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운대] 다대포 객사 회원관
[신선대]에서 본 조도
[오륜대] 부엉산
[태종대] 등대
[해운대] 석양
□ 海雲臺와 孤雲 崔致遠
“구름같이 왔다가는 인생이기에 자기 스스로 孤雲이라 字를 짓고, 號도 또한 海雲이라 하고서 높은 포부 품은 채 구름같이 오갔으되 구름이 반드시 무심한 것만이 아니라 비를 뿌려 자취를 남김같이 우리 국사상에 시로, 학문으로 은혜를 끼쳐놓고 간이가 계셨으니 그가 바로 新羅 말엽의 대시인이요 대학자였던 崔致遠 선생이시다.
憲安王 원년 서기 857년에 나서 어버이의 교훈 아래 자라다가 12세에 唐으로 건너가 18세에 급제하여 漂水縣衛가 되었으나 新羅國 소년으로 만리타국에서 이런 영예가 또 어디 있을 것이랴. 漂水縣은 江蘇省에 있는 작은 고을이라 녹은 많고 일은 적으므로 한가한 시간을 한껏 이용하여 연구와 제작에 밤낮 없이 정진하여 그 동안에 지었던 글들을 모아 中山覆簀集(중산복궤집) 다섯 권을 만들었으니 中山은 그곳 땅이름이요 覆簀(복궤)는 학문의 완성을 결심하는 뜻이다.
몇 해 뒤 黃巢(황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淮南節度使 高骿(고변)에게 諸道行營 兵馬都統을 명하고 그로 하여금 난리를 토벌케 했던 바 선생은 한참 이름을 얻은 때라 24세로서 그의 從事官이 되어 이듬해에 黃巢를 치는 격문을 지었는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할 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으니...” 항소는 이 구절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상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다시 몇 해 뒤에 甄萱(견훤)이 따로 나라를 세우니 36세 때 일인데 선생은 비록 나라의 혼란 속에서 버림받은 사람처럼 되었건마는 그 같이 어지럽기 때문에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더욱 버리지 못해 진성여왕(眞聖女王) 8년 37세 되던 해에 정치의 급선무 십조(十條)써 올려 여왕도 칭찬하며 新羅의 작위 중 제6위에 가는 阿湌(아찬)을 내려주니 그것은 眞骨 이외의 평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爵位였던 것이다.
그리고 44세 때에는 弓裔(궁예)가 또 일어나 딴 나라를 세우거니와 이같이 혼란하니 학문이 쓸 곳이 없고 인심조차 갈수록 험악하므로 마침내 벼슬을 던져 버리고 막대를 벗 삼아 방랑의 길을 떠났었다.
일찍이 太守를 지낸 嶺南 湖南 여러 고을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 경주의 金鰲山과 陜川의 淸凉寺와 剛州, 지금 慶北 義城의 氷山과 智異山 雙溪寺와 東萊 海雲臺와 합포, 지금 마산에 있는 月影臺와 梁山의 臨鏡臺와 咸陽의 學士樓가 모두 다 발자국 끼친 유적지다. 특히 경북 안동의 청량산에는 치원봉이라 이름한 곳이 있으며 그 곳 바윗골 속에 어떤 노파의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생에게 밥을 지어 바치던 식모였다고 전해 왔었다.
이 같이 여기 저기 바람과 구름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다니며 어느 때는 우거진 숲 속을 찾아 들어가 나무를 찍어 정자를 매고 또 어느 때는 흐르는 강기슭에 집을 짓고 화초를 심기도 하며 그 속에서 시 읊고 생각하고 책 베고 잠자며 날을 보냈던 것이다.
선생이 만년에 鷄林에는 잎이 누르고 鵠嶺(곡령-계성)에는 솔이 푸르다하여 새로 일어나는 고려 태조에게 축하의 글을 올렸다고 전하지마는 그것은 어느 집으로나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말이니 첫째 신라에서 벼슬한 분으로 가볍게 배반할 그런 인격이 아니며 또 이미 세상을 저버린 이가 왜 정치에 간여하였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高麗 顯宗 때에 선생에게 文昌候(내시랑)의 시호를 내렸던 것도 그가 유학의 최고봉이요 또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한 것이리라. 선생의 난랑비 서문은 화랑의 내용을 알려준 보배로운 기록이요 眞鑑禪師(진감선사-쌍계사), 白月和尙(백월화상-보원사지), 智證大師의 碑文(지증대사 적조탑비-봉암사) 및 華嚴經結社文(화엄경결사문)등 명문들은 그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 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이 최후에는 처자를 이끌고 伽倻山(합천 가야산) 밑으로 집을 옮겨 들어가 친형으로 중이 된 賢俊과 定玄法師와 함께 수도하는 벗을 삼고서 海印寺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어느 날 아침 문 밖으로 나가더니 숲 속에 갓과 신만 끼쳐 있을 뿐 아무도 그의 자취를 찾지 못하여 책마다 신선 되어 갔다고 적었으므로 나도 여기 그대로 적어 둔다.
‘孤雲子 육신의 뒷 소식은 세상에 아는 이 하나 없어도 그 이름 학문 예술 겨레의 가슴 가슴에 자리 잡고 해 달과 산과 바다와 함께 자손만대에 길이 살리라’
1971년 3월 일
후학 李 殷 相 글 金 忠 顯 씀”
- 해운대 동백섬 입구에 있는 비문의 내용 -
[강선대] 출입구
금정산 의상봉
[의상대] 범어사 원효암 뒤
배산 전경- 1950년대, [겸효대]가 있던 곳
겸효대(謙孝臺)
겸효대는 연제구 연산동과 수영구 망미동의 뒷산인 배산(盃山)에서 세속을 떠나
신선처럼 노닌 김겸효가 살았다는 곳.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래현 남쪽 5리에 겸효대가 있다'고 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
고려 공민왕때 정쟁에 떠밀려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내려온
정추(鄭樞)가 쓴 시 중에 '겸효대'란게 있다.
'겸효의 밝은 빛은 연꽃을 닮고/
가슴으로 품은 기운 속세를 떠났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萬戶邑)이 바로 거긴데/
휘적휘적 신선가(神仙家)를 오간다.'
시에 나타난 김겸효는 도가의 노장사상과 도교의 신선사상에 심취한 인물같다.
그의 삶이 시의 소재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명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조선 선조 38년(1605)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윤훤도 김겸효에 대한 시를 남겼다.
'연화가 맑은 물에서 나오듯/
천고의 그 사람과 서로 닮았는데/
겸효는 이미 백운을 타고 가고/
텅빈 세상에는 정추의 시만 남았구나.
'이러한 시문으로 볼때 겸효대를 무대로 유유자적하게 탈속한 신선처럼
살다간 김겸효는 부산지역의 상징적 선인(仙人)으로 회자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