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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복음전도설교집-서철원
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막 1:1-8
p.14.
바로 여기에 세례 요한의 위대함이 있읍니다. 자기는 그 선지자가 아니요 그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이고, 단지 광야의 외치는 소리일 뿐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의 세례가 새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 곧 복음의 시작을 준비한 것에 불과함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가름점입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일뿐 아니라, 신약의 전령사입니다.
2. 회개의 세례
막1:1-4-5.
p.26.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를 배척한 유대인들에게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시 글자대로 응하여졌습니다. 디도장군을 수행한 유대인 사가 요세푸스가 예루살렘이, 그 화려한 헤롯 성전이, 당시 로마 천하에 불가사의로 알려진 성전이 불에 타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게 되고, 백만 이상이나 되는 예루살렘 성내 인구가 몰살당할 때 그대로 응하였음을 기술하였습니다.
3. 능력 많으신 이의 오심.
막1:4-8.
p.36.
세례 요한의 신분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이스라엘에서는 존귀한 가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왕이 없는 이스라엘에 제사장은 백성 위에 최고의 직분이었습니다. 바로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백성의 죄를 성소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 앞에 속죄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또 그런 제사장이어서 온 백성의 존경과 높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와 그의 아내는 백성 중에서 흠없이 하나님의 율법 계명을 지켜 실로 보통 사람이 이를 수 없는 높은 도덕적 경지와 거룩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그가 출생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두분 부모의 오랜 기도와 간구의 응답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인간의 자연적인 출생 과정을 따라 출생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큰 호의 때문에 출생한 제사장 가문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것만도 실로 자기를 심히 높게 여길 근거가 되어 요사이 말로 하면 실로 Pride가 높을만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 세례 요한의 출생의 기록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태아로 성장하였고 출생 후에도 포도주나 소주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구약 나실인의 성결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약속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구약 나실인의 성결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나기도 전부터 주 앞에 큰 자로 지목되었고, 제 2 엘리야로 이름 받았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는 엄청난 일의 수행이었습니다. 이 일이 다 그의 백성을 위하여 광야에서 자라며 예비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누가 출생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아 잉태되고 이런 약속과 사명을 위하여 출생하도록 예비된 자가 있습니까? 이런 세례 요한이 요단 강변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소리를 높여 선지자의 말씀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온 백성이 (p.37)압도되어 그에게 나아와 부끄러운 죄를 자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단지 백성들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제사장들도 그 앞에 큰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래 그에게 나아가 그가 구약이 예언하고 약속한 메시야인가 싶어 실상을 물었습니다.
온 백성들도 만나는 자마다 모이는 곳마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인기가 충천하였습니다. 이 위엄한 선지자 앞에 백성들은 오시마고 한 메시야가 바로 이 사람이겠지,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할 때 혹시 백성이 미혹될까 봐 주저 없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한 무명의 인가에게로 돌렸습니다. 온 백성의 주의와 시선을 자기에게서 딴 사람에게로 돌리고 자기는 그이 앞에 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
막1:9-11
p.40.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세례 요한이 증거할 때 그 증거를 들은 백성들은 그 증거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단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더욱 분명하고 똑똑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이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세상 죄를 감당하기 위하여 오심을 분명히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이, 육체안에 오신 하나님, 성령으로 세례주는 자이실 뿐 아니라, 그 전능하신 이가 세상 죄를, 백성의 죄를, 내 죄를 위하여 죽을 하나님의 어린 양임을 알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구속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이가 속죄 제물로 죽을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예비된 어린 양이며, 죄 때문에 죽을 힘없는 어린 양입니다.
이 세례 요한의 증거는 성경 마지막 책에서 잘 조화되었습니다. 그는 실로 힘없이 죽은 어린 양이었을뿐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전능하신 왕임을 사도 요한은 잘 기술하고 있습니다.
