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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영적성장
(사도행전 18:24~19:7)
이 만 신 목사
(중앙성결교회)
I. 서 론
오늘 제가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분과 똑같은 목사이기에 여러분들 앞에 서있는 지금 조심스러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마다 목회의 경험이 다르고 주관이 다릅니다. 저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목회 체험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여러분의 보충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II. 본 론
목회자는 누구인가
프랑스 철학자 브레이스 파스칼은 인간은 중간자다. 천사와 짐승의 중간자, 위대함과 비참함의 중간자, 순간과 영원의 중간자다. 인간은 중간성을 가지고 있고 모순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사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한한 우주와 허무한 미생물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은 영과 육의 모순성을 가지고 그 중간에 존재합니다. 우주의 영광인 동시에 우주의 쓰레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지극히 추한 존재이며 지극히 영적이면서도 지극히 육적인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도 될 수 있고 야수도 될 수 있는 중간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리스도께 예속된 종입니다. 종도 보통 종이 아니라 출애굽기 21장 I~6절의 말씀처럼 씨종입니다. 한 번 종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서약하면 귀를 뚫어서 증거를 삼고 평생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재산도 자녀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은 언제나 예”만 있고 아니오”가 없는 존재입니다. 절대 복종만 하는 존재가 종입니다. 그리고 항상 명령을 대기해야 합니다. 자기의 소유는 전혀 없고 주인의 것만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주인의 소유입니다. 큰 공을 세워도 주인에게 명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생사권 역시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도 신자의 종 노릇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둘이만 씻어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의 사명을 가지고 지극히 작은 자의 발까지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제자의 사명이므로 우리는 신자들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종의 입장에서야 됩니다.
저는 오늘 아침 교역자 조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모든 교인들을 왕과 같이 생각하십시오. 상점에선 손님을 왕과 같이 생각하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시무하는 사역자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공손히 대하십시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종의 입장입니다. 또 긍정적으로는 선택받은 주의 종은 자유인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는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말에는 섬김과 영광의 양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는 종의 의미와 세상을 향해서 자유인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의 종은 천사도 흠모하는 존재입니다.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린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교육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12장 3절을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주의 종으로서의 긍지를 갖게 됩니다.
성경에 목사에 대한 호칭이 여러가지로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절에는 교회의 사자” 라고 했고 또 로마서 15장 16절에는 복음의 제사장” 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 : 20절에는 복음의 사신”이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3장 9절에는 하나님의 동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한 전권대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왕적인 사명과 선지자적인 사명, 그리고 제사장적인 사명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선택된 자: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옛날 구약시대에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왕 중의 왕이고, 또 선지자 중의 대선지자이시며, 만민의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몸을 바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공회를 통해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왕권을 가지고 교회를 다스리고, 선지자권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며, 제사장권을 가지고 성례를 집행하며, 예배를 인도해야합니다.
