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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서사(德山書社) 이 서사(書社)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절하신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 선생을 봉향(奉享)하는 곳이다. 공(公)의 본관(本貫)은 청안(凊安)이고 고려말(高麗末) 직간신(直諫臣) 충원공(忠元公) 이양길(李陽吉)의 구세손(九世孫)이다. 공(公)은 서기(西紀)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당내(堂內) 청장년(靑壯年)과 인근 장정(壯丁)들을 이끌고 홍천(洪川) 등지(等地)의 적(敵)을 격퇴(擊退)하고 나아가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가하여 경주부 탈환작전(奪還作戰)에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다. 갑오년(甲午年)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한 후에는 복병장(伏兵將)으로 임용(任用)되어 경주 울산지방의 요충지(要衝地)인 서생포(西生浦)에 포진(布陣)하여 장기간에 걸쳐 적의 후속(後續) 상륙(上陸)을 차단(遮斷) 하였으나 끝내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백병전(白兵戰) 끝에 선조(宣祖) 29년(1596) 공의 나이 38세를 일기로 장렬(壯烈)하게 순절(殉節)하였다. 그 후 정조(正祖) 7년(1783)에 당시의 전공(戰功)이 추인(追認)되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贈職)되었다. 그 때 시신(屍身)을 찾지 못하여 초혼(招魂)으로 성분(成墳)한 대동리 부태원(負兌原)에 있는 공의 묘소(墓所) 앞에는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찬(撰)하고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인 금파(琴坡) 이정병(李鼎秉)이 글씨를 쓴 정려비문(旌閭碑文)이 보존(保存)되어 있다. 이 서사(書社)의 경내(境內)에는 사당(祠堂)인 상충사(尙忠祠)를 비롯하여 강당(講堂)의 호의당(好懿堂), 추효재(椎孝齋), 성인재(成仁齋), 동재(東齋)인 수풍재(樹風齋)와 정문(正門)인 입덕문(入德門)등이 있으며 매년(每年) 삼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으며, 대구(大邱) 망우당(忘憂堂) 공원(公園) 내(內) 임란호국(壬亂護國)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덕산서사(德山書社) 봉안문(奉安文) 장석영(張錫英)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백대에 모범이시니 열 살에 당상하시어 이미 자식의 도리를 다하셨고, 저 용사(龍蛇)의 난(亂)에 큰 멧돼지의 무리 횡행(橫行)하여 어가(御駕)는 몽진(蒙塵)하고 팔도(八道)는 상처(傷處) 투성일 제, 공은 비분(悲憤)의 눈물 닦으시며 초야(草野)에서 불근 일어나 적의 길목을 막아서니 그 기세(氣勢) 갑자기 꺽이어 서생포(西生浦) 승첩(勝捷)의 소식 오늘 내일로 기다리던 차, 죽어 말가죽에 싸일 곳, 바로 여기라시며 흉봉(凶奉)을 맨손으로 치다 백인(白刃)을 무릅써 순의(殉義)하셨도다. 궐문(闕門)이 아득하여 장한 업적도 덧없이 잊혀졌건만, 도백(道伯)이 사실을 밝히고, 예판(禮判)이 포상(褒賞)을 주청(奏請)함에, 상계서 이르신 말씀 “아, 그 공적(功績) 아름다운지고! 이에 정려(旌閭)를 내리며 벼슬을 추서(追敍)하노라“하시도다. 덕산(德山) 남쪽에 우뚝 높은 사우(祠宇)를 세워 제례(祭禮)에 따라 시축(尸柷)을 갖추옵고, 유림(儒林)에서 해마다 제향(祭享)을 받드오니, 영령(英靈)은 소명(昭明)하사 이 가운데 계시도다. 삼가 감실(監室)을 받드옵고 의문(儀文)을 갖췄사오니, 원컨대 살펴 내리시와 이에 의지하여 판안하소서 상향축문(常享祝文) 권상익(權相翊) 집에 거하여는 효(孝)를 다하였삽고, 나라를 위하여는 충(忠) 순(殉)하였사오니 백대(百代)에 빛나는 풍채(風采)와 무렬(武烈) 저희의 이충(彛衷)을 일깨우옵니다. 묘우기(墓宇記) 이중철(李中轍) 여기는 옛 충신 두촌(杜村) 이선생(李先生)의 영령(英靈)이 안식(安息)하는 곳이다. 