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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의 고향
장요우의 이백 고리 기념관
"침대 앞 달빛이 밝으니, 서리가 내린 듯하구나.
머리를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선(詩仙) 이백(이태백)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시
<정야사>(靜夜思), 중국인이라며 누구나 암송하는 이 시에 등장하는 이백의 고향을 둘러싸고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4곳이 서로 치열한 ‘원조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중국경제주간>이
13일 보도했다. 쓰촨성 장요우, 후베이성 안루, 간쑤성 톈수이, 키르기스스탄의 토크마크가
서로 이백의 고향임을 주장하며 격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0월29일 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대사관 관계자가 안루를 방문해 이백의 고향은
키르기스스탄 토크마크이며, 두 도시가 이백의 문화 유산을 함께 홍보하고
경제적으로 협력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올해 3월에는 간쑤성 출신 학자 레이다가 이백의 고양은 간쑤성 톈수이시에 있다고
주장했고, 현지 주민들의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역사 기록은 이백이 당의 서역 영토였던 안서도호부 수이예청에서 태어나 4살 때 현재의
쓰촨 장여우로 와 자랐으며, 20대에 천하를 주유하며 안루 등에도 머무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장여우와 안루는 ‘이백’을 내세워 관광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어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장여우는 오래 전부터 ‘이백의 고향, 시의 도시’로 홍보하며 이백의 옛집, 이백 기념관 등
이백과 관련된 여행 패키지를 개발해 왔고, 2003년에 ‘이백 고향’으로 상표 등록도 마쳤다.
이백과 관련된 항목에 7억위안 이상을 투자하며 공을 들여 왔다.
이백의 시에서 “안루에 은거해 술을 마시며 10년을 보냈다”는 구절로 등장하는 안루 역시
2002년부터 당시공원, 시비의 숲 등 이백과 관련한 관광산업에 8000만위안이 넘는 돈을 투자했다.
靜夜思
- 李白 >-
床前明月光 침상 앞의 밝은 달의 빛
疑是地上霜 땅 위에 서리가 내린듯하다
擧頭望明月 고개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며
低頭思故鄕 머리숙여 고향을 생각하하다
이 시는이백(李白)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고향인 사천(四川)을 떠나
만리타향을 전전하던 시기에 지은 시이다. 허리에는 십만 관의 거금을 두르고
가슴에는 붕새의 거창한 포부를 안고 큰 세상으로 나갔으나 2년여의 세월을 허송하고,
돈도 건강도 다 잃어버린 젊은 이백이 양주(揚州)의 쓸쓸한 여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쓴 시이다. 이 시는 고향을 그리는 시로 중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평이한 말로 사람들의 가슴에 담겨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진실하게 잘 표현해 내고 있다.
기이한 상상이나 화려한 표현 대신 단순한 구도와 소박한 필치로 고향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감동적으로 그려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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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夜喜雨 - 杜甫 -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 봄이 되니 때 맞추어 내리네
隨風潛入夜 바람 따라 밤에 몰래 스미듯 와서
潤物細無聲 촉촉이 만물을 적시며 가늘게 소리도 없네
野徑雲俱黑 들판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江船火燭明 강 위에 뜬 배의 불만 밝은데
曉看紅濕處 새벽녘 붉게 젖은 곳 보니
花重錦官城 금관성에 꽃들 활짝 피었네
두보초당 杜甫草堂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하나로 “詩聖(시성)"이라 불리는 두보가 성도에 잠시 있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성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평생 정치에 대한 뜻을 두었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던 두보가 759년 겨울,
안사의 난(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정권찬탈을 위해 일으켰던 반란)을 피해
현종(玄宗)을 따라 촉으로 피난을 왔을때, 친한 친구 엄무(嚴武)의 도움으로 서쪽 교외의
경치 아름다운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수 있었다.
피난 이듬 해 봄에 초가집이 완공되자 사람들은 이곳을 성도초당(成都草堂)이라고 불렀다.
또 완화계(浣花溪) 근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완화초당이라고도 한다.
두보는 이 곳에서 4년여 동안 살았는데, 이 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시는
240여 수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복거(卜居), 춘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의 시는
초당에서 지내던 그의 시름없는 한가로운 심경을 읽을 수 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초당은 1500년과 1811년 두 차례의 확장공사로 인해 넓이가 20ha가
조금 넘으며 경내에는 대해(大懈), 시사당(侍史堂), 공부사(工部祠), 사능초당(沙陵草堂)의
석비 등 건축과 다른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시사당과 두보의 소상(塑像)이 있고, 양쪽의 진열실에는 두보의 시집과
연구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만날 날 아득한데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 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가~♪♬.