요단강변에서 증거한 세례 요한의 증거의 예언은 백성들의 귓가에로 (p.41)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골고다에서 성취되고,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큰 증거를 한 세례 요한은 구약 선지자 중 가장 큰 선지자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갈릴리에서 오신 이가 전능하신 이임을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주시는 자임을 말로만 증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말에 그 증거를 친히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만을 받았지만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세례를 받음에 성립하였습니다. 모든 백성이 한결같이 세례자에게 물세례만을 받고 죄를 회개하였을 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성령으로 세례 받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 받음으로 성령으로 세례 주는 전능자라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확증하였습니다. 요한은 물세례만을 주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백성 앞에 나타나게 하였으나,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세례주는 이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간 교회에서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으로 고백되고 신앙되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 곧 육체안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받은 사건은 그의 참 사람이신 면에서 이해되고 고찰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히 영원한 참 하나님으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가 마리아의 몸에서 우리의 육을 취하실 때 우리의 육을 (p.42) 하나의 부족한 점도 없이 다 취하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가 취하신 인성은 우리와 완전히 동일한 육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변이되신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으로 참 사람의 몸을 입으십니다. 참 하나님으로 그는 아버지와 영원히 동등이시오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와 동등하시며,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 몸을 입으신 한 그의 인생에서 그는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와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심에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셔야 할 근거가 성립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세례 받지 않으시지만, 사람으로서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은 그의 메시야 사역 수행을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시므로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전혀 죄도 없으신 이로 나시게 되었지만, 성령으로 세례 받음은 그의 메시야 사역, 곧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죄를 속하는 제물의 사명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 받으심은 그를 온갖 죄와 악의 공격에서 온갖 유혹에서, 사탄의 공격에서 그를 방어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흠없는 완전한 어린 양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신 두 번째 큰 진리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으로 세례 받으신 사건의 의미와 진리를 여기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으신 사건의 세 번째 의미와 진리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인류에게 더 큰 의미와 진리, 그리고 축복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사람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사람, 둘째 아담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여기에 첫 사람, 첫 아담과의 좋은 대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첫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것에 실패한 모든 면에서 성공하였습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데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살았습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께 자의적이고 (p.43)전적인 순종에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데 성공하여,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의 순종은 첫 아담의 불순종을 완전히 속량하였습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은 전 인류를 타락하여 멸망케 하였으나 둘째 아담의 완전한 순종은 인류를 명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므로 새 인류를 창조하여, 새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둘째 아담은 첫 아담이 실패한 모든 면에 성공하였습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데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살았습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께 전적인 (p.43)순종에 실패하였으나, 둘째 아담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데 성공하여,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의 순종은 첫 아담의 불순종을 완전히 속량하였습니다. 첫 아담의 불순종은 전 인류를 타락하여 멸망케 하였으나 둘째 아담의 완전한 순종은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므로 새 인류를 창조하여, 새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둘째 아담은 첫 아담이 실패한 모든 면에 성공하였습니다.
우리는 두 아담간의 평행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도 성령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둘째 아담도 성령으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둘째 아담은 성령으로 잉태되시므로 성령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후 자기의 영을 인류와 함께 두심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그 후손들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살므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첫 아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기에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일에 실패하므로 아담은 성령의 충만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성령으로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성령의 충만에 이르렀습니다. 이 진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건으로 표상된 것입니다. 둘째 아담은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바쳐 드리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의 순종은 완전하여, 첫 아담의 불순종을 속량하여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순종,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됨은 그의 성령의 충만의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의 성령 충만은 둘째 아담 그로 하여금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데 성공케 하였습니다. 첫 아담은 성령 충만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둘째 아담은 성령 충만에 이르렀고, 성령 충만을 유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한 성령 충만은 조금의 손실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충만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첫 아담이 실패한 모든 일에 둘째 아담은 완전히 성공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의 성공은 새 인류, 구속된 인류를 창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째 아담이 받은 성령 충만과 충만 유지는 둘째 아담 자신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성령 충만은 그에게 붙어 새 인류가 된 모든 자녀들의 몫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성령 충만은 우리가 받을 성령 충만의 보증이요, (p.44)보장이며, 그 원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충만히 거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원천으로 하여 그에 부착된 모든 자녀들에게 전수되고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이처럼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오는 통로이고, 큰 샘입니다. 흘러 넘치는 샘은 웅덩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시내를 이루어 흘러 내리게 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주로 모신 자에게는 이 풍성한 생수가 흘러 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말씀하기를 "나를 믿는 자는 그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만된 성령은 언제 그의 백성들에게로 흘러 넘쳐 충만해졌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순절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로 성령을 획득하여 자기의 백성들에게 충만히 임하게 하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절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만해진 성령은 그의 백성들에게로 충만하게 부어졌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모신 자에게는 충만한 성령이 흘러 넘치게 돼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성령 세례와 충만은 우리가 받을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예표이고 근거이며, 보장입니다.