현대 교회 안에 안수 받는 직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 집사, 혹은 안수장로, 안수 목사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안수의 종류가 각각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로서 안수를 받고, 집사는 집사로서 안수를 받고, 장로는 장로로서 안수받는 것입니다. 장로도 안수받고 목사도 안수 받았으니까 ‘너도 안수받고 나도 안수받았다. 그러니 너나 나나 마찬가지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16~21절을 보면 웃시야 왕이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이가 되어버렸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왕권과 선지자권, 그리고 제사장권을 가진 우리 예수님을 대신하여 교회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을 생각하며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의 자격
목회자의 자격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유명한 영국의 스펄젼 목사는 목회자의 중요한 사명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목회자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하셨다는 확신을 목회자는 가져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을 보면 바울 사도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우리 목회자는 그냥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언자적인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 하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첫날의 예언자라 하면 한자의 미리 예자를 씁니다. 그러나 요즘은 맡길 예자를 씁니다. 이 말의 유래를 살펴봅시다. 예언자는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하는데 고한다, 외친다 등의 뜻입니다. 아라비아 말로는 나바라고 하는데 입에 거품을 품고 말한다'라는 뜻으로 아주 열렬한 부흥사가 입에 거품 품고 말하듯 열정적으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말에서는 나브라는 말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구약학 교수인 올브라잇 박사는 예언자를 하나님의 소명감이 강하여 열정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을 외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개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시기를 등의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예언자의 특징은 아주 철저한 소명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 등 많은 선지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도 부르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 하는 뚜렷한 소명감을 지녀야 합니다. 예언자는 중단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단지 한 번 은혜를 받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서 경건 훈련을 받았다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좋은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 거리를 여행하는 차는 한번 기름을 넣어 목적지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 다 할 때까지,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차에다 휘발유를 채우고 또 채우듯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또 이런 모임을 통해서 쉴새 없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고 농담이나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된 종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실감나게 전하기 위해 웃기기도 하고 예화도 사용할 수 있지만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쥐꼬리만큼 전하고 자기의 말과 쓸데없는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설사 다른 이야기도 하고 예화도 들 수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면 안됩니다. 은혜와 재미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말대신 오늘 참 재미있었습니다 하는 말을 듣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예언자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대부분 말로가 평안하지 못합니다.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할 말을 당당히 하기 때문입니다. 할 말을 못하고 슬슬 피한다면 바른 주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의 모든 주의 종들이 바른 말만 하면 우리 나라의 역사는 바르게 굴러갈 것입니다. 그런데 벙어리 개같은 예언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도둑놈을 보고도 짖지 않습니다. 말 못하는 예언자를 벙어리 개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요새는 개가 잘 짖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에게개야, 개야, 왜 너는 짖는 것이 사명인데 짖지 않니?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나도 다 까닭이 있소하더랍니다. 그래서 무슨 까닭이냐?라고 물었더니 우리는 도둑놈을 보고 짖는 법인데 도둑놈도 도둑놈, 주인도 도둑놈이니 누구를 보고 짖겠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자기가 구린내 나는 삶을 살고 허물과 단점이 있으면 바로 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결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정정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종 사명감도 없이, 이 학교 시험쳐서 떨어지고, 저 학교 시험쳐도 떨어지고, 시험쳤다 하면 떨어지니까 에이 신학교에나 가자 해서 신학교에 간 사람들, 이 사업을 해도 안되고, 저 사업해도 안되고, 땅을 파자니 힘들고, 장사하자니 밑지고, 그래서 에이 목회나 하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장 26절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없고, 무능하고, 문벌이 좋지 않고, 약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를 택하여 일꾼을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치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선택하셨다는 소명 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종이다라는 소명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미나는 어떤 전문적인 지식만 듣는 것보다 훈련코스가 되어야 합니다. 아는 것도 자꾸 연습해야 합니다. 100m 달리기 선수가 100m 뛰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 알지만 몇 천 번, 몇 만 번 뜁니다. 그리고 나서야 1등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훈련소에 왔으니까 훈련을 잘 받으십시오. 믿습니까? 신자들보고 아멘 하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하지 않습니다 (웃음). 신자들보고 앞자리에 앉으라 하면서 자기들은 언제나 뒷자리에 앉습니다. 아주 고약하지요. 