절절한 그리움이 녹아든 애절하면서도 슬픈 이 노랫말을 누가 지었을까~?
나는 동심초(同心草)의 노랫말을 지은 그 누군가가 무척이나 궁금했었다.
소프라노 조수미의 열창으로 듣고 있노라면, 가슴을 후벼 파는
애틋하고 절절한 그리움이 밀려 와
가끔은 뜻 모를 슬픔에 젖어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여러 번 있었으니~
안타까운 사랑을 모르는 자(者), 어찌 이 노래의 깊은 맛을 알랴......
지금으로부터 1200년 전 당나라 장안에 황진이처럼 글재주가 뛰어난 설도라는 기생이 있었다.
설도가 만년에 원진이라는 시인과 만나 사랑에 빠졌었으나, 젊은 그 시인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 사랑의 징표로 나누어 가졌었으나, 두 사람의 사랑을 시기한 사람
때문에 설도는 그 벼루를 개울에 빠뜨려 잊어버리고 말았다.
설도가 원진을 그리워하며 지은 이 춘망사(春望詞)는 소월의 스승인 김억이 번역하여,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의 가사가 되었다.
설도(薛濤) : 중국 당나라의 시인(?770~830). 자는 홍도(洪度)ㆍ홍도(弘度). 청두(成都)에서
가기(歌妓)가 되었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원진(元稹), 백거이 등 당대의 시인과 교제하였다.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 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 770 - 832)가 있다.
설도의 자는 홍도(洪度) 어렸을적 부터 시, 문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그녀의 생몰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설도기념관. 중국 四川省 成都 望江公園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韋皐(위고)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대신 妓生(기생)을 校書(교서)라고 우아한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들은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라고 전해온다.
인생의 幸不幸(행불행)은 사소한 계기에 달려 있다. 만일 薛濤(설도)가 젊은 날에
韋皐(위고)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무리 詩才(시재)가 있어도 시를 지을 수 있는
시골의 한 기생으로 일생을 끝냈을 것이다.
薛濤(설도)는 이러한 위고의 총애로 18세에서 38세 까지의 젊은 나이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수 있게되었다.
그러면 그 이후의 薛濤(설도)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녀는 머리도 몹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당대의 사람들은 백지(白紙)에 시를 써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색깔있는 시전(詩箋-시 한 수나 간단한 사연을 쓰는 폭이 좁은 종이)이
성행했는데 설도는 완화계의 자신의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늘 살펴보고 연구하고는,
꽃물을 넣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색종이를 만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사람들에게 보내곤
하였는데,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몹시 청신하면서도 아름다워 설도전이라고 이름짓고
다투어 수장하려고 하여 몹시 귀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황실에서도 사들이는 진품(珍品)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녀의 짝인 韋皐(위고)를 잃은 뒤,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서
부득이 시작한 일인지도 모른다.
<설도 편지 설도전 (薛濤箋)>
그 이후, 薛濤(설도) 앞에 또 하나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宮中(궁중)에서 후대 받는 젊은 시인 元稹(원진)이었다.
元稹(원진)은 설도의 詩才(시재)를 좋아해서 31세인 그가 41세인 薛濤(설도)를
그의 任地(임지)로 불러 풍류를 즐겼고 문학사상 불굴의 명작을 서로 지어서 남겼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설도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고 한다.
<설도가 원진을 향해 무언가를 써 보내는 듯 보이는 그림.
설도 기념관 내부 벽면에 그려져 있다>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원진은 원래,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혼약을 정했으나 배신을 한 바가 있었다고 한다. 원진은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출세한
인물인데 그러고도 설도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설도는 원진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국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太和(태화) 5년(832) 64세의 나이로 그 생의 막을 내렸다.
그런데 깊은 인연은 같은 해 元稹(원진)도 또한 황천길을 갔던 것이다.
薛濤(설도)의 시를 모았다는 錦江集(금강집)에는 500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明나라 초에 이미 亡佚(망일)하고 현존하는 것은 겨우 90여수 밖에 없다고 한다.
<설도가 종이를 만들 때 길어 사용하였던 우물 (薛濤井)>
청(淸)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 가면,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이 있으며 그녀의 시(詩)에 자주나오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
<설도의 조각상과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로 장식하였다>
<설도와 원진의 편지소개>
설도는 나이 40에 10년 연하의 유부남인 원진을 사랑했고, 원진은 많은 여인과 염문을 벌인
바람둥이였지만 시와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설도가 보낸 편지에 그가 설도에게 보낸 답장입니다.