지금도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육체는 성령의 충만이 우리에게로 오는 원천이고 통로입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의 육체는 하나님 앞에 속죄의 희생의 제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 곧 성령 충만이 우리에게 오는 원천이고 유일한 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도 우리 위해 받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충만도 우리 위해 받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충만 유지도 우리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럼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이 이루어질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순절 교회의 오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믿고, 내 구주로 믿으며, 믿음으로 그에게 나아가는 것이 그 첫길입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면 우리는 성령 충만, 성령 세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성령 세례에로의 길입니다. 지금껏 설명되고 선포된 진리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둘째는 죄를 고백하고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도 집착하는 죄와, 연연하는 악에 매여 있어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이를 수 없습니다. (p.45)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피고 내가 어떤 죄에 어떤 인간적 연약에 매여 있는지를 살피고 이 죄와 악을 고백하고 내버려야 합니다. 이 내가 즐기는 죄와 악을 내어버림은 주께 순종의 결심과 직결됩니다. 내가 주께 나를 내어 맡기고 순종하기로 결심하며, 내 의지를 주께 바칠 때에만 주님이 내 주님이 되시고, 내게 하나님이 되십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의 집착, 내 육체의 향락을 고집하면서 성령 세례 받기 위해서 백날을 백년을 기도해도 성령 충만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 내 가장 큰 강점이자 가장 큰 약점인 죄악, 혹은 나를 얽어매는 족쇄를 주를 믿음으로 내어놓고 주께 헌신하여 그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성령 충만을 위해서 이 큰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무작정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음, 죄의 회개, 순종의 결심이 성령으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살기 원하면, 믿음과 회개, 순종의 결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외에는 결코 기적은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과 회개, 순종의 결심이 기적을 이룰 것입니다. 말씀의 길을 떠나 인간적 상상과 노력으로 성령은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에만이 성령이 오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 과거의 안일한 생활의 계속이 아니라, 순종의 결심으로 성령의 지배아래 사는 은혜의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아멘.
5. 시험을 이기신 그리스도
막1:12-13
p.48.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 또 둘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둘째 아담으로 시험을 받으사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므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즉 첫 사람과 둘째 사람간의 평행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과 맺은 언약의 실패를 둘째 사람을 통해 완성하심으로 세상을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p.49)그러기에 첫 아담이 받은 시험의 과정과 마지막 아담이 받은 시험 과정간에 많은 유사점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첫 아담도 동물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아담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며, 동물들과 벗하며 지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광야에서 동물과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첫 시험도 육체적 요구에 관련된 빵의 시험이었는데, 아담이 받은 시험도 육체적 요구에 관련된 선악과를 ꃨ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담은 시험을 받기 전에 그의 창조주로부터 그에게서 나올 전 인류의 머리로 언약을 체결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그에게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인류의 구속주로 즉 메시야로, 교회의 머리로, 새인류의 머리로 공식 선포받았습니다. 아담이 받은 선악과 시험의 경우도 단지 먹는 문제만이 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험은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욕망 곧 명예와 권세욕에 관련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시험자는 또 아담을 시험했던 동일한 시험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아담은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므로 그는 언약의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새 인류의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아담의 실패를 보상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를 제 2 아담으로 새 인류의 머리로 세움 받게 하였습니다. 둘째 아담은 아담처럼 창조주에게서의 순종대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의 길이 아니라 순종의 길을 걸으므로 시험에 승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에의 승리는 그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인류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신 두 번째 이유와 동기는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처럼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시다고 하였습니다.
7. 임마누엘
요일1:1-4.
p.69.
아인슈타인 하면 20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천재인데, 그가 독일의 나치 정권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명문 대학인 프린스톤 대학의 고등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였습니다.
이 예화는 이때에 생겼습니다. 그가 자기의 연구실에 앉아 붓을 들고 한참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한 마리의 작은 벌레가 날아와 그의 종이 위에 앉았다가 걸어가기 시작하자, 안경을 벗고 어린애 같이 신기한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 벌레를 응시하던 백발이 성성한 노학자는 조용히 펜을 놓으며 감탄하기를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물리학 지식을 총동원한다 하더라도 이 조그마한 벌레의 신비를 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11. 부활의 복음
롬1:3-4; 4:25-5:21
p.106.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다스렸던 사람 주의 하나인 알렉산더 대제도 죽음 앞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원정 중 대제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씨름판을 벌였습니다. 한 병사가 (p.107)씨름판의 장수들을 하나씩 둘씩 다 넘어뜨렸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그와 맞수가 되어 싸울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씨름판을 끝까지 관전하던 30대 초반의 젊은 대제가 그 병사와 맞수가 되어 싸우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눈이 대왕의 거동에 집중되었습니다. 대왕이 혹 이길까 아니면 병사가 이번에도 이길까 하면서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씨름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이번마저도 대왕이 벌떡 모래판에 나가 떨어져 누워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깜짝 놀라 손에 땀을 쥐고 대왕의 다음 거동을 지켜봤습니다.