하여간 이 소명 의식을 강하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은혜 받은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거듭난 체험이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거듭난 체험이 없으면 주의 종노릇을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오늘 거듭나는 은혜를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거듭나지 못했으니까 설교도 자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엘리야라 하고, 예레미야라 하고,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제자를 대표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걸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너로 알게 했다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믿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베드로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하시는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붙들려 가실 때에 맹세와 저주까지 하면서 3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도 거듭난 것, 구원받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또한 성령을 체험해야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가시는 것도 보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보고, 병든 자를 고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교훈을 받았지만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분부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기도하다가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이틀 기도하다가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구일을 기도하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열흘 동안 간절히 기도한120 문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성령을 받으니까 한 번 외치면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주님 앞에 돌아 왔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한 사람도 이끌어 올 수가 없었는데 성령 받고 나니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것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하면 죽인다고 하는 협박 속에서도 무엇이 어쩌고 어째?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한번 판단해 보아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전도하라고 하는데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라고 하며 전도했습니다. 결국은 끌려가서 십자가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는데 나 같은 것이 예수님과 똑 같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건 너무나 황공한 일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으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성령받은 것은 이렇게 위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웨슬레는 목사의 아들이요, 목사의 손자로서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고, 그리고 아주 규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어 선교사로 미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망하고 조국으로 돌아오는데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때 찬송을 부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가서보니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모라비안 교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죽으면 천당가고 우리 주님이 여기 계신데 월 걱정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웨슬레는 그 말에 감동을 받아 올더스켓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738년 5월 24일, 거기서 말씀을 듣는데 한 무명의 주의 종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었습니다. 그 때 웨슬레는 가슴이 뜨거워져 회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에서는 5월 24일을 회심 주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심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웨슬레의 전기를 보면 얼마 있다가 또 마음이 흔들렸다고 나옵니다. 웨슬레는 그해 마지막 날 송구영신예배 때 작은 집회소에서 철야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웨슬레는 새벽 3시경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하며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증거하여 오늘날 감리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 ″라고 해야 하지만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성령 받으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성령의 체험이 없이 목회를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저도 5살부터 교회학교에 다니며 예수를 믿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교육을 받아 올라왔습니다. 제가 제 말을 해서 안 됐지만 학교에서도 품행이 단정하고 성적이 우수하였습니다. 또 교회학교에서도 언제나 반장을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가서도 열심이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중등부 회장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도 고등학교 때 학도대대장을 했다는 이유로 대대장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게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우리 다닐 때만 해도 정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 나온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냥 얼렁뚱땅 해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식으로 고등학교를 나와서 신학교를 졸업했으니까 공부를 꽤 잘한 것입니다. 그래서 틀림없이 목회하면 잘 할 것이다. 목회하면 성공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저는 맨 처음 목포역 앞에 있는 중앙교회의 전도사로 9개월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참 잘 했습니다. 설교도 잘 했습니다. 어떻게 잘 했느냐 하면 부흥강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적고, 교수들이 설교하는 것을 모두 적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양념도 치고, 노래도 넣어 굉장히 설교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군목 영장을 받게 되어 그 교회를 그만두고, 광주 보광교회에 가서 군목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떨어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늑막염에 걸렀던 것입니다.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좋은데 떨어진 것이 창피해서 아내의 오빠가 있는 부평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늑막염 치료를 받으며 우울한 시간을 지냈는데, 조그마한 교회에서 설교를 부탁해 왔습니다.