공이 순절한 백여년 후에 조정에서 정표(旌表)하고 추증(追增)하는 은전(恩典)이 있었고, 그리고 또 백여년 후에 유림에서 제향을 받드는 행사가 있게 되었으니 천도(天道)의 나타남과 나타나지 않음이 다 때가 있는 것이요, 또한 공변된 논의(論議)란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깊어져 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슬프다, 임진년 왜구(倭寇)의 변란(變亂)을 차마 어이 다시 일컬을 수 있으리요. 공은 본디 한 젊은 글공부하는 선비로서 어려서는 효행(孝行)을 두터히 하였고, 자라서는 공훈(功勳)을 세울 충모(忠謨)를 실천하였다. 그가 쌓은 바는 충효(忠孝) 두 글자를 체득(體得)한 것으로, 저 대난(大難)에 달려가 큰 전투에 임(臨)하게 됨에 붓을 던지고 무(武)를 익히니, 의기(意氣)와 용맹(勇猛)이 세상에 떠들썩하였다. 이 때 병사(兵使) 박진(朴晋)이 공에게 복병장(伏兵將)의 직임(職任)을 맡김에 공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눈물을 씻으며. 이 바로 신하된 몸으로서 마땅히 말가죽에 시신을 쌀 때이로다 하고 부인과 헤어짐에 근엄하여 수다로운 말이 없고, 우는 어린 아이에 자애로운 마음을 나타내 보임이 없이 드디어 집의 노복(奴僕)과 마을의 종군(從軍)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바로 울산 서생포(西生捕)로 달려가 유격군(遊擊軍)을 조직하여 강어구의 요충(要衝)이 되는 길목을 차단(遮斷)하였다. 그리하여 적을 만나는 대로 몸을 날리어 무찌르니 연읍(沿邑) 일대(一帶)가 거의 여러달 동안 적의 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적의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사면이 위급해지게 되었다. 대새(大勢)는 이미 그릇되어 어찌할 수 없음을 안 공은 오히려 용기를 떨치고 칼을 휘둘러 공방(攻防)에 당(當)했으나, 이미 화살은 다하고 힘도 다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흉적(兇敵)의 창날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았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강토(疆土)를 지키는 장수의 직책에 있는 자도 도망쳐 숨어버린 예가 허다한 판국에 바야흐로 패망이 박두해 있는 즈음에서도 공은 의연(毅然)히 분투하였으며, 또한 신명(身命)을 보전(保全)하여 살기를 도모하는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건마는, 죽는 것을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 같이 보고 갑옷에 피를 뿌리고 백골(白骨)을 거친 들판에 바래게 하니, 이는 오직 나라만 생각하고 자신의 한 몸을 잊은 때문이요, 오직 충성된 붉고 곧은 마음이 있을 뿐 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니, 그날의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족히 논할 만한 꺼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 푸른 산 한 줌의 흙도 이 한 벌의 남긴 옷가지를 묻었음에 지나지 않으며, 제사를 받드는 일도 어느 날 이라 믿기 어려운 그 패진(敗陣)하던 날을 기일(忌日)로 어림잡은 것일 뿐이라. 그러고 보면 우주간(宇宙間)의 바르고 곧은 기운(氣運)은 결코 초목과 같이 썩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흘러서는 강하(江河)가 되고, 응결(凝結)되어서는 산악(山岳)이 되는 것이던가? 또는 고금의 의열사(義烈士)들과 더불어 눈물을 머금고 떠돌아다니며, 이 대륙(大陸)이 침몰(沈沒)해 가는 것을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던가? 이제 번거로운 예식(禮式)을 돌이켜 생각하건데, 정표(旌表)증작(贈爵)으로 분황제(焚黃祭)를 올리던 그 날에 묘우(廟宇)또한 건립(建立)되어 있었던들, 그 빛나는 ‘충신지문(忠臣之門)’의 사액(賜額)에 이어 봉안(奉安)의 의식(儀式)을 동시에 거행할 수 있었을 것을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 한스럽다. 