대왕은 모래밭에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다 그가 일어날 것을 기다렸지만 대왕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대왕을 넘어뜨린 병사는 겁이 났고 죄를 지은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전 세계를 다 정복하여 가는 곳마다 패전을 알지 못했던 대왕이 일개 병사와의 씨름에서 졌다고 울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참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는 땅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씨름에 져서 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고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세의 영웅의 눈에 모래판에 넘어지면서 죽음이 보여 눈물을 흘리게 된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그후 곧 사람의 그 길(죽음)로 갔고, 사람 취급받지 못하여 개에게 핥인 거지 나사로도 사람의 그 길로 갔습니다. 누가 이 길을 면하고 피하는 길을 낼 수 있었겠습니까?
22. 교회의 봉사자들의 책무(장로와 집사 임직식 및 권사 취임식 설교)
엡4:11-16
p.195.
장로는 교회에서 치리권을 행사한다고 우리 교회 헌법이 정해 놓았는데 그 치리권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듯 유교전통에서 하는 치리권의 행사가 아니고, 또 구약교회에서 장로들이 행사했던 치리권이 아니라 신약의 장로로서 치리권 곧 말씀선포를 받은 교회가 그 말씀대로 살며 지키며 행하는 지를 보살피고 그렇게 살도록 권고하는 은혜의 사역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의 통치를 하시듯 신약교회 특히 종교개혁 이후 교회의 장로는 은혜의 봉사를 하는 치리권을 행사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는 장로됨이 자기의 사회적 지위의 확보이어서, 유고의 장로 자리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차지하듯 많은 수고와 투자 후에 획득한 자리여서 은혜의 봉사보다는 권세를 행사하여 사람들 위에 지배를 베풀므로 쾌감과 자기만족을 만끽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교회 장로제에 전적으로 배치되는 치리권입니다. 특히 종교개혁교회 곧 개혁교회의 장로제에 배치됩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지난 500여년에 걸친 유교의 가부장제의 유산 때문에 그 장로제의 운영과 목적에 크게 변질된 형태를 이루어왔습니다. 장로가 영적 권고와 권면, 영적 치리권이 아니라 재력의 다과에 의해 자기의 치리권의 지렛대의 범위를 결정해 왔습니다.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장로제도는 종교개혁으로 이루어진 산물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교회를 개혁할 때 로마교회의 감독제도가 개혁교회의 정치체제에 흡수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적 교회 제도 설립을 위해 장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제도는 구교에서처럼 백성들에게 검과 말씀의 권위를 함께 다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의 존속과 수호를 위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반복하면 목사가 설교한 말씀대로 교회가 살고, 그 말씀을 지키며, 행하는 지를 살피고, 또 그대로 살도록 권고하고 권면하도록 교인들을 심방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러니 장로의 기본되는 임무는 교인들을 심방하는 일입니다. 교인들을 심방하여 그들의 경제적 형편여하를 사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권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장로의 치리권입니다. 그러니 장로의 첫째 임무는 교인들을 심방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이 크게 변하여, 장로는 심방하지 않고 목사가 심방하고 또 목사의 심방이 부족할때는 부교역자들을 채용하여 그들로 심방을 하게 하고 그들의 (p.196)심방의 유효성 여부를 감독하는 것이 장로의 일이 돼버렸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제도와 정반대로 변한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장로는 교인들을 심방하고, 그 심방의 결과를 목사에게 보고하여 목사가 그 영혼의 진보를 위해 재 방문하도록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적 장로제도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장로의 첫째 임무는 교인들을 심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장립 받으시는 장로님들은 이 임무를 잘 수행하실 줄 믿고 또 그렇게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장로의 큰 임무는 심방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장로의 임무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도록 권면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장로들이 이 신령한 권면의 사역은 하지 않고 교회의 주요한 사항들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관이 되도록 당회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니 장로가 되어 당회를 구성하는 것은 큰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 되어서 이 영광스럽고 사람 대접받는 일에만 전심하고 그 본래의 임무는 까맣게 망각해 버렸습니다. 우리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의 장로는 영적 권면을 전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가 살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고하는 일입니다
주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장로를 세우셨으니 장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전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장로를 세우셨습니다. 장로들이 본래 이 사명을 소홀히 하고 저버리는 것은 한낱 장로직분을 소홀히 하고 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세우신 주님을 소홀히 하고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건설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데서 확립되고 확장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확립을 위해서 주님은 장로들을 교회에 세우셨습니다......(p.197)세째로 장로의 임무는 어려움을 당한 성도와 병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장로들은 심방하는 큰 책임에서 어려움 당한 자와 병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기도해 주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배당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은 장로의 뺄 수 없는 임무와 책임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참으로 우리의 위로와 격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로 가는 백성들이 환난을 더 많이 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난을 당한 백성들이 성도들의 신앙의 위로와 격려가 없으면 혹 자기들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지 못하고 징계를 받고 버림받아 그러는가 해서 낙심하게 되고 신앙을 상실하게 됩니다.