부평의 신촌이라고 하는 곳에 개척 교회가 세워졌는데 한달 동안 어떤 집사가 예배를 인도하다가 그냥 내팽개치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한 두어 달 예배를 본 그런 천막 교회였습니다. 가서 보니 교인이 열 두어 명, 많이 모이면 스물 두어 명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몸만 나으면 해군 군목으로 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좋은 목사가 올 것입니다. 그 때까지만‥‥‥‥하며 목회를 한 것이 결국 그 교회에서 18년 동안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부평 신촌교회에서 18년, 지금현재 서울 중앙교회에서 16년 반, 이렇게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재주를 다 동원해도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목회 잘 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몇 년만에 및 백명 모이는지 굉장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7년 동안 했는데 겨우 120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어찌나 부흥이 안 되는지 부흥시키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부흥이 되지 않자 실력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숭실대학교에 학사편입을 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데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보다 훨씬 진지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목사가 되어 그것을 이용하려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철학에 굉장한 홍미를 느꼈습니다. 특별히 훌륭한 교수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안병욱 교수 같은 분은 제게 참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철학을 배워 철학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앞에서도 제가 파스칼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파스칼도 많이 울거먹었습니다. 베이컨도 많이 울거먹고, 실존주의 철학, 분석철학, 과학철학, 칼 야스퍼스의 철학 등도 많이 울거먹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좋지 못한 유혹이 옵니다. 그것은 유식한 설교를 하고 싶은 유혹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야! 저 목사님 유식하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목사가 됩니다.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지 심령 하나하나를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 나는 철학적으로 설교했지하는 자족감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자는 말은 누구든지 다 써먹는 말이니까 그런 말을 쓰지 않으려고, 칼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극한 상황속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을 행사합니다라고 합니다 (웃음). 아주 멋있죠? 이것이 바로 기도 합시다라는 말입니다. 하여간 그렇게 철학적으로 하면 교인들이 더 불어날 줄 알았는데 불어나기는 커녕 줄어들었습니다. 설교가 너무 어려워 잠만 잡니다. 참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해서 철학적인 설교를 해도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여 은혜받으려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특히 계룡산, 성주산, 관악산, 그리고 삼각산, 특히 삼각산 제1기도원, 임마누엘기도원에 많이 갔습니다. 그래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제 친구였던 박춘선 목사가 천안에서 부흥회가 열린다며 참석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짐을 챙겨 천안으로 가서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예배실 맨 뒤에 앉아 설교를 듣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신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제일 똑똑한 거 같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하는데, 도저히 우리같은 고급 사람(?)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질 사람들이나 은혜 받는 줄 알고, 뒤에서 박춘선 목사에게 이 사람아,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오자고 해가지고 괴롭게 만드냐?라고 하며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박목사는 새벽기도나 드리고 가자고 그랬습니다. 저는 새벽기도에 철저했으니까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바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늘 뒤에 않았지만 그날은 앞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런데 강사가 특별했습니다. 설교도 하지 않고 자 손들고 찬송합시다, 손들고 기도합시다, 무릎끓고 하시오, 박수치시오 둥의 요구를 했습니다. 뒤에서는 박수치자 해도 치지않고, 무릎꿇자 해도 꿇지 않고, 손 들자 해도 들지 않고‥‥‥‥뒤에 있으니까 좋드구먼‥‥‥‥ 그런데 앞에 있으니까 강사 보는 앞에서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손 들자 하면 할 수 없이 손 들고, 무릎 꿇자하면 무릎 꿇고, 박수치라 하면 박수치고‥‥‥‥ 그러면서 순종이 참 귀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이 마음으로 다가오면서 모든 죄가 다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막 떨어져 나가는 느낌과 구원의 확신이 생겼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할렐루야(아멘).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어느날 안병욱 교수가 스피노자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스피노자는 철학자가 아니라 철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감동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구원받은 기쁨은 그냥 훨훨 날아가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식구들이 많았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형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형수와 조카, 동생들, 사촌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식구가 열세 명이었습니다. 아내가 다 벌어 먹이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돈을 번다고 유세한다, 어쩐다하며 구박을 했습니다. 한 번은 아주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화가 난 저는 주먹으로 유리창을 모두 깨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시원하기는 시원한데 양심이 괴롭습니다. 새벽기도를 인도해야 하는데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희 집은 교회에서 한 25리쯤 걸어가야 했습니다. 만약 사택이 교회 옆에 있었으면 오늘까지 목회를 못했을 것입니다. 사택은 반드시 교회에서 떨어져 있어야 되겠더라고요(웃음). 싸움해도 괜찮고, 레슬링을 해도 괜찮고, 권투를 해도 괜찮고‥‥‥‥그래도 양심은 있어 새벽기도에 가서 설교할 수가 없어서 전도사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배가 아파서 못간다고(웃음). 그리고 그 이튿날 새벽기도도 또 배가 아파서 못간다고 했지요. 수요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아무리 성경을 펴들고 저와 관계되지 않는 설교를 준비하려고 해도 회개하라는 구절을 보면, 양심이 너나 회개하라라고 소리치고 사랑해라라는 내용을 읽으면, 너나 사랑해라합니다. 겸손해라하면 너나 겸손해라합니다. 아무리 펼쳐 봐도 저와 관련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수요 예배 시간이 다가오는데 마치 사자가 저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오는 것 같았습니다. 수요예배도 배가 아파서 못 나간다고 하면 교인들이 다 좇아 올 것 같아 고민고민 하다가 성경과 찬송, 그리고 담요하나를 가지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습니다. 그리고 삼각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저는 삼각산 제일기도원에서, 지금 이단으로 빠진 양도천 목사가 주최한 전국천국복음선교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 황성수, 차남진, 황병덕, 나운몽 장로가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원래 나운몽 장로에 대해서 교단적으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이 설교를 하니까 당시 그 기도원 학생들이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러니까 꼭 조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또 장로가 밑에 앉고 목사가 강단 위에서 설교를 해야 될 것 같은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았습니다.
