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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8)르비딤에서(출 17:1-7)
옛날 사람들과 현대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C.S. 루이스 교수는 매우 흥미 있는 관점을 내놓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현대인에 비교하여 훨씬 더 무지했지만 신을 향하여는 깊은 경외감이 있었고, 신 앞에 언제나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았다. 고대인들에게 신은 심판자이었고 인간은 변함없이 피고였다. 반면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지혜로워 졌지만 신을 향한 원망 심을 갖고 신을 피고석에 세웠고, 이제 인간이 오히려 심판자가 되었다”고. 오늘 우리는 이런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에서 보게 됩니다. 백성들은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도착합니다. 르비딤은 신 광야와 시내 산 사이에 있는 곳으로 오늘의 와디 파이란(Wadi Feiran)근처로 추청됩니다.(지도 참조) 거기서 백성들이 다시 물이 갈하게 되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원망 정도가 아니라 모세와 다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안 되신다고 강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제는 백성들이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 하나님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여러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에 그 백성을 작살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의 상상이나 계산을 초월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지팡이를 잡고 호렙 산에 올라 ‘한 반석’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반석을 치자 거기 반석에서 의외로 목이 타는 백성들이 필요로 했던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합니다. 먼 훗날 바울 사도는 이 날 모세가 내리친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예표 한다고 말합니다.(고전10:4--“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인생들이 필요로 하는 샘물이 솟아났다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반석에서 솟은 이 샘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샘물은 희생의 샘물입니다.
르비딤 광야에서 그렇게도 절실하게 필요했던 물은 뜻 밖에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한 반석의 깨어짐을 통해서 예비 되었습니다. 성경학자 아서 핑크(Arthur Pink)는 본문 6절의 말씀에서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이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는 가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6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반석위에 서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지팡이로 먼저 내리친 것은 반석이 아닌 반석위에 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다음 반석이 깨어집니다. 사실 그 지팡이가 쳐야 할 것은 회개를 모르고 원망을 계속하는 백성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대신 하나님이 그리고 반석이 깨어 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의 결과로 바로 우리의 구원, 우리의 오늘의 자유의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들이 마실 수 있었던 반석의 샘물은 진실로 희생의 샘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땅에서 향유하는 민족적인 축복들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일은 3.1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3.1절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그들의 후손이 자유의 땅에서 삶을 살도록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었는지요. 당시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조선 땅 전체 인구 2천만 중 1,5%인 20만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끼친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전국적인 만세 운동의 핵심이 교회였고, 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애국열사 유관순을 단지 애국지사로만 알고 있지만 그녀의 희생이 철저하게 십자가 신앙 때문인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합니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천안 매봉 교회에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았고,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선교사 앨리스 샤프(Alise H. Sharp)는 그녀를 ‘독실한 믿음의 소녀’로 회고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정동 제일 교회 손 정도 목사님의 설교중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에 특히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민족을 위해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이 샘물은 은총의 샘물입니다.
반석에서 솟은 샘물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이 샘물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은총 혹은 은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아닙니까. 은혜를 모르고 원망을 계속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땅한 대접은 지팡이요 채찍이요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을 치시는 대신에 반석을 치시고 반석이 쏟아 놓은 샘물을 값없이 그대로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의미가 아닙니까. 엡2:8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다음 엡2:9절에서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은총,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할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감사할 일 밖에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얻은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의 선배들의 희생을 감사하는 감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아직도 우리의 삶이 원망으로 점철되고 있는 인생이라면 참된 감사를 배우기까지 우리의 광야의 여정은 좀더 깊은 광야로 계속되어야 할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시는 샘물은 이 물을 마실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요 은총임을 알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한잔의 물이 바로 은총의 물이요, 이 하루의 삶이 은총의 삶이요, 오늘의 믿음의 행진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 때문임을 기억하고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감사함으로 걸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이 샘물은 풍성한 샘물입니다.
