 등 4개의 십자군 국가가 건설되었습니다
③ 제2차 십자군 원정(1147~1148년)
중동지역은 대도시에 거주하는 기독교인과 군소도시에서 거주하는 무슬림이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슬람의 영웅 이마드 앗 딘 장기가 나타나 에데사 백국을 점령함으로서 제 2차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황 유게니우스 3세(Eugenius3)의 호소에 대하여 당시 명성높은 설교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St. Bernard of Clairuaux)는 교황의 부탁을 받고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7)와 독일의 콘라드 3세(Conrad3)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결성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원화된 수직적 통제가 되지 않았고 전과를 이룩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 등지에서 패배하였습니다
④ 제3차 십자군 원정(1189~1192년)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Saladin)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호소하였습니다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Richard1),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 2세(Philip augustus2),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드릭 1세(Frederick Barbarossa) 등 3국 연합으로 제 3차 십자군을 조직하였습니다 1190년, 원정 도중 신성로마제국 프레드릭 1세가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3국은 각국의 이익 추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존엄왕 필립 2세는 자국내 잉글랜드 영토를 탈환할 목적으로 1191년 아크레를 접수한 후 귀국을 단행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 3차 십자군 원정은 "리처드 1세의 십자군"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리처드 1세는 이슬람의 살라딘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기독교인의 예루살렘의 방문에 대하여 통행 자유화하는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⑤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년)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3)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의 점령자인 이슬람 본토 이집트공략을 목표로 제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중해로 가는 수송자금이 부족하여 부족분 공급을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헝가리왕국을 공략하였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동일한 기독교국가를 공격한 사유로 베네치아를 파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플랑드르(Flanders) 백작 볼드윈(Balwin)이 황제가 되어 라틴제국을 건국하였습니다 교황청은 파문하였던 라틴제국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예루살렘 원정을 요청하였으나 이집트정복은 물론 아무것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멸망한 비잔티움제국의 황족들은 제국령 각지에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소수민족으로서의 자치권을 유지하였습니다
⑥ 알비 십자군(1208년)
12,13세기경 프랑스의 남부지역 알비와 트루즈를 중심으로 알비(알비주아파)라는 영지주의 교파가 새롭게 창설되었습니다 이 들은 세속의 일은 사악하고 인간의 영혼만이 선(善)이라고 보는 신학적 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08년 로마 교황청은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알비파 토벌을 위한 알비십자군을 일으켰으며 1350년 알비파는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⑦ 어린이 십자군(1212년)
1212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계시를 받은 목동 "스데반"과 소녀 "니콜라스"의 선동에 의해 소년, 소녀 3만여명을 조직한 것으로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지중해까지 행진하였으나 일부는 난파로 죽고, 일부는 상인들의 농간으로 북아프리카지역의 노예로 팔려가는 등 악순환을 거듭하였습니다
⑧ 제5차 십자군 원정(1218~1221년)
예루살렘 왕국의 후신인 아크레 왕국의 장 드 브리엔느가 이슬람의 본토인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 때에 동방에서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 프레스터 존이 군대를 인솔하여 십자군을 지원하러 온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그 정체가 훗날 유럽의 전국토를 점령할 몽골제국의 징기즈칸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⑨ 제6차 십자군 원정(1228~1229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십자군 원정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임명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지속적으로 원정을 재촉하였지만 그가 계속하여 미루자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습니다 그러자 1228년 파문된 상태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출정을 하였습니다 때 마침 이집트 이이유브왕조의 술탄 알카밀이 내란을 겪고 있는 터에 전쟁할 여건이 되지 않자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았습니다 그러나 1239년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 맘루크 왕조가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면서 평화조약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1239년과 1240년에 프랑스가 원정에 나섰지만 전쟁을 하지도 못한 채 귀환을 거듭하였습니다
⑩ 제7차 십자군 원정(1248~1249년)
알카밀의 사후 1244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공격으로 인하여 2,000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학살당하고 지역은 함락되었습니다 1248년, 제7차 십자군 원정을 일으킨 프랑스의 성왕 루이가 원정을 시작하여 1249년 다미에타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아이유브왕조의 살라딘 2세에 의해 실패하고 1250년, 루이가 포로됨으로서 십자군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⑪ 제8차 십자군 원정(1270년)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동생인 시칠리아왕 샤를과 함께 출병하여 이집트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1270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사망하고 동생인 샤를은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1세와 협공으로 십자군 원정을 계속하였으나 성과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를 점령하고 1291년, 팔레스타인 아크레를 점령하여 십자군을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2) 십자군 원정의 교훈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첫째, 이슬람의 단결이 원인이었습니다 초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이슬람의 분열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후 장기와 살리딘과 같은 이슬람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이슬람은 단결하였고 이슬람의 정복지역에서 그들은 십자군과 달리 관용정책으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둘째, 십자군의 와해와 내분이 원인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상호간, 내부권력간, 참가 국가간, 대립과 이익분할등의 마찰로 일치단결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셋째, 무지와 광신, 편협성과 포악성, 약탈과 학살정책의 횡포는 대중성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또한 비잔티움제국에서 십자군은 동방정교회 성도들을 학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고착화는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한 편, ①십자군 원정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각국의 군왕들이 로마교황의 권위 아래 복종하였고 교황의 칙서에 순종하여 출정하였습니다 많은 전쟁으로 인하여 교황청은 군인들의 많은 재산과 토지를 인수하였고 교황청의 재정은 굳건해져 갔습니다 또한 ②민족과 국가의 단결로 기독교형제국이라는 인식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③봉건제도가 쇠퇴하고 중산층과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힘의 권력구도가 영주에서 군주로 이전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④해양을 중심으로 하는 무역과 유통업을 발전시켰고 지중해 연안의 도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⑤이슬람과의 잦은 접촉으로 교류가 촉진되었고 스콜라신학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