우울한 기분으로 홍종일 목사님과 함께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에는 4년 동안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고 풀뿌리를 캐 먹고, 도토리를 따먹으며 기도를 드리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장세각 전도사였습니다. 그 양반이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은혜받았다고 해서 좇아 왔다고 대답하며 어디가서 기도해야 은혜 받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영주봉 거북바위가 있는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은 평평하여 혼자 누울만한 정도의 공간으로 그 앞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나무를 붙잡고 아침까지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예수를 믿었어도 한 번도 주님을 뵙지 못했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환상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뜨거운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여 저에게도 은혜 좀 주소서하며 기도했습니다. 손이 다 부르트도록 기도했습니다. 9시부터 기도를 시작했는데 새벽 1시가 돼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3시 30분쯤 되니까 제 앞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분이 책을 들고 서울을 내려다보시며 양도천 목사가 거기 왔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양목사님이요?하고 묻자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세요?라고 물었으나 아무런 말씀이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장세각 전도사에게 그러한 사실을 말하니까 목사님, 그것이 환상이예요. 환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들으니까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니까 교인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아하,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하며 우리 교회 여전도사님께 삼각산에서 기도하며 환상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거기 가셔서 기도하세요. 글쎄, 거기 가셔서 40일 금식기도 하시면 큰 은혜를 받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그런데 예배당 지으려고 세도 놓고 그랬는데‥‥‥‥”라고 했더니, 아이구. 그건 놔 두시고 먼저 은혜 받으시고 오세요”라고 권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은혜가 없었으면 전도사가 그랬겠습니까?(웃음) 올라갈 때 40일 금식을 하며 은혜를 받으면 내려와서 목회를 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거기서 죽어버리겠다는 각오로 갔습니다. 그때는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박재봉 목사, 양도천 목사, 황병덕 목사, 그리고 이용도 등만이 했을 뿐입니다. ‘남자는 이레 굶으면 죽고, 여자는 남자보다 강해서 아흐레 굶으면 죽는다는데 40일 금식기도 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만약 내가 죽으면 우리 아내는 어떻게 될까. 흘엄씨가 되겠구나. 우리 4남매는 고아가 되겠지. 그런데 마침, 이미 돌아가신 김수목 목사님께서 대한생명보험에 들으라고 자꾸 권하시는 바람에 제일 큰 걸 들었었습니다 (웃음). 생명보험을 떠올리며 ‘아하, 내가 죽을 줄 알고 그걸 들으라고 그랬구나’(웃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삼각산 꼭대기에 올라가면서 ‘눈물 없이 못 가는길, 피 없이도 못 가는 길’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올라갔습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도 못가는 길 골고다의 언덕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네.
주님 제자 베드로도 거꾸로 갔사오니 가리이다 가리이다 나도 그 길 가리이다.
