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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22
제 5장 물소리 바람소리
혜인스님이 선방으로 들어가고 난 후 혜각과 고명인은 잠시 정혜사 마당에서 서성거렸다. 바로 승용차로 내려가기에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무언가 더 할일이 있을 것 같았고, 어딘가 더 들러야 될 것 같아서였다. 힘들게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가 그냥 내려간다는 것이 왠지 허전했다. 그래서 혜각과 고명인은 마당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잠시 가을햇살을 쪼였다. 잠시 후, 고명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만공스님께서는 어느 방에서 거처하셨습니까.”
“아! 조실채 말입니까.”
혜각이 그제야 더 들러야 될 곳이 생각났다는 듯이 무릎을 쳤다. 고명인에게 감사의 표시로 합장을 하기까지 했다.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까. 저에게 합장을 다 하시고.”
“그렇습니다. 하마터면 만공스님께서 머무시던 금선대를 지나칠 뻔했습니다. 더구나 금선대는 일타스님의 아버지인 법진스님께서 머무시던 암자였습니다.”
“여기서 멉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 아래 계곡 저 편에 있습니다.”
돌계단 산길은 물이 쫄쫄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나 있었다. 원래는 이 돌계단을 이용하여 정혜사를 오르내렸는데, 시멘트로 포장한 승용차 길은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최근에 난 듯싶었다. 정혜사를 정문으로 나와 돌계단을 내려서면서 혜각이 말했다.
“고 선생, 선객들이 왜 정혜사 선방을 알아주는지 아십니까. 한 철 정진하여 일대사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 선방에 고승들의 법향(法香), 즉 진리의 향기가 훈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승들이 남긴 법향을 맡을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혜각은 경허의 제자인 혜월의 얘기를 먼저 꺼냈다. 지독한 흉년이 들어 도둑이 횡횡할 때였다. 삼경이 막 지나고 있었다. 정혜사는 그때도 선방이었고, 하루 종일 좌복에 앉아 용맹 정진하던 선객들은 잠깐 동안 잠에 골아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혜월은 장좌불와 중이었으므로 좌복 위에 좌선의 자세로 앉아 잠을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공양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쥐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났다. 혜월은 잠을 쫓으며 귀를 기울였다. 공양간에서 쌀가마니를 들어내는 밤도둑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밤도둑은 행동이 굼떴다. 끙끙 하고 힘을 쓸 뿐 민첩하게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혜월은 선방 밖으로 나갔다. 과연 도둑은 쌀가마니를 지게에 얹혀놓고는 그 무게 때문에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원래 도둑이라기보다는 흉년이 들어 몇 끼를 굶은 농부가 분명했다. 밤손님이 놀라지 않게 가만히 뒤로 간 혜월은 지게를 밀어주었다. 그래도 다리를 후들거리며 잘 일어서지를 못하자, 혜월이 ‘한번 일어나기만 하면 되네, 어서 일어나보시게.’ 하고 말했다.
그제야 도둑이 놀라 뒤돌아보며 ‘스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더니 다시 주저앉으려 했다. 그러나 혜월은 여전히 나직하게 ‘일어나 앞만 보고 가시게. 양식이 떨어지면 또 찾아오게.’ 하고 말했다.
고명인은 혜각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도둑을 만나 도둑의 편이 돼준 혜월의 자비심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공양간의 쌀가마니는 선방 대중들의 양식이지만 무소유의 삶 속에 있는 혜월에게는 도둑의 양식이기도 한 것이었다. 고명인이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돌계단을 내려서는 동안 혜각이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정혜사에는 혜월스님의 자비심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공스님과 금봉스님의
불꽃 튀는 선화(禪話)도 있습니다.”
“조용한 선방에 불꽃 튀는 일도 있습니까.”
“목숨을 내놓고 진리를 묻고 답하는 일이니까요. 진리란 장사치들이 흥정하는 물건이 아니지요. 정답이 아니면 목숨을 내놓던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선객들 중에는 이른바 모난 돌이 많았다. 개성대로 정진하는 것이 선객들의 자유이고, 스승을 닮는 것이 아니라 천 사람의 부처를 이루려는 것이 선수행이기 때문이었다.
