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행정관청에 들어서면 비석들이 줄 지어 서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주로 조선시대에 지방 수령들의 선정(善政)을 찬양한 송덕비(頌德碑)들이다. 지방 수령들이 임기를 마치고 떠나기 전에 혹은 그 후에 지방민들이 수령의 치적을 찬양하여 기금을 모아 세우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동 관아가 있었던 옛 안동군청 자리나 현 시청 내에도 송덕비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안동에 파견되었던 많은 수령들 가운데는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사람도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호사가들은 안동을 산이 많고(山多), 인재가 많고(人多), 서원이 많은(院多)것을 일러 삼다(三多)라 하고, 또 세 가지(三無)없는 것은 안동 관내에 만석거부가 없고, 송덕비(頌德碑)가 없으며, 향리(鄕吏-아전)가 성내에 거주하지 않음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이야기 꺼리가 되는 것은 송덕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로 안동에는 지방수령의 송덕비가 없는 것일까?
안동의 남은 송덕비들 안동에도 송덕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천동 산 154번지 암벽에 새겨져 있던 김상철(金尙喆)ㆍ이병모(李秉模)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1786)를 쓰레기 매립으로 암벽을 절단하여 부근에 옮겼다가 국도 확장공사로 안동댐 경관지에 있는 민속박물관 정원에 옮겨 놓은 것이 있고, 도산면 태자리에 조선 후기 때 것으로 보이는 예안현감 박인수와 순상 조강하의 공덕을 기록한 공덕비(朴寅壽ㆍ趙康夏不忘碑) 역시 암벽에 새겨져 있는 것을 도로확장 공사로 파손되자 1993년에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이 있다. 또 서후 태장리 봉정사 입구에 순조 때 안동부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되는 정익조선정불망비(鄭翊朝善政不忘碑)가 1910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그리고 송덕비라고는 할 수 없어도 부사의 치적을 기록한 송제비 세 기가 있다. 선어대 주유소 옆 도로변 절벽 위에 1605년 대홍수로 제방이 유실되자 당시 부사 김륵이 1606년 제방을 쌓은 내용을 권태일이 찬한 송제비(松堤碑)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도로변에는 이상경(李尙慶)이 찬한 1777년 대홍수로 유실된 제방을 1780년에 안동부사 김상묵(金尙?)이 1780년에 쌓았다는 송제사적비(松堤史蹟碑)가 있다. 또 김상묵이 같은 해에 낙동강 제방을 쌓은 것을 이상경이 찬한 호방사적비(湖防史蹟碑)가 법흥동 칠층전탑 부근에 세워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안동대학교에 옮겨져 있다. 안동시 관내에 송제비를 제외하면 조선시대 송덕비라 할 수 있는 것은 세 기 뿐이다. 이들 비석들도 앞의 두 기는 암벽에 새긴 것이고 정익조 선정비는 절에서 1910년에 축원을 담은 듯한 내용의 것으로 일반적인 송덕비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최근 1947년 임동면 마령리에 세운 월성 이상정 송덕비, 1969년 임하면 금소리 주민이 세운 임중인 면장송덕비, 1991년 송천동 교장 박정균 송덕비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절을 위하여 시주한 것을 절에서 세운 것이나 동민을 위해 정부보조금을 얻어 제방을 쌓은 것, 제자들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근래에 세운 것들로 조선시대 송덕비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다.
문경에 세워진 안동부사 송덕비 예전에는 안동에서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문경 새재(鳥嶺)를 넘어야 했다. 이 새재에는 지방 수령들의 공덕이나 선정을 찬양한 비석들이 30여기나 있다. 그 중에 문경지역과 관련이 없는 송덕비가 있어 주목할 만하다. 제 1관문을 지나 2관문 가기 전 20m 지점에 용추 바위 건너편에는 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타루비(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가 있다.