<원진이 설도에게 보낸 답장>
시에 나오는 탁문군은 과부가 되어 집에 머무르다, 사마상여라는 사람에게 한 눈에 반해
남자를 따라 집을 뛰쳐나간 당찬 여인으로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도 여인입니다.
鴛鴦草 (원앙초) / 薛濤 (설도)
綠英滿香砌, 兩兩鴛鴦小
但娛春日長, 不管秋風早
싱그런 꽃봉오리 향기로운 섬돌에 가득
둘씩 둘씩 어울린 어린 원앙이라.
오직 긴 봄을 즐거워 할 뿐이니
가을 바람이야 무에 걱정할 것 있으랴
寄贈薛濤 (설도에게) / 元鎭 (원진)
錦江滑膩蛾眉秀, 幻出文君與薛濤
言語巧偸鸚鵡舌, 文章分得鳳皇毛
紛紛辭客多停筆, 個個公卿欲夢刀
別後相思隔煙水, 菖蒲花發五雲高
금강의 매끄러움과 아미산의 빼어남이
변하여 탁문군과 설도가 되었구나.
말씨는 앵무새의 혀와 같고
문장은 봉황의 깃털같이 화려하네
시인들 부끄러워 붓을 멈춘 이 많고
공경대부들 꿈속에서라도 그대와
같은 시를 쓰고 싶어하네
헤어져 서로 그리운데 아득한 강 저편이라
창포 꽃 피고 오색 구름 높겠지.
柳絮 (버들강아지)/ 薛濤 (설도)
二月楊花輕復微, 春風搖蕩惹人衣.
他家本是無情物, 一向南飛又北飛.
이월의 버들강아지는 가볍고도 작고
봄 바람에 하늘거리면서 옷깃을 스치네
버들강아지야 무정한 꽃 잎이지만
남쪽으로 날리고 또 북쪽으로 날리네
남으로 북으로 날리는 것은 사랑하는 원진이 다른 여인들과 벌이는 사랑놀이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람피고 다니는 것을 한탄한 것입니다.
설도는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나 이미 그것은 시들어진 꽃이였고,
그 뒤 원진을 만났으나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 못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살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일편단심(一片丹心)
그를 사랑했다 고한다.
春望詞 - 薛濤 -
花開不同賞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欲問相思處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나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이 지는 때에 있다네
攬草結同心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 그리워 타는 마음이 잦아질 때에
春鳥復哀吟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아름다운 기약 아직 아득한데
不結同心人 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那堪花滿枝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煩作兩相思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玉箸垂朝鏡 거울에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春風知不知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 이 시는 아름다운 봄. 님을 그리는 노래인데, 해방 후 김소월의 스승 시인 김 억이
번역하여 가사를 짓고, 작곡가 김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었고,
아직도 애창곡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 색갈부분 )
*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노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부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한갓 되이 풀잎만 맺을려는가 *
<설도를 사랑한 원진의 시 離思 五首 其四>
曾經滄海難為水, 除卻巫山不是雲
증경창해난위수, 제각무산불시운
取次花叢懶回顧, 半緣修道半緣君
취차화총라회고, 반연수도반연군
창해를 보고나선 세상의 강이 대수롭지 않고,
무산을 보고나면 구름이라 할 것이 없네.
아름다운 꽃을 봐도 즐겁지 않는 것은
반은 수도 때문이고 반은 내가 님을 그리기 때문이라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는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또 무엇을 보아도 본 것 같지 않다는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 시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許均)도 설도를 기리는 시 한수를 남겼다>
燈暗芙蓉帳 부용꽃 휘장에 불빛이 희미한데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기 아직 남아 있어라
明年小挑發 명년에도 복사꽃 활짝 피면
誰過薛濤墳 설도의 무덤을 그 누가 찿을건가
三蘇祠
소식(동파)는 사천성 아미산이 있는 미산시에서 났으며, 그 고향에는 아버지 소순. 소식. 소철
3부자가 당.송 팔대가로 문명을 날려, 삼소사를 지어 기념하고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라 하여...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 고문(古文)의 대가 여덟 명을 일컷는 말로.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등 여덜 명을 가리킨다.
바로 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소동파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 그리도 본인 소식(蘇軾)까지 삼부자가 들어있으니
동양 문학사(東洋 文學史)에 이보다 더 빛나는 명문가(名門家)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지금 소개코자 하는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며,
유형지인 황저우 즉 황주(黃州)에서 양쯔 강(揚子江)을 유람하며,
그 옛날 적벽대전(赤壁大戰)을 회상하고
人間 존재(存在)에 대한 깊은 사색을 표현한 글이다.
