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3화 전쟁터로 간 만수 삼촌
전쟁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미군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영화 <야전병원 매시(MASH)>처럼 미군 병사들은 현지 아이들과 잘 놀아주었다.
우리들도 미군 병사와 친해지게 되었다.
근처에 있는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 흙을 쌓아올려 진지처럼 만든 곳이 있었는데, 기관총을 설치한 미군 병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밤이 되면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그곳으로 놀러갔다. 그들은 휘발유를 넣은 깡통에 그대로 불을 붙여 추위를 견디었다. 과연 미군들의 물자는 풍부했다.
그들은 낯이 익은 내가 찾아오면 총알을 제거한 권총과 손전등을 내게 맡기고 자기들은 잠을 잤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들고는 다리 아래에 수상한 놈이 나타나지 않나 어린마음에도 꽤나 진지하게 보초를 섰다.
이윽고 아침이 되면 그때까지 졸고 있던 미군 병사가 초콜릿과 껌을 상으로 주었다. 나는 동경하던 미군 병사의 일원이라도 된 것 마냥 약간은 우월감에 들떠서 받은 초콜릿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집으로 향했다.
전쟁 틈에는 이렇게 느긋하기만 했던 시간도 있었다. 왠지 모를 신기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수 킬로 떨어진 곳에서는 격렬한 총격전이 펼쳐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역훈련을 받고 있던 만수 삼촌한테서 편지가 왔다.
백내장 때문에 글자가 보이지 않는 할매를 대신해 내가 편지를 읽어드렸다. 처음에는 반가운 표정으로 편지를 읽었는데, 내용을 읽어 갈수록 나도 할매도 두려움으로 떨리는 몸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편지에는 삼촌이 조만간 전장으로 간다고 쓰여 있었다.
“왜 우리 만수가! 훈련 받은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데!
충격이 크셨는지 할매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셨다. 그런 할매를 보며 나또한 불안과 공포로 온몸이 떨렸다.
‘만수 삼촌이 전쟁터로 가게 됐다니…’
그날 밤, 정말 좋아하는 삼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삼촌은 건강하게 돌아 올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밝아있었다.
옆에 누워있던 할매도 분명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몇 번씩 이불 속에서 땅이 꺼질듯 한숨을 쉬셨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매의 손을 잡고 역으로 향했다. 언제쯤 지나갈지, 만날 수 있게 될지 어떨지도 몰랐지만, 전쟁터로 가는 삼촌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그것은 선로를 따라 걸으며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상상을 초월한 수의 피난민 행렬이었다. 기차는 모두 군용물자와 병사를 운반하는데 쓰였기 때문에 북에서 피난해온 사람들은 모두 걸어서 선로 길을 지나갔다. 그 중에는 늙고 쇠약해져 간신히 걷는 사람,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어린 아이들이 하나같이 더러워진 얼굴에 몹시 지쳐 퀭한 눈을 번득이며 하염없이 남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친척이나 지인이 피난민들 속에 있지 않은지 필사적으로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 있습니까?”
“혹시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 안계신가요?”
이런저런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뒤엉켰다. 그 중에는 간신히 다시 만나게 되어 울부짖으며 서로를 끌어안는 가족도 있었다. 피난민들끼리도 일행을 놓쳐버린 가족이나 친척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때까지 시골 마을에서 그저 놀기만 했던 나에게는 눈앞에 나타난 그 광경이야말로 틀림없는 조선전쟁의 현실이었다.
한편, 피난민 행렬 바로 옆을 지나는 간선도로는 북으로 향하는 미군 트럭 행렬이 줄을 이었다. 짐칸에는 무기가 가득실려 있고, 장갑차와 탱크를 실은 차량도 있었다.
이윽고 많은 병사들을 태운 군용트럭이 나타났다.
“할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허둥지둥 할매의 손을 끌고 그 트럭이 지나는 군용 도로가에 섰다. 우리처럼 같은 심정의 가족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신병들을 태운 트럭이 끊임없이 북쪽을 향해 달려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가족 이름을 끊임없이 외쳤다. 그 속에서 나는 눈이 보이지 않는 할매를 대신해 정신없이 삼촌을 찾았다.
“삼촌! 만수삼촌!”
끝없이 지나가는 트럭 짐칸을 향해 목이 터져라 삼촌의 이름을 불렀다.
“할매, 안되겠어. 다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어서 분간이 안돼요!”
삼촌을 찾는 걸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해수야!”
지나가는 마지막 트럭의 짐칸에서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앗!”
거기엔 군복차림에 헬멧을 등에 늘어뜨린 만수 삼촌이 있었다.
“삼촌! 만수 삼촌!”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해수야! 해수야!”
“만수 삼촌! 할매, 만수 삼촌이야! 저기, 저기”
“진짜냐? 만수 얼굴이 보이냐?”
“응, 저기, 저기요! 삼촌, 삼촌!”
멀어지는 트럭 짐칸에서 삼촌은 있는 힘을 다해 손을 흔들었다.
“해수야, 만수는 건강하냐? 다친 데는 없어 보여?”
할매는 몇 번이나 이렇게 물으며 불편한 눈으로 트럭 쪽을 바라보았지만, 삼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력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할매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서 시력이 있다 해도 멀어지는 트럭 짐칸이 보일 리 만무했다.
“만수야, 만수야…”
나는 오열하는 할매를 부축해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조용한 곳으로 갔다.
할매는 너무 충격을 받은 탓인지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몇 번씩 주저앉아 삼촌의 이름을 부르며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할매 울지 마요, 울지 마, 괜찮을 거에요. 만수 삼촌이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잖아…”
나는 할매의 손을 이끌며 온 힘을 다해 할매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트럭 짐칸에서 손을 흔들던 삼촌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할매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그머니 때 묻은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저 씩씩하게 걸었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한 나는 할매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많이 지쳤죠, 할매…”
“고맙다, 해수야. 고마워.”
할매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만큼 지치셨는지 꼼짝 않고 방안 구석에 앉아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할매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나, 물 길어 올게.”
이렇게 말하고 물통을 들고 공동우물로 향했다.
밤도 깊어 우물가는 이미 고요했다. 나는 천천히 물을 길어 올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전쟁터를 피해 온 피난민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쟁의 불길을 피해 온 그 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 가득한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메어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토록 무서운 전쟁터로 좋아하는 만수삼촌이 떠나는 모습이 떠올라 그때까지 꾹 참고 있던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해수야…”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거기엔 지친 얼굴로 물통을 들고 서있는 선화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억누르고 있던 슬픔이 터진 것처럼 큰소리로 엉엉 울고 말았다.
“해수야, 무슨 일이야?”
선화는 물통을 가만히 내려놓은 후 다정하게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삼촌이, 만수 삼촌이…”
나는 선화에게 응석을 부리듯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정한 선화 덕분에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가. 삼촌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뒤, 말없이 우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걱정하며 그녀는 계속 곁에 있어 주었다.
이윽고 늘 그랬던 것처럼 선화를 찾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는 공동우물을 뒤로했다. 선화에게 힘들었던 마음을 털어놓아서였는지 그날 밤 나는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제24화로 이동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_^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부모의 마음이 찢어지겠지요?. 군대만 보내도 가슴이 덜컥하는 이 한반도의 부모들. 비극입니다.
참 슬픈 장면입니다... ㅠㅠ 젊은친구들 이런 장면에 대한 연상이 잘 될지. 저도 쉽지 않은데
미영씨... 좋아요 좋아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