이 찬송을 부르며 올라갔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통일봉, 연주봉, 진실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거기서 담요를 깔고 무릎을 꿇고 ‘주여, 제가 진짜 목사가 되려고 여기 올라 왔습니다.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하는데 힘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네 생명도 보장하고 가족도 책임지겠다” 하셨습니다. 기도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기도 스케줄을 짰습니다. 열흘 동안은 자아 완성에 대한 기도로 자신의 완성과 설교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격을 위해서, 그 다음 열흘 동안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그 다음은 우리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그 다음 열흘동안은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이 네 가지를 놓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했습니다. 새벽에 한 번, 9시에 한 번, 12시에 한 번, 오후 3시에 한 번, 그리고 저녁에 한 번,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했습니다. 오후에는 늘 메모를 하고, 영감이 떠오르면 노래도 짓고, 설교도 쓰고, 또 일기도 쓰며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제가 기도원에 간 사실을 알고 일주일이 지나자 그곳에 찾아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나 전도사님은 일주일을 굶은 저를 보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굶은 저를 보면 좀 불쌍한 생각도 들텐데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걱정 마시고 40일을 꼭 승리하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교회에 붙어 있다고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사님이 금식하고 계신데 어떻게 우리가 밥 먹으면서, 잠자면서 기도하겠는가”라고 하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새벽기도에 4명 정도밖에 나오지 않던 교회가 60여 명이 나왔습니다. 완전히 달라집니까. 종종 교회를 떠나 있는 것이 부흥의 원동력이 됩니다 (웃음). 그리고 교인들에게 양수리 기도원에 가서 세미나에 참석해 은혜 받고 올텐데 특별히 기도 많이 해주세요” 그러면 더 많이 기도합니다.
저는 이스라엘에 가서 한 달 동안 공부를 했는데 그때 우리 교인들, 직원들 6백 명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때 제가 70일간 교회를 비웠는데 70일간 교회를 지키며 목회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했습니다. 편지를 받은 교인들은 목사님이 먼 곳에서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고 마냥 기뻐했답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엽서 한 장이 이렇게 값비싼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는 처음 열흘이 어렵습니다. 그 열흘이 지나면 20일까지는 괜찮고, 30일까지도 뭐 먹은 것도 같고 안먹은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30일부터 40일 사이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때는 그냥 아슬아슬 합니다. 저는 저의 어머님께서 오셔서 수종을 들어주셨는데 그래도 몹시 힘들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속에서 무엇이 자꾸 넘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를 닦고 물을 마십니다. 마지막엔 물을 마시기조차 힘듭니다. 물도 잘 넘어가지 않고 소변을 보면 핏빛입니다. 마지막 날 교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바위 가운데 앉고 빙 둘러앉았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12시를 넘기는 순간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불을 부어 주시는 체험을 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좁쌀 미음을 마시는데 그것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찬가지고 타박하는 사람은 좀 굶겨야 합니다(웃음). 그때부터 저는 어떤 경우에도 반찬을 가지고 타박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음식이면 없어서 못 먹고, 안 줘서 못 먹는 것 빼고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웃음).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후 설교를 하니 일주일에 20명이 새로 나옵니다. 예배당이 꽉 차 뒤로 늘리고, 옆으로 늘립니다. 30평에서 120평으로 늘립니다. 은혜를 받은 통지가 벌써 온 것입니다. 저는 부흥회의 부흥강 사 한 번만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누가 오라고 해야 가지요(웃음). 그런데 40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나니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맨 처음 부탁을 받은 교회가 춘천 영락교회입니다. 처음에 부홍회를 가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저와 이름이 비슷합니다. ‘강사 이만신 목사’라고 써붙여 놨는데 사람들은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부흥회하는 줄 알고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웃음). 그 교회 사모님이 저녁에 한 30명을 데리고 와서 저는 열심히 설교를 했습니다. 그 후 사방에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하여 지금까지, 오늘도 부홍회를 인도하고 왔습니다. 저는 뭐 크게 성공한 것도 없지만 늘의 당신이 된 것은 무슨 연고요?” 고 물으면 40일 동안 몸을 바쳐 금식하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놀라운 경험으로 삶을 180도 전환시킨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생각만을 했는데 은혜받고 난 후부터 사명감을 깨닫게 됐고,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기운을 가지고 목회합니다. 여러분들도 은혜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의 체험을 하며 목회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셋째, 비젼이 있어야 입니다.