만공의 제자 중에 금봉이라는 술꾼이자 골초도 있었다. 금봉은 술을 마시고 나서야 선방의 좌복에 앉곤 했다. 뿐만 아니라 금봉은 골초였다. 선방을 나서면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녔다. 그래도 스스로 닦은 법이 깊으니 아무도 손가락질을 못했다.
한번은 정혜사 선방에서 이런 일도 있었다. 술을 과하게 마신 금봉이 스승 만공을 거칠게 몰아붙인 사건이었다. 마을로 내려가 한 나절 동안 말술을 마시고 선방에 든 금봉이 만공을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다짜고짜 만공의 두 귀를 잡고 끌더니 만공의 엉덩이를 발로 차 선방 문밖으로 나가떨어지게 했다. 선객들이 놀라 주춤거리는 사이에 벌어진 불경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제자에게 당한 만공은 선방으로 들어와 좌복 위에 앉아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정진했다. 그런 뒤 밤이 되자 조실채인 금선대로 내려갔다. 다음날 금선대에서 시자를 시켜 금봉을 불렀다. 만공은 달려온 금봉에게 물었다.
“어제 무엇을 했느냐.”
금봉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말했다.
“스님의 엉덩이를 발로 찼습니다.”
“이(理)였느냐, 사(事)였느냐.”
이(理)라면 만공의 법을 저울질해보느라고 그랬다는 것이고, 사(事)라면 만공에게 술주정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금봉은 솔직히 시인했다.
“스님, 용서해주십시오. 사(事)로 그랬습니다.”
그러자 만공은 단소를 들어 금봉의 엉덩이를 세차게 후려쳤다. 평소에는 아름답고 구슬픈 소리를 내는 단소였지만 이 날만은 예리한 칼처럼 변해 금봉의 엉덩이를 몇 뼘이나 찢어버렸다. 그날부터 금봉은 안거 기간 내내 화장실에 들어도 용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화장실에 앉게 되면 가까스로 아물려고 하던 상처가 다시 찢어지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안거 이후 금봉은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하여 만공에 이어 정혜사 선방의 조실이 되었는데, 그래도 골초의 습을 버리지 못했으므로 어디를 가든 젊은 선객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금봉과 한 방에 들기를 꺼렸다고 한다. 효봉이 젊은 선객들에게 ‘너희들은 어찌 금봉의 담배만 보고 금봉의 도(道)를 보지 못하느냐.’고 나무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벽초가 놓았다는 돌계단을 하나하나 딛고 내려가니 달덩이처럼 둥글게 깎은 만공의 부도가 나타났다. 계곡이었으므로 햇볕이 잘 들지 못해 부도 주위가 칙칙했지만 푸른 이끼가 낀 둥근 부도는 탑 형식의 옛 고승들의 사리탑과 달리 만공이 자재하게 굴린 법을 형상화시킨 것 같았다.
“공처럼 생긴 부도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성철스님의 부도도 이렇게 공 모양입니다만 만공스님의 부도가 최초일 것입니다.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런 모양을 결정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승속을 불문하고 죽음의 문화처럼 보수적인 것도 없으니까요.”
혜각은 만공의 부도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치 자신이 조각을 한 것처럼 감회에 젖었다. 금선대는 만공의 부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문이 안에서 잠겨 있으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혜각이 금선대 문을 열고자 했지만 꿈쩍을 안 했다. 고명인도 손을 문 안으로 넣어 빗장을 풀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금선대 안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출입금지라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문이 안에서 잠긴 것을 보니 동구불출의 정진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혜각은 안거 기간 동안에는 흔한 일이라는 듯이 선선히 물러서고 있었다.
“누에가 실을 뽑아 스스로 갇히듯이 자결할 각오로 문을 닫아걸고 수행하는 도반들이 있거든요.”
“일타스님의 아버님도 저렇게 정진하셨습니까.”
“법진스님은 이미 중물이 들어 불문에 들었기 때문에 삶 자체가 부처님 법다웠다고 합니다.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가랑비처럼 중물이 옷에 젖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법진스님을 직접 뵌 적이 있습니까.”
“그때 저는 출가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강원에서 공부하느라 뵙지를 못했습니다. 허나 사형님들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일타스님께서는 제주도 밀감을 선물 받으면 꼭 혜국스님을 시켜 아버지인 법진스님께 갖다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밀감이 아주 귀한 과일이었으니까요.