그러나 후인의 높혀 받드는 도리로 사우(祠宇)에 번듯이 걸려 있는 현판의 제호(題號)와 같이 그 덕명(德名)이 실제로 세상에 널리 행해지고 의(義)가 천지에 고루 퍼지어 막힘이 없게 되면 전일 떠돌던 영혼이 장차 이에 의지하고 이에서 오르내려 어둡고 답답하던 마음을 펴고,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미덕을 밝혀 천세만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남의 신하된 사람의 도리는 오직 충(忠)과 의(義)에 머물러야 할 것임을 알게 함이 될 것인 즉,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부지(扶持)하며, 풍화(風化)와 성교(聲敎)를 세우는데 있어 이 어찌 적은 도움이라 할 수 있으리요? 후손(後孫) 용섭(容燮)씨가 잘못 나에게 묘우(廟宇)의 기문(記文)을 청촉(請囑)함에, 진실로 내 그 일을 감당할 사람이 못되기에 마땅히 백배(百拜)로 굳이 사양해야 할 일이나, 내 또한 선생의 풍교를 들은 자로서 그 이륜지심(彛倫之心)에 감격(感激)된 바 있고, 또 스스로 높이 사모(思慕)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바라, 두어 줄 말로써 간략하게 칭송하는 바이나, 이 역사(役事)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는가에 대해서와 또 당(堂). 재(齋). 문루(門樓)등에 대해서는 각각 제호(題號)가 있어 당기(堂記)에 이를 상세히 밝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췌언(贅言)하지 않기로 한다. 서사기(書社記) 이승윤(李能允) 덕산서사(德山書社)는 증참판(贈參判) 두촌(杜村) 이선생(李先生)을 제향 하는 사당으로 세운 집이다. 산 아림의 '덕(德)‘자를 특별히 따온 것은 공의 아름다운 덕(德)을 우러름이 마치 산의 유덕(有德)함을 우러름과도 같음에서니, 그 효(孝)하고 충(忠)하고 의(義)하고 인(仁)함은 다 공의 천성(天性)의 덕(德)이 그의 심덕(心德)으로 구현(具顯)된 것이라, 그러므로 필경 산의 성품이나 사람의 성품은 그 근본 이치에 있어서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공의 휘는 팽수(彭壽)요, 호는 두촌(杜村)이니 그 선조는 청산(淸安)사람이다. 충원공(忠元公)의 후손으로 대현(大賢)의 고을에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孝誠)이 있어 十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밤낮으로 통곡하여 그 슬픈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듣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고, 그 고을을 지나는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 칭송(稱頌)하였다. 장년이 되자 임진란을 만나, 신진(新進)의 무과(武科)출신으로 복병장(伏兵將)이 되어 여러 곳에 기병(奇兵)을 베풀어 유격(遊擊). 기습작전(奇襲作戰)으로 연해요충(沿海要衝)을 지켜, 여러 달 동안 안전을 보장(保障)하는 장벽(障壁)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갑자기 적의 대군이 일시에 들이닥침에, 고군(孤軍) 약세(弱勢)로는 어찌할 길이 없어, 드디어 몸을 날리어 포위한 적군에 돌격(突擊)하여, 칼이 부러지면 맨 주먹으로 치며 한 걸음도 물러남이 없이, 마침내 서생포(西生捕)에서 충의(忠義)에 순절(殉節)하여, 한 개‘인(仁)’을 성취(成就)하니, 이는 국은(國恩)에 보답(報答)하리라 일찍부터 마음먹었던 그 결심에 부응(符應)함이었다. 의관(衣冠)으로써 장례(葬禮)를 지내니, 지나는 사람들이 의사(義士)의 무덤이라 일컬었다. 성상(聖上)께서 정려(旌閭)로 표창(表彰)하시어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명명하시고, 참판(參判)벼슬을 추증(追贈)하시니, 이백년 토록 어둡고 답답하게 사라져만 가덕 행적(行績)이 이에 이르러 슬픔과 영화로움이 함께 이르러 남김없이 세상에 뚜렷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제향(祭享) 받드는 한 가지 일이 아직도 향인(鄕人)들에게 남아있는 숙제가 되어 있었더니, 계유년에 옥산서원(玉山書院)에서 맨 먼저 봉사(奉祀)하는 논의(論議)가 일어나, 남북 향교(鄕校) 여러 곳 유생(儒生)들이 여출일구(如出一口)로 찬성(贊成)하니, 참으로 떳떳한 도리(道理)에 대한 사람의 마음이란 모두 다 같은 것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당(祠堂)은 제호(題號)하여 ‘상충(尙忠)’이라하니, 신하(臣下)로서의 절조(節操)는 ‘충(忠)’을 숭상(崇尙)함보다 더 함이 없다는 뜻을 취한 것이요, 강당(講堂)은 ‘호의(好懿)’라 하니, 저 시경(詩經)에 이른 “사람이 떳떳한 도리를 지킴이여! 