안동에 송덕비가 없는 근거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해 본다. 비각은 오랜 세월에 없어지고 주춧돌을 연결하던 장대석이 남아 있어 비석을 세울 당시의 위용을 알만 하다. 상국(相國)이란 조선시대에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또 이것은 안동부사를 지낸 김수근이 좌의정이 된 이후의 것임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타루비(墮淚碑)란 중국 진(晉)나라 때 양양지방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을 잊지 못해 그의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세운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공덕비는 1855년(철종6)에 유기목(柳祈睦)이 짓고 김진형(金鎭衡)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공덕비 뒷면에는 남선ㆍ임동ㆍ재산 등 안동부 소속 38방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동부에서 기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있은 지 16년이 지난 때이고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이다. 비문 내용은 김수근이 1839년 안동부사를 하면서 조선 말기 삼정(三政)이 문란 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살지 않게 하였고, 아이와 노인의 이름이 중복된 호구를 정리하여 징병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이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의 백성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본부에서는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을 어길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本府?退陶不敢褒(?)先候之訓)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백리 밖 새재에 세우는 이유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김수근 본인도 이 고개를 오가며 경관을 즐겼던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밝히고 있다. 김수근(1798,정조 22~1854,철종 5)은 목사를 지낸 김인순(金麟淳)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 종로구 옥인동 청휘각(淸暉閣)에서 거주하였고, 1828년 진사를 거쳐 음서의 혜택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시작으로 대사성 ? 이조 참의 ? 우참찬 ? 대사헌 등의 요직을 지냈다. 1845년 한성부 우윤을 거쳐 1847년 충청도 관찰사, 철종 1년(1850) 이조 참판 ? 공조 판서를 지내고, 1854년까지 이조 판서 ? 홍문관 대제학 ? 선혜청 당상과 병조 ? 형조 판서를 역임한 뒤 1854년 10월 15일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어 타계하기 하루 전인 같은 해 11월 3일까지 재직하였다. 185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 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특히 송덕비가 세워지던 당시에는 안동김씨 2차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동생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의 장인이었으며, 두 아들 김병학(金炳學)과 김병국(金炳國)은 모두 정승(政丞)의 위치에 있던 때이다. 김수근의 송덕비를 안동이 아닌 문경에 세운 것도 안동의 향내에 흐르고 있는 공덕비를 세우지 않는다는 분위기를 반영한 것 같다. 한편 안동부에서도 당시에 전안동부사 김수근의 자제들이 최고위직에 있을 때라 이것 또한 무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는 김수근이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되는 때며 또 안동부사를 지낸지 16년이 흘렀기 때문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에 택한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김수근의 고향이 안동이란 점에서 권력과 접근하기 좋은 것이 송덕비를 세우는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송덕비가 없는 이유 퇴계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조카 영(寗)에게 장례절차를 간소하게 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간단히 표시하라고 하였다. 당시로 보면 종1품의 정승이었던 퇴계 선생의 비석은 그 품계에 따라 크고 높게 만들어야 하는데, 정작 본인은 시골에 숨어 사는 선비를 자처하며 세상을 떠났으니 그것 또한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퇴계 선생의 행적은 안동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여 진다. 김수근의 공덕비에서도 일부 언급한 바와 같이 안동 유림은 퇴계 선생의 이런 가르침 때문에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물론 이 지방을 거쳐 간 많은 수령들조차도 감히 자신의 공적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최고의 권세가였던 김수근의 공덕비라 하더라도 안동 관내에서는 세울 수 없을 만큼 안동 유림의 힘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유림이 선출했던 안동의 좌수별감 자리에 대해서 서애 선생의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물러나려는 서애 선생에 대해 선조가 무엇인가 해주려고 했지만 모든 것을 거절하게 된다. 선조가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은 있을 것이니 얘기 해 보라기에 서애 선생은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는데, ‘안동에 내려가 좌수별감이나 하면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선조가 ‘안동의 좌수별감이 그렇게도 좋은 자리이면 짐은 할 수 없는가?’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해부터 2년간 좌수 자리를 비워두었다는 농담 같은 얘기가 전하기도 한다. 안동에 공덕비가 세워지지 못했던 것은 지방 수령이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그것을 공덕비를 세워 찬양할 것까지는 없다는 유림의 생각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이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 해관육조(解官六條-수령이 바뀌어 돌아갈 때의 태도와 재임 기간 중 남긴 치적)중 유애(有愛)부분에서 돌에 새겨 덕정(德政)을 칭송하여 영구히 전해 보이는 선정비(善政碑)는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럽지 않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나무로 만든 비(木碑)라도 세우는 것은 아첨하는 사람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으니 세워서 욕을 먹을 바에야 세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신임 관리를 맞을 때는 쇄마전(刷馬錢)이라 하여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백성들이 따로 거두어 바치게 하고, 떠날 때는 입비전(立碑錢)이라 하여 공덕비를 세우는데 돈을 모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만큼은 그러한 수령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지킨 안동 유림의 힘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오늘날 세우는 공덕을 찬양한 비석들 안동에는 1900년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공덕비가 더 많이 있다. 그리고 조상들의 행적을 찾아 새로이 오석으로 유허비들을 세우고 있다. 기계적으로 다듬은 비석들이 자연과도 어울리지도 않음은 물론 문화재와도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봉정사 아래 명옥대는 아담하고 작은 정자가 주위자연과 참 잘 어울린다. 그런데 최근 그 앞에 커다랗고 시커먼 유허비가 우뚝 서 있어 조화롭지 못하다. 자연훼손을 줄이기 위해 화장을 권장하고, 납골당 건립을 위해 정부가 특별히 지원을 했더니 호화 납골당 때문에 자연이 더 훼손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렇게 잘못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500년 전 퇴계 선생은 왜 자신을 영의정이란 큰 벼슬을 마다하고 도산의 숨은 선비로 남기를 원했던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길안 오대리 약산 기슭에는 조선시대 환관을 지낸 분의 묘소가 있다. 그 앞에는 자손들이 돌보지 않아 넘어진 비석과 망두석은 보기초차 민망스럽다. 세울 때는 그래도 벼슬의 힘으로 세웠지만 돌보지 않은 묘소와 비석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동의 문화는 화려한 문화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문화재보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더 깊은 문화이다.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려 하기 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 오늘의 삶에 지혜를 발견하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억지로 행적이나 공덕을 꾸미려 하기보다는 조상들의 진실 된 삶과 뜻을 하나하나 일깨워 가는 것이 공덕비 세우기를 꺼렸던 안동 어른들의 참뜻을 길이 보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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