적벽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대비,그리고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제물철학(齊物哲學: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애송 되고 있는,
소동파의 대표작으로 이름 난 작품이다.
적벽부(赤壁賦) - 蘇軾 -
전 적벽부(前 赤壁賦)와 후 적벽부(後 赤壁賦)로 나뉜다.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죄를 얻어 호북성의 황주(黃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
1082년 가을 (음력 7월)과 겨울 (음력 10월)에 황저우 성(黃州 城) 밖의 적벽에서
배를 타고 노닐면서 지은 작품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라 하고, 동년 10월에 지은 것을 "후(後)적벽부"라 한다.
前 赤壁賦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년 가을 7월 열 엿세날에 나 소동파는 찾아온 손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서 노닐세, 맑은 바람은 천천히 살랑이고, 물결은 잔잔 하더라.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자 ! 이술 한 잔 받으시게, 그대는 시경 동풍장의 달 밝은 시를 읊조리고,
나는 시경의 관저장 사랑의 노래 부르리니, 이윽고 조금 있으니,
동산에 달이 솟아 올라 북두 견우간에 서성일제,
흰 이슬 물안개는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더라.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한 잎의 갈대 같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두어,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네.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於是 飮酒樂甚 毆舷而歌之
바람은 훨훨 나부끼고,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歌曰: 桂棹兮蘭장 擊空明兮溯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로 노를 깎고,
목련가지 다듬어 삿대로 삼아 물에 비친 달을 밀침이여,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쪽에서 바라보네.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餘音요요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蚊 泣孤舟之釐婦. 蘇者 秋然正襟 危坐而問客曰 : 何爲其然也?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게하네.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客曰 :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조조)의 시가 아닌가?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上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孟德:조조)이 주랑(周郞:주유)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於東也 축로千里 旌旗蔽空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시酒臨江 橫삭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미鹿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고 있네.
賀一葉之扁舟 擧匏樽而相屬 寄부유於天地 渺滄海之一粟.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알이구나.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오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우리네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부러워하네.
나는 신선을 끼고서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오래토록 하다가 마치는 것을,
불현듯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여운을 슬픈 바람에 맡기네.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소자 말하되 "손님꺼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 能以一瞬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籍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손님이 기뻐서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고기와 과일 안주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배안에서 서로 함께 포개어 잠이드니,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네.
後 赤壁賦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皐, 二客從予過黃泥之坂.
그 해 시월 망일(望日)이었다.
설당(雪堂)에서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두 사람의 객(客)과 함께 황니(黃泥) 고개를 넘고 있었다.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벌써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있었다.
대지 위에 어른대는 사람의 그림자, 고개를 들어보니
둥두렷 밝은 달! 사위를 둘러보다 문득 즐거워진 마음에 걸으며 노래를 부르니,
객(客)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그러나 잠시 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귀한 손이 오셨건만 마실 술이 없구나! 마실 술은 있다하되 안주거리 없구나!
하얀 달에 맑은 바람, 이리도 좋은 밤을 어인 수로 보낼까나”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似松江之로 顧安所得酒乎?”
그러자 한 객(客)이 말하였다.
“오늘 어스름 저녁 무렵 그물을 올려보니 물고기가 잡혔더이다.
주둥아리 커다랗고 비늘은 잘디 잘은, 그 형태가 영락없이 송강(松江) 명물
농어와 닮았더이다. 헌데, 술은 어데 서 구한다지요?”
歸而謀諸婦, 婦曰:“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須!” 於是, 휴酒與魚, 復游於赤壁之下.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상의해 보았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영감께서 불시에 필요할 때가 있지 싶어, 오래전에 술 한 말 숨겨둔 게 있지요.”
그리하여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 밑으로 유람을 나갔다.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강물은 소리내어 흐르고 있었다. 절벽은 깍아 질러 천척(千尺) 높이로 솟아있었다.
까마득한 산에 하염없이 작은 달, 줄어든 강물에 드러난 바위들...
도대체 해와 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산(江山)이 변한 걸까.
予乃攝衣而上, 履참巖, 披蒙茸, 踞虎豹, 登규龍, 攀栖골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不能從焉.
나는 옷소매를 걷고 육지에 올랐다.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올라갔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지나갔다.
포효하는 호랑이 바위, 꿈틀대는 이무기 괴목(怪木)위에 걸터앉아 보기도 하였다.
이윽고 아찔한 나무 끝 송골매의 위험한 둥지 위에 기어올라가,
강속 어딘가 깊이 숨어있을 하백(河伯), 풍이(馮夷)의 용궁을 내려다보았다.
두 객(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초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휘- 익, 길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초목이 부르르 떨자, 골짜기 안에 산의 울림이 맴돌더니
홀연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마저 춤을 추었다. 나는 슬며시 슬퍼졌다.