혜국스님이 가끔 밀감 심부름을 한 모양입니다. 밀감상자를 들고 수덕사로 가 법진 노스님을 뵙게 되는데, 그때마다 오래 된 매화나무 향기를 맡듯 마음이 향기로워지곤 했답니다. 산자락에 지게를 부려놓고 게송을 읊조리며 썩은 나무를 줍고 있거나, 암자 툇마루에 앉아 ‘일만법이 일만법이’ 하고 만공 큰스님에게 탄 화두를 소리 내어 외는 노스님의 천진한 모습을 뵐 때마다 절로 신심이 나곤 했답니다.”
“부드러운 봄바람 같은 분이었군요.”
“맞습니다. 깨달음을 이루려고 사납고 거칠게 정진한 분이 아니라 당신의 성품대로 밥 먹고 숨 쉬는 평상의 모든 일상사를 불법 위에 자연스럽게 놓고 사신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생식을 하면서도 도를 닦고자 억지로 그랬다기보다는 생식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메주 몇 덩이 얻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참선 정진하다가 배고프면 메주 덩이의 콩 조각과 솔잎을 씹어 드셨던 모양인데 바로 그 맛을 산해진미라 했고, 거기에다 석간수 한 모금이면 신선이 따로 없다고 말했던 분이었다고 하니까요. 이때 남기신 게송을 보아도 스님이 얼마나 무위무욕(無爲無慾)의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됩니다.”
나는 본래 바위틈에서 사는 수행자
한 주먹 콩과 솔잎이 나의 입에 가장 맞네
묵묵히 띠집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나니
앞봉우리 뒷바위는 천만년 그대로이네
我本巖間一衲子
太豆松葉適口味
默坐茅庵遠望山
前鋒後巖千萬年
이렇게 욕심 없이 산 법진에게 역시 만공의 제자인 벽초가 송아지 한 마리를 금선대로 보낸 일도 있었다. 해방 후부터 법진이 수덕사 농감(農監)이란 소임을 1950년 중반까지 10여 년을 맡았는데, 절의 농토를 잘 일구어 절 살림이 튼튼해진 대가로 당시 주지 소임을 보던 벽초가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보낸 송아지였다.
법진은 벽초가 난감해 할까봐 송아지를 돌려보내지 않고 송아지를 키워 황소가 되었을 때에야 수덕사로 내려 보냈다. 수행자가 소를 키운다는 것은 거추장스런 일이었으나 보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마움을 크게 갚는 법진의 천진한 행동이었다.
“참으로 천진도인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실 때도 아이와 같았다고 합니다. 89세에 돌아가셨는데 부처님보다 근 10년을 더 살고 있다며 늘 죄송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89세 되던 1986년 7월 초에는 해제 전에 죽으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테고, 해제 후에 죽으면 다들 바랑을 짊어지고 떠나버린 다음일 텐데, 누가 나의 장례를 지내주지 하고 아이처럼 걱정했다고 합니다. 진짜 어린 아이 같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나 법진은 하안거 해제 전날 아들인 일타를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당신의 뜻대로 숨을 거두었다. 당신이 원한 대로 해제 전날의 입적이었다.
“노스님, 구름내(雲川) 고향으로 가시겠습니까.”
“구름내로 뭐하러 가나.”
“그럼,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청산에 흰 구름 나르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면 다 내 고향이다.”
법진의 임종게도 자신이 평소에 말하고 생각하던 것 그대로였다.
팔십팔세의 생애로 이미 기한 다했으니
칠십구세 부처님보다 더 많이 살았구나
오늘에 이르러 과연 어느 길로 갈건가
푸른 산과 흰 구름 흐르는 물 사이로다.
米壽生涯已限盡
勝於瞿曇七十九
今日路豆何處去
靑山白雲流水間
고명인은 승용차를 세워둔 정혜사로 다시 올라갔다. 혜각은 푸른 산과 흰 구름, 흐르는 물 사이로 가겠다는 법진스님의 환영이 보이는 듯 금선대 쪽을 자꾸 뒤돌아보더니 이윽고 돌계단을 올랐다.
정찬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