꿈과 이상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잠언 29: 18절에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큰 계획, 곧 큰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연을 바래서는 안됩니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는 법입니다. 교회당 건축에 대해서도 큰 비젼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목회의 제일 좋은 조건은 자리를 잘 잡는 것입니다. 로마의 베드로성당, 독일의 쾰른 성당을 보십시오. 그것들은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지은 것입니다. 위싱턴에 있는 성공회 성당은 100년 동안에 걸쳐 짓고있다고 합니다.
저는 김창인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에 가보면 피라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김창인 목사님께 목사님, 참 훌륭하십니다”하였더니 조그만 거 하나 지어 놨는데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교회보다 3배나 더 큰 교회를 구상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저도 교회를 지어보니까 설계한대로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30평 설계하면 30평이 되고, 120평을 설계하면 120평되고‥‥‥‥ 지금 제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는 1,555평입니다. 그런데 좁다고 느껴집니다 ‘크게 지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집을 설계 없이 엉터리로 짓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설계 없이 집을 짓지 마십시오.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신학자, 목회자 혹은 부흥사, 선교사, 목회자 모두 한 세대, 30년의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가능하면 다 집어치우고 개척을 시작하십시오. 개척한 목사라야 큰 일을 합니다. 이중표 목사님도 개척을 했으니까 됐지, 개척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 못합니다. 소신껏 목회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도 개척해서 세계적인 교회의목사가 되었습니다. 김창인 목사도 개척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 세미나 마치고 내려가시면 제일 먼저 사표를 내야합니다. (웃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개척하시라는 말은 거침없이 소신대로 밀고 나가시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강한 리더쉽을 의미합니다. 개척을 하지 않고, 우리 교회같이 80년이 넘은 교회는 나 싫은 사람은 나가시오” 하면 아니 누가 먼저 왔는데 ‥‥‥‥”(웃음). 합니다.
언제든지 단기계획을 세우지 말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장소도 서울이냐, 지방이냐를 결정하고 자리를 잘 잡아야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몇 평, 교인은 몇 명, 장로는 최소한 몇 명으로 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은 44명입니다. 제가 인천서 기도할 때 하나님, 24장로가 성경에 있는데 꼭 24명의 장로님과 함께 목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곱이 되어 있습니다. ‘비젼을 100명쯤 가졌으면(웃음) 더 크게 됐을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그러나 계획을 아무리 잘 세워도 시간표를 정확히 짜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및 년부터 및 년까지는 뭘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는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 : 13)고 하였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 : 26)고 하였으며,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막 9 : 23)고 하였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아버지의 성령으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한 번 해 볼까요. 모두 주먹을 쥐십시오. 이것은 훈련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복창), ‘나도 할 수 있다’(복창), 믿습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있게 도전하십시오. 실패한다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할 수 있다고 하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위로 걸으라 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넷째, 목사는 끊임없이 향상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신학교 졸업해도 그 모양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학교 졸업할 때의 아무개가 아닙니다. 괄목상대할 만한 향상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신학교에서 졸업한대로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발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부흥되는데 목사가 발전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교회와 그 목회자가 같이 맞아야 합니다. 어떤 교회든지 자기 교회에 알맞는 목사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알맞는 목사님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키워 봤는데 키워 놓은 교회에서 배척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크지 않고 교회만 컸기 때문입니다. 옷이 몸의 사이즈에 맞아야 하듯, 교회성장과 함께 목사도 성장해야 합니다.