아름다운 덕(德)을 즐김 이로다”라고 한 ‘호시의덕(好是懿德)’의 뜻을 취한 것이요, 강당(講堂)의 동쪽은 일러 ‘추효(椎孝)’라 하니, 어버이께 효도하는 마음을 임금께로 옮기어 충성을 다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요, 강당의 서쪽은 일러 ‘성인(成仁)’이라 하니, 한 목숨을 던져 인(仁)의 덕(德)을 온전히 하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뜻을 취한 것이요, 동재(童齋)는 ‘수풍(樹風)’이라 하니, 그 동리(洞里)를 정표(旌表)하여 풍화성교(風化聲敎)를 세운다는 뜻을 취한 것이요, 서재(西齋)는 ‘숭의(崇義)라 하니, 사회(社會)의 풍교(風敎)를 중히 하고, 절개(節介)와 의리(義理)를 숭상(崇尙)하며 장려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요, 외문(外門)은 ’입덕(入德)‘이라 이르니, 이는 충(忠)에서부터 덕(德)의 경지로 들어서게 된다는 ’유충입덕(由忠入德)‘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체로 이와 같이 하면 인륜(人倫)의 도리를 다했다 할 것이다. 슬프다, 천하(天下)의 의(義)가 군신(君臣)에서 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공이 한번 죽어 국은(國恩)에 보답(報答)하게 되었음은 이 곧 충의(忠義) 인효(仁孝)가 그 한 가지 일에 집약(集約)되어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충(忠)과 효(孝)는 본디 둘이 아니라, 인의(仁義)를 실천함에 있어 충효는 하나같이 본체(本體)가 되고, 인의(仁義)는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한 운용(運用)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또한 개개인의 마음속에 본디부터 갖추어 있는 것일 뿐, 외부(外部)로부터 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쇠퇴(衰退)하고 풍속이 각박하여지니, 비록 그것이 마음속에 본부부터 갖추어 있었던 것이건마는 이 또한 침체(沈滯)하고 몰락(沒落)하여 먼저 제 신명(身命)과 처자(妻子)를 보전할 계책부터 한 뒤에야, 그 임금을 생각하는 자가 왕왕이 세상에서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무릇 이 서사(書社)에 들어와 이 당(堂)에 오르는 사람으로서 저 현판(懸板)을 쳐다보며 선생의 어버이에 효도함과 임금께 충성함과 의(義)를 위하여 순절(殉節)함과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룬 그 장한 행적과 의렬(義烈)을 우러러 사모(思慕)하고 감동하는 바 되어 발심분기(發心奮起)하게 된다면, 이는 곧 충효(忠孝)의 풍(風)과 인의(仁義) 도(道)가 장차 얼기설기 굳게 맺히어 길이 우리 고장의 풍속을 이룰 것이니, 이 어찌 세상 풍교(風敎)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아니하겠으며, 또한 서사(書社)에 영광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기문(記文)을 청한 이는 十세손 용기(容基)씨인데, 이 분 또한 마음씀이 대대로 유전하는 그 충요집 사람다운 분이다. 정려비문(旌閭碑文) 영의정(領議政) 정존겸(鄭存謙) 전략(前略) 임진왜란에 고을마다 성은 무너지고 군사는 달아나 사람들은 모두 새짐승처럼 자취를 감추기에 바쁜 판국에 공과 같은 이는 어떻게 처했든 조정에서 탓할 리 없었으련만 분연(奮然)히 초야에서 몸을 일으켜 국난(國難)에 달려가 마침내 삶을 버리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니 이 어찌 열장부(烈丈夫)가 아니리요? 