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六根(六情 : 眼·耳·鼻·舌·身·意)
* 六境(六塵 : 色·聲·香·味·觸·法)
* 六根 + 六境 = 12處(12入)
2. Seeing does not see itself. How can what does not see itself see anything else?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실로 보는 작용[能見]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MS 3.2)
실로 저 눈(能見)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도 못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해설>
실체론적 관점에서는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대상을 본다고 한다. 그러면 위와 같은 모순이 생긴다. 반복적으로 논의한 바와 같이 눈과 대상이 서로를 성립시킨다는 연기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리적이다.
3. The example of fire is not able to fully establish seeing. It, along with seeing, has been refuted by “gone”, “not gone” and “going.”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불의 비유는 눈(能見)을 성립시키는 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불의 비유)은 눈(能見)까지도 포함하여, 己去·未去·去時에서 이미 대답되어 있다.
4. When not seeing the slightest thing, there is no act of seeing. How can it [then] be reasonable to say: “seeing sees”?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보는 작용이 아니다. [즉 눈이 아니다] 그런데도 보는 작용이 본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치에 맞겠는가? (MS 3.4)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을 때에는 눈(能見)일 수가 없을 것인즉, 그러한 것이 본다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을 것인가.
5. Seeing does not see; non-seeing does not see.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seeing explains the seer too.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보는 작용[能見]이 보는 것이 아니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이 보는 것도 아니다. 보는 작용을 떠나 보는 주체[見者]가 성립할 수 없는 것도 이미 설명되었다.(MS 3.5)
'보는 것(눈)'은 보지 않는다. '보지 않는 것'은 보지 않는다. '보는 것'으로써 '보는 자'의 설명도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6. Without letting go of [seeing] a seer does not exist; in letting go of seeing, there is also [no seer]. If there is no seer, where can there be what-is-seen and seeing?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건 떠나지 않건 보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보이는 것[所見]도 보는 작용도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MS 3.6)
보는 작용을 떠나서이든, 안 떠나서이든, 보는 자(主體)는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보는 작용과 그 대상이 있을 것인가.
7. Just as it is said that a child emerges in dependence on a father and a mother, likewise it is said that consciousness emerges in dependence upon an eye and a visual form.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아이가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처럼 눈과 색, 형태에 의해 인식작용이 생긴다고 설해진다.(MS-c 3.7)
즉 그것은 子의 생겨남이 父와 母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識의 생겨남이 眼과 色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차드라키르티[月稱]이 추가한 偈頌)
<해설>
보이는 것과 보는 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성을 가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보는 작용과 보이는 것이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십이지연기의 식(識), 촉(觸), 수(受), 애(愛)나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인용문 가운데 MS-c 3.7은 찬드라키르티의 범본에만 있고 한역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8. Because there is no what-is-seen and no seeing, the four such as consciousness do not exist. How can clinging etc. exist?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이는 것과 보는 작용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식(識) 등의 네 가지[觸, 受, 愛]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집착[取]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MS 3.7)
보는 작용과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識 등의 넷(識·觸·受·愛)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取 등의 넷(取·有·生·老死)이 또한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9.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seeing explains hearing and smelling and tasting and touching, mind, hearer, what is heard, etc.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듣는 작용, 냄새맡는 작용 […]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MS 3.8)
聽覺·嗅覺·味覺·觸覺·思惟와 그리고 聞者와 所聞 등도 '見'에 의하여 알맞게 된 것을 적용하여 이해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