목이 타는 사람들에게는 한 모금의 물도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스로 목을 축이는 모습을 보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실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르비딤에서 제공하신 샘물은 풍성한 샘물이었습니다. 호렙산 깨어진 반석에서 솟은 샘물은 한 두레박의 샘물이 아닌 르비딤 일대를 모두 적시는 강수의 물이었습니다.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105:41을 보십시오. “반석을 여신 즉 물이 흘러 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제 본문의 사건의 큰 그림을 보십시오. 작은 반석에서 솟은 샘이라면 그것으로 몇 사람이나 마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강물처럼 마른 땅을 적시던 그 물로 그 많은 사람들이 해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10:10의 약속의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내가 온 것은 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가장 정상적인 믿음의 행진의 도상에 약속된 인생은 풍성한 삶인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의 도상에도 고난이나 역경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의 증언처럼 당신의 자녀들의 고난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라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향한 모든 어버이의 자연스러운 소원처럼 그는 우리가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행복의 강수를 헤엄하며 생의 찬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잠시 동안 이지만 르비딤에서 주의 백성들은 그런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용기백배 새 힘을 얻고 회복을 경험합니다. 실제로 ‘르비딤’의 의미가 ‘원기 회복’이나 ‘지원 받음’(supports)이라는 것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용기를 상실한 분들이 계십니까? 낙심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르비딤에 오십시오. 거기서 호렙 산에 올라 반석 되신 주님을 만지십시오. 그리고 그가 제공하는 성령의 강수에 젖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인생의 해답입니다. 민족 재건의 희망입니다.
이미 3.1절의 민족의 영웅 유관순 여사 이야기를 들려 드렸습니다만, 우리는 그녀의 놀라운 인생 여정이 단순한 애국의 정열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아주 피상적인 견해입니다. 그녀의 신앙을 떠나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3월 13일 유관순이 고향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 선언서를 숨겨 가지고 고향 아우네로 내려 왔을 때 고향은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에 대한 설득을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어린 조카 유제하를 데리고 천안 매봉산에 올라 추운 날씨였지만 3일간 나라를 위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3일 동안의 기도를 그녀의 조카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흘동안 기도만 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뭔가 계시를 받은 듯 미친 듯이 기도를 마친 그의 얼굴은 온통 환하게 빛이 났고 말에 힘이 있었고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고. 산에서 내려온 유관순의 말에 고향 사람 모두는 이상하리 만치 귀를 기울이고 경청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음3월 1일 유명한 아우네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한 일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기도의 힘, 성령의 힘으로 된 일이었습니다. 체포된 유관순은 감옥 생활 중에도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믿음을 위해 그리고 함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변절하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나이로 생을 마친 그녀는 단순한 애국 열사가 아닌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가 죽자 감옥의 책임자들은 비밀리에 그녀의 시신을 처리하고자 했으나 선교사님들의 항의로 그녀는 정동 교회 장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화 학당 프라이 교장은 그녀가 아끼던 성경 한권을 그녀의 가슴에 얹어 관에 넣었고 친구들은 양손에 꽃을 쥐어 주어 입관하게 한 후 정동 교회 김 종우 목사의 주례로 장례 예배를 드리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게 됩니다. 홍창석 목사는 그녀의 일생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유관순은 교회와 주님을 사랑하다가 그의 생애를 제물로 바쳤다. 유관순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떠나 본 일이 없었다. 유관순은 교회에서 나서 교회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배웠고 교회에서 만세 운동을 하다가 죽어 교회의 예배로 마지막 삶을 마감하였다.”고. 거사 직전의 마지막 그녀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 내용이 지금의 유관순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이 어린 소녀의 엄청난 감동의 힘-그것이 정녕 인간의 힘이 아닌 기도의 힘이었고, 우리 주님의 풍성하시고 놀라우신 자비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면,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이런 능력을 경험하고, 이 땅의 교회들이 이런 은총의 생수를 마시고 일어선다면 우리 민족은 또 한 번 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려 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 모두가 빚진 자임을 참으로 믿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늘도 살아계셔서 여전히 우리의 도움이심을 믿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이 반석 되신 주님께 참으로 나아와 그의 도움을 비는 순간 그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눈앞에는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내일에는 생수의 강을 만드는 르비딤의 광야가 펼쳐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