30.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갈1:1-10; 2:15-21
p.253.
하나님은 창조에만 단독적이시고 주권적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은혜 베푸심에도 단독적이고 주권적으로 일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구원이 되고 그리하여 그 은혜에 감사와 찬양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의 주권성이 훼손되는 것은 그의 사역에 합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하고 그 영광에 찬양이 따름이 바른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합당한 영광이 다른 자에게 넘어감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홀로 구원을 이루시고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들이 변경하여 인간의 공로와 공적으로 사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기관이라는 교회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구약은 거저일 수가 없고 그에 상응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여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즉 사람들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속박에서의 해방이 종교개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부착합니다. 구원은 은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가르치고 강조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가 살 구원의 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그러므로 Sola gratia(오직 은혜)는 곧 Sola fide입니다. 여기서 Sola Scriptura(오직 성경만을)에 이르는 것은 이 근본 진리가 성경에 표현되었는데 인간의 가르침이 이 진리를 어둡게 하였으므로 다시 성경 곧 하나님 말씀대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p.254) 이 신적 진리를 어둡게 하여 구원을 하나님의 것이 못되게 하고 인간의 것이 되게 한 역사는 로마교회에만 진행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막 성취된 후,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일일 수 없고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 유대교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박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박해 뿐 아니라 새로 탄생한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타락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 현싱이 다른 서신들에 나타나 있지만 갈라디아서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 성령 없는 육의 종교에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가르침에 속아 하나님의 구원에서 떠나 자기 구원에로 돌아서므로 다시 구원이전 상태로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바른 구원에는 늘 변조 시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고 은혜의 기독교를 공로의 기독교로 바꾸어 사람들을 질곡에 몰아 넣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의 종교가 되고, 인간의 종교가 되는 곳에는 구원이 없는 증거가 바로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 살던 갈라디아인들도 성령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성령을 그렇게 강조하였어도 저들에게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없었으니 그들에게도 성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에는 불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등이 가득했습니다. 그 종교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육의 역사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종교개혁 운동을 곧 은혜로의 복귀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폭력으로 대항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살해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선행으로가 아니고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는 말만 나오면 칼날로 무섭게 보복하였습니다. 육이 역사하면 어디서나 그 결과는 동일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로마교회가 영에 속한 종교개혁 교회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육에 속한 이스마엘이 영에 속한 이삭을 모욕하고 핍박한 것과 동일합니다.
종교개혁이 공로의 종교에서 은혜의 종교에로 돌아서므로, 육의 종교에서 영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로의 복귀는 곧 성령에로 돌아섬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가르치고 강조한 교훈입니다. 믿음으로 그저 쉽게 구원얻는다는 정도의 가르침이 아니고 성령으로 (p.255)산다는 진리에로의 복귀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성령 회복, 혹은 성령으로 사는 종교에로 복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이스마엘과 이삭의 생활사부터 가르치고 있는 교훈입니다.
은혜의 종교에만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자에게는 성령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허락이 구원의 확실한 증거요 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없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 받음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공로가 들어가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무 노력없이 거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외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이 진리를 루터와 칼빈이 재발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로마교회의 무서운 박해와 살해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에 부착하였습니다. 생명을 다시 찾았는데 어찌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리가 4,5백년 지나니 변질되고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원리 곧 Sola gratia의 원리에 부착하고, 또 그래야 하며, 거기에만 생명이 있고 성령을 주심이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무슨 노력이나 공로가 들어감 없이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곧 은혜일 뿐입니다. 그런데 값없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 값을 잘 모르는 것이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그리고 그 값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범상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참으로 천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경향을 나타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이 보화를 산 사람이 얼마나 많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이 보화를 산 사람이 얼마나 많을런지요? 우리가 이 은혜의 복음을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은 죄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은 진리입니다. 이 보화를 어찌 소홀히 하고 떠내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길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복음입니다. 이 믿음의 길이 세상이 구원받을 진리입니다. 우리가 전파해야 할 복음이 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세상 구원의 경륜이 서 있는 한 이 믿음의 길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은혜로 세상 구원을 이루시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그 작정에는 변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경륜을 바로 알면 구원은 은혜만으로 "Sola gratia"라고 하는 진리에 부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p.256) 이 확신이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내시고 이 은혜의 길을 재발견케 역사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하시는 이에게 영광이 있을찌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