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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4장10~23절
제목 : 자족의 능력과 비결
바울은 자신의 감옥생활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빌립보 교회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과 성도들에게 은혜를 비는 축도로 편지를 마무리 합니다.
1. 바울의 간증(10~14절).
1) 바울은 크게 기뻐하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10절).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정중하고 고상하게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선물에 대해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 바울에 대한 빌립보 성도들의 물질적 봉사가 한동안 끊어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제'로 번역된 헬라어 '에데포테'('마침내')는 얼마동안 단절되었던 교제가 다시 연결됨을 가리킵니다.
'다시 싹이 남이니'는 '다시 꽃이 피다', '소생시키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원래 겨울잠을 자던 나무가 봄을 맞아 싹이 나며 꽃이 피는 것을 비유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① 너희가 나의 관심에 신경 쓸 만큼 다시 번창하였다.
② 너희의 나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새롭게 생겨났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상호 보충적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항상 바울 사도를 돕고자 하는 사려 깊은 마음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적절한 기회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여건이 마련되었으므로 그들은 바울을 돕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2) 늘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는 것을 고백합니다(11절).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바울은 비록 자신이 곤경 가운데 처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주된 관심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는 문자적으로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곤경에 처한 그의 궁핍한 생활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체념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덧입고 있었으므로,
외적 여건에 초연하여 자족(自足)할 수 있었습니다.
'자족'은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으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윤리적인 용어였습니다.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여겨 그 가운데서 만족하기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의 생활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의 자족의 비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1:21).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3)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십니다(12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모든 일'은 특수한 상황과 평상적인 모든 상황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 가운데서 살아 계셔서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함으로써 복음 사역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비결을 배웠노라'는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서만 사용된 단어로 '비밀을 전수받다'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의 생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자족할 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비밀로 가르쳐 주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시 25:14).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4)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13절).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권위 있는 사본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딤전 1:12)라는 바울의 고백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임을 믿고 있었고 이것은 그의 철저한 신앙 고백이며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관계 안에서,
모든 형편에서 자족하게 되고 이길 힘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이며 참된 능력의 원천입니다.
2. 바울의 풍요한 삶(14~20절)
문화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사람이 풍요에 이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계속 생산을 높여 많이 소유하려는 삶과
욕구를 최소화해 적은 물질로도 만족하는 방법을 찾는 삶입니다.
바울의 풍요한 삶은 무엇입니까?
1) 함께 참여 할 때 풍요한 삶이 이루어집니다(14절).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여기서 “그러나”는 나는 사실은 괴로움 중에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괴로움을 빌립보 성도들이 함께 참여함으로 마음이 풍요롭다는 것입니다.
흡족하다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옥중에 수금된 바울을 물질적으로 봉사한 것은,
그의 고난에 동참한 것과 같은 고귀한 일이라고 바울은 여기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동참하는 것은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함께 참여”하였다는 것은 고난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롬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주고받을 때(협력할 때) 풍요의 삶이 됩니다(15절).
“[15]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 대해 관용하였던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들이 초기에 보여주었던 사랑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도 알거니와'라는 말은 '너희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언급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받은 도움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다는 것과 더불어 그가 빌립보 교회에서 받은 물질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휠씬 크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편 '복음의 시초'란 본 서신을 기록할 때부터 약 10년 전(행 16장)빌립보에서 복음 사역의 일을 마친 후 마게도냐를 떠날 때를 가리킵니다(살후 2:13).
바울은 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상업적 용어인 '주고 받는 일'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의 선교 비용을 충당(充當)하는 것이 마땅한 일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울은 신령한 은혜를 전해주고, 교인들은 물질로써 그에게 갚아주는 일을 가리킵니다. (고전 9:11).
*고전9:11“[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이것은 바울을 도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 외에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고후 11:8).
여러 교회가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으나 처음에는 다른 교회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빌립보 교회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빌립보 교회 외에는 아무 교회도 그에게 물질적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함께 참예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될 것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성도가 어려울 때, 모든 성도가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3) 섬김의 삶이 풍요의 삶을 이룹니다(16~17절).
“[16]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17]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 사역을 할 때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손수 노동을 하였습니다(살전 2:9;살후 3:7,8).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기 위하여 여러 번 그에게 쓸 것을 보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신은 단 시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오래 전 부터 계속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13:1절에서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을 했으면 내일도 역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왜 사람들이 쉽게 변하는가?
그것은 주님을 위한 일에도 인간적인 이해타산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절개가 아쉬운 때입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에 의해 내려질지도 모르는 잘못된 결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바울이 더 많은 선물을 바라고 있다는 그들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표현은 그의 관심의 대상이 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물을 보낸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 열매에 있음을 밝히려고 한 것입니다.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기독신자가 물질로써 남을 도와주면,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행20:35절입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의 진정한 관심의 대상은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열매에 있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이 바울을 위해 사랑의 헌금을 한 것은 결국 하늘의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들이 훗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댓가를 30,60,100배로 하나님에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6:19-21에서“[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위해서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를 위해 드릴 것을 권유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불합리한 방법으로 권유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꺼리고 있지만, 내가 권유를 받고 주안에서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록펠러]- 첫 사업에 5$을 벌었습니다. - 5센트를 십일조을 드렸습니다.
[윌리엄 골게이트]-풍요의식을 품었습니다. 시골을 떠나 뉴욕으로 갔습니다.
배에서 어른을 만났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권유 받았습니다.