첫째로 지적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학문적인 직업(Learned profession)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날마다 공부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지식의 권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포하는 말씀에 해박함, 심오함, 특수함, 정확함, 보편타당성과 역사성이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인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배워야 합니다. 연구해야 됩니다. 실제로 적용해 보고 체득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지식을 가져다가 자기 자신도 이해를 못 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그것은 교인들과 맞지 않는 설교일 뿐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세 부류의 학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거미와 같은 학자로 관념론자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둘째는 개미와 같은 학자로 여기저기에서 자꾸 수집만 해 오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지식이 아닌 것을 모아 오는 곧 역사학자를 지칭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꿀벌과 같은 학자가 있는데 이것들을 경험론자들이라 했습니다. 꿀벌은 이 꽃 저꽃에서 꿀을 체취하여 일단 자기가 먹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토해내어 사람에게 꿀을 제공합니다. 이렇게 경험론 철학의 우위성을 강조합니다.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는 많이 하는데 체험을 못하여 해로운 거미줄같은 설교만 하는 거미같은 목사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저기서 설교집을 수집하여 자기 것도 아닌 내용을 가지고 설교하는 개미와 같은 목사도 있습니다. 셋째로 체험한 목사,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은혜를 체험하고 다시 교인들에게 은혜를 나누어주는 목사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4절에 나오는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으로 알렉산드리아 출생이었습니다. 학문이 높고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웠습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족속,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던 사람으로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다소 대학을 나왔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그는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많은 지식과 깊은 은혜가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지식은 많았지만 영적인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역자들은 지식도 많아야 되겠지만 반드시 체험적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지적인 사람이 되려면 항상 배워야 하고 죽을 때까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목사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박사도 많고 유식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제가 목회학 박사를 받았을 때, 장로님 한 분이 오셔서 목사님 박사로서는 제가 선배입니다. 박사가 되면 까딱하다 교만하기 쉬워요. 그러니까 박사가 되면 더 모른 척 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님께로부터 그런 교훈을 받았습니다. 목사는 많이 배워야 합니다. 열심히,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소속을 두고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서 하루에 얼마만큼 공부한다고 작정해도 잘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소속하여 공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지성만 중요시하여 과잉하면 회의적 지성이 되기 쉽습니다. 지성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첫째로 햄릿적 지성이 있습니다. 햄릿적 지성은 회의적, 비극적 지성입니다. 지성은 과잉인데 행동이 빈곤합니다. 둘째로 동키호테적 지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광신적 지성으로 희극적 지성입니다. 행동은 과잉인데 지성이 빈곤합니다. 바람직한 지성은 파우스트적 지성입니다. 이것은 행동적 지성, 영웅적 지성입니다. 지행일치의 실천적 지성입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목회를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의 어느 곳에 가 보니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과, 겨우 신학대학만 거친 사람이 서로 옆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가지지 않은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는 수백 명이 모이는데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에는 겨우 15명밖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목사님에게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제 친굽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기로 해서 제가 이 교회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00교회 장로입니다. 1년동안 목사님 교회에 이 친구를 두었다가 1년이 지나면 데려갈 것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 목사님은 유식해서 유식한 설교만 하시기 때문에 초신자들이 우리 목사님한테 오면 뭐가 뭔지 모릅니다. 그러니 1년동안 평범한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 밑에 두었다가 데려 가겠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유식하다고 교회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 지식만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지식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대학 다니고 대학원에도 진학하며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그래도 좀 부끄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 교회만큼 크면, 박사 과정을 거친 목사, 석사 과정 거친 목사로 세우겠다고 하며 목사님은 신학교 밖에 안나왔으니까 물러서시오” 하면 할 수 없이 물러서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영성, 영적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목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영적 권위입니다. 지성이 철학적이라면 영성은 종교적입니다. 영성은 지성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지식을 가지셨던 분은 아닙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부분이 영적인 권위자들이었습니다. 웨슬레도 지식을 가지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을 가지고 행할 때 성공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권위를 지니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구약의 많은 지도자들, 신약의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요즘 능력을 행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영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평신도들도 기도 많이 하는 시대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입산기도‥‥‥‥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각양의 은사를 체헙합니 다. 바울 사도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신령한 일에 대해서 알지 못 하기를 원치 아니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신령 한 일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육적 질서나 지적 질서가 아닌 영적 질서에 속한 사람들이 목사입니다. 그러나 지성이 빈곤하고 영성만 너무 높으면 동키호테적인 광신적 목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진리가 함께 있는 성령 충만한 주의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Ⅲ. 결 론
목회자는 부지런히 자라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영적으로 충만한 목회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장성한 영적 분량을 잘 감당하며, 교회를 부흥시키고, 목회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