문득 숙연해져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시릴 정도로 맑고 차가운 느낌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몸을 돌려 다시 배에 올랐다.
강 한복판에 배를 띄우고 파도가 치는 대로 물결이 멈추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때는 바야흐로 한 밤중,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막과 고요함뿐이었다.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알然長鳴, 掠予舟而西也.
그 때였다. 저 동녘에서 한 마리의 학(鶴)이 강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었다.
날개는 수레바퀴, 까만 치마에 하얀 상의를 걸친 듯...
꺼ㅡ 억, 길게 울더니 내가 탄 배를 스쳐지나 서쪽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 羽衣翩僊,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 樂乎? ”
잠시 후, 객(客)들은 떠나가고 나는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우의(羽衣) 도복(道服)을 입은 한 도사가 표표(飄飄)한 자태로 임고정 밑을 지나와서
홀연 읍(揖)을 하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적벽의 노님이 즐거우셨소이까?”
問其姓名, 면而不答. “嗚呼噫희!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하, 그렇구료! 이제 알겠소이다!
지난 밤에 길게 울며 내 옆을 스쳐 날아간 그 학(鶴)이 바로 그대가 아니시오?”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도사가 고개 돌려 빙그레 웃었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으나, 그는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蜀南竹海
(사진설명: 아름다운 촉남죽해)
중국관광을 하다보면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의 동쪽에서는 대해(大海) 즉 바다를 보고,
동북에서는 임해(林海)-수림의 바다를 보고,
서북에서는 사해(沙海)-모래의 바다를 보고,
서남에서는 죽해(竹海)-대나무의 바다를 본다고 말이다.
그 중 중국 서남의 사천(四川, Sichuan)성에 위치한 촉남(蜀南)죽해가
대표적인 대나무의 명소이다.
사천성 의빈(宜賓, Yibin)시 교외에 자리잡은 촉남죽해는 대나무 경관을 중심으로 하고,
문화고적을 함께 보유한다.
120평방킬로미터의 촉남죽해명소에는 70,000㎡의 남죽(楠竹)이 500여개의 낮은 산을 뒤덮어,
기복을 이루며 대나무의 바다를 이룬다.
촉남죽해에서 가장 많은 대나무는 남죽인데 남죽은 공죽(公竹)과 모죽(母竹)으로 분류된다.
대나무의 첫 마디에서 뻗어나온 가지가 하나면 공죽이고 가지가 둘이면 모죽이라고 한다.
의빈은 너무나도 유명한 지역이라 특별히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될듯...
(중국의 白酒중에 한국사람들 입맛에 맞는다고 하는 우량에(五粮液)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음)
촉남죽해는 성도에서 400여 Km 떨어져 있으며, 사천성 의빈(宜宾)시 만령산(万岭山)에 위치해 있다
굉장히 넓어서 케이블 카가 다니는 촉남죽해. 영화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의 대결을 찍은 곳.
선우동과 천보채
(사진설명: 촉남죽해 부근의 천보채)
미인계 여인의 젓가슴이 새카맣게 손떼가 묻었지요. 역시 꽃뱀에는 약해....
명청 교체 시기에 피란와 사는 사람들의 마을 선우동
촉남죽해와 가까운 곳에는 1862년에 건설된 천보채(天寶寨, Tianbaozhai)가 있는데,
지세가 험준한 이 곳에는 13개의 돌문이 첩첩해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천보채의 특색은 아찔한 절벽에 새긴 거폭의 입체벽화인에 1,000㎡의 벽화가
연연 1km를 뻗어 있다.
벽화의 내용은 중국의 고전 병법인 "삼십육계"로 기세가 웅장하고 독특하면서도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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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는 대나무를 좋아해서
'고기가 없어도 살수 있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못살것 같아.
고기를 못먹으면 야윌뿐이지만, 대나무와 가까이 하지않으면,
사람이 천박하고 속되어 지거든.'이라고 했지만, 글쎄
죽리관(竹里館)
- 王維 -
獨坐幽篁裏 홀로 그윽한 대숲에 앉아서
彈琴復長嘯 거문고 타다 다시 길게 휘파람 부네.
深林人不知 숲이 깊어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
明月來相照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비추네.
누군가 그랬지요.
"사람들은 신선계를 부러워하고 동경 하지만,
신선계라는 곳에서 보면, 그래도 서로 지지고 볶으며
같이 어울려 살아가는 속계가 더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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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 올려주신 글 읽고 재방송을 봤더니 이런 혜택도 누렸네요.
대게두마리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