어느 비누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십일조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우시고, 높여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그 비누공장에 주인이 되었습니다.
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주를 위해 드릴 것을 꿈꾸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이 자원하여 하므로 그것을 막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몫이 하늘에 더욱 많이 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풍요의 삶을 누리립니다(18절).
“[18]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바울이 물질적으로 풍족하면 얼마나 풍족했겠습니가?
오늘날처럼 은행체제가 잘 되 있고 온라인구조가 돼 있어서 부산에서 부치면 바로 서울에서 찾을 수 있는 시대라면야 척척 부쳐주고 척척 찾아쓰겠지만, 수만리 떨어져 있고 거기에다 인편으로 조금 보냈다면 부족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있고 풍족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 때문에 풍족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사랑이 마음속에 있으면 배고파도 좋고, 아파도 좋고, 가난해도 좋고,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좋습니다. 마음이 풍요로워 집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린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해서 행하는 봉사와 헌신,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은 선물을 보내준 빌립보 성도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감사의 태도로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제물'(오스멘유오디아스)은 구약의 제사 의식을 반영하는 표현으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엡 5;2).
또한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헌신적(獻身的)인 삶을 상징합니다(롬 12:1).
우리도 항상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에 마음이 풍요로워 집니다.
5)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풍요의 삶을 이룹니다(19~20절).
“[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빌립보 성도들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은 그들이 풍족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부족한 형편 가운데서도 바울이 사역을 물질로 도와주었음을 암시해줍니다.
또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 물질을 많이 드린 빌립보교회에 많이 갚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고후9:6)
*고후9:6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자신의 모든 물질적 필요를 채우셨던 것처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의 신실성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적 관계를 유지할 때 주어집니다(고후 8:9).
*고후8: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교인들의 물질적 선물에 대한 바울의 신령한 축복입니다.
감옥 안에서 조차 극진히 돌봐주신 하나님이 빌립보교인들에게 당연히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시리라는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안에 거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가난하여도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훗날 딤후 4:17에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여러분도 주님을 기뻐하고 주를 위해 살고 있을 때,
이와 같은 도우심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주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이든 풍성하셔서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십니다.
주님을 위한 거룩한 욕망을 품고 살자.
그러면 주님은 없는 중에서도 우리가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을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없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전환시킬 때,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인가?
바울은 19절 서두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나의 주님.
딤전6:11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했습니다.
『오직』이란 표현은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항상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말라
우리를 유일한 존재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풍족하게 채워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서신을 마루리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20]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한편 본절의 끝에 나오는 '아멘'은 히브리어 '아멘'의 음역으로 '확증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찬양의 종결에서 종종 사용되었으며(대상 16:36; 느8:6),
찬양의 내용에 동의함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고전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기쁜일이나 슬픈일이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쁠 때 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울 때도 이렇게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이 어려운 상황과 그로인한 고통마저도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적 방법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항상 의지하고 맡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세무궁토록!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입니다.
세세무궁토록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2. 끝 인사(21~23절)
1) 성도에게와 형제들이 문안(21절).
“[2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바울은 편지를 먼저 받아 볼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 교회 성도들 각각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본절의 문안 인사는 당시의 보편적인 편지 형식에서 빌려온 것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를 확인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 이들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1:1;2:19-30), 그리고 1:14에 언급된 사람들 중의 일부일 것입니다.
2)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22절).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이것은 황제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황제 가문과 관련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혹자는 바울이 수년 동안 로마감옥 생활을 하던 중 접촉하여 알게 된 황제 집안의 관리들과 노예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바울과의 교제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많은 사람들 중의 일부일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본 서신 서두의 언급(1:13)으로 보아 이들은 시위대에 속한 자들 중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별히 이들을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의 복음이 악명 높은 로마 황제 네로의 궁전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절)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보호하심이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본문은 갈 6:18; 몬1:25과 매우 비슷합니다.
*갈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몬1: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
바울은 서신을 맺으면서 그의 모든 서신의 주제이며 그의 삶 가운데 충만히 거하였던 주의 은혜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넘쳐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기의 간증을 합니다.
그것은 자기는 항상 기뻐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족하였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고,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요로운 삶의 비결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함께 참여 할 때, 주고받을 때(협력할 때), 섬김의 삶을 통하여,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처럼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풍요로운 삶의 비결을 배워 살므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어떤 환경에서도 함께 하십니다(11~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결코 자기최면이나 자기과시가 아니라, 부요할 때든, 빈궁할 때든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능력”이나 바뀐 “환경”이 아니라, 모든 상황 속에서 바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혹시 나는 함께하시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축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진 않습니까?
2) 성도들의 필요를 아시고 풍성히 채워주십니다(16~20절).
빌립보 교회가 주님의 심정으로 바울의 필요를 채웠듯이,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성도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자기 몫을 내어 섬기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고후9:7~9).
돕는 이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l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기쁨으로 섬길 이는 누구입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지속적인 도움과 후원은 받는 이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10,14~16절).
다른 교회들이 엄두도 내지 못한 바울의 선교사역을 처음부터 지원한 빌립보 교회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사역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가장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을 때 다시 지원을 재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모두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요즘, 나보다 더 연약한 형제를 섬기는 일에 좀 더 열심을 냅시다.
작은 것이라도 끊임없는 섬김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합시다.
2)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21~23절).
비록 직접 만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애틋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혹시 오랬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한 지체가 있다면 미루지 말고 먼저 연락해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