사적(事蹟)은 오랜 세월에 묵고, 자손은 먼 시골에 있어 세상에 드러낼 경황이 없는 채 여러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정려(旌閭)로 표창(表彰)하고,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하여 가물거리던 것을 밝히고 그윽하던 것을 드러내어, 세상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찬연히 빛나게 하니 이는 곧 바른 풍속(風俗)을 세우고, 세상 사람을 면려(勉勵)하는 데에도 그 미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정려기(旌閭記) 예조참판(禮曹參判) 홍양호(洪良浩) 전략(前略) 계림(鷄林)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예로부터 준걸(俊傑)하고 출중(出衆)한 인물이 많이 배출한다고 일컫는다. 내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몸소 산천(山川)을 답섭(踏涉)하고 고인(古人)의 유적을 탐방(探訪)하는 가운데 일찍이 속현(屬縣)인 안강(安康)을 지나다가 길가에 한 무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고장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이의사(李義士)를 초혼장(招魂葬)한 무덤이라는 것이다. 양호(良浩)는 절하여 경의를 포하고 그 후손을 찾으니, 시골 서당의 여러 선비 가운데 준수(俊秀)하고도 다재(多才)해 보이는 이술현(李述賢)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조상의 숨은 사적(事績)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임에 양호(良浩)는 깊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임진왜란에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이 많았으니 혹은 왕명(王命)에 의하여 죽고 혹은 강토(疆土) 수호(守護)의 직책(職責)을 수행(遂行)하다 죽곤 하였으나, 공(公)과 같은 이는 아직 세상에 드러나 있지 않은 신진인사(新進人士) 일뿐으로 조정의 명령을 받는 바도 아니었건만 결연(決然)히 분기(奮起)하여 전진(戰陣)에 달려가 힘을 다하여 강적(强敵)을 누르다가 마침내 거친 들판에 피를 뿌리게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열장부(烈丈夫)라 이를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수백년 동안 사적이 인몰(湮沒)하여 나타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금상전하(今上殿下) 즉휘(卽位) 7년에 상께서 사자(使者)를 팔도(八道)에 보내시어 절의지사(節義志士)를 탐방(探訪)하게 하심에 술현(述賢)이 천리 길을 달려가 연도(輦道)에 엎드려 말씀을 올리니 상께서 탄상(歎賞)하시고 급히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실상(實狀)을 채록(採錄)하여 보고토록 하시었다. 이에 관찰사는 많은 선비들의 기송(記誦)하는 바를 들어 지체 없이 상주(上奏)하기를 “이팽수(李彭壽)는 집에서는 어버이께 효도(孝道)하였고, 나가서는 나라에 순절(殉節)하였으니 마땅히 이를 탁이사(卓異事)로 포상(褒賞)하소서.‘ 함에 상께서 특명(特命)으로 표정(表旌)하시고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이름을 내리셨다. 정려기(旌閭記) 예조참판(禮曹參判) 김상집(金尙集) 전략(前略) 경주(慶州) 관내(管內)의 동북쪽 삼십리쯤 되는 곳에 동향(東向)의 한 무덤이 있으니 이는 곧 옛 충신 휘(諱)는 팽수(彭壽)요, 자(字)는 미수(眉叟)이신 이공(李公) 의 혼을 모셔다 장사지낸 무덤이다. 무릇 사람이란 죽어서 관에 들고 관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제도이거늘 이공은 도대체 어찌하여 그러하지 못하였던고? 슬프다. 일찍이 공으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고 오직 한 몸의 편안함을 도모할 줄 알게 하였던들 어지 이런 일이 있었으리요? 아, 어지 도 차마 말하랴. 임진왜란이 섬 오랑캐의 군세(軍勢)가 몹시도 강성(强性)하여 여러 고을이 잇달아 적 앞에 무너지니 이때인 즉 다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이 바다의 적을 무찌르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장군이 뭍의 적을 무찔러 나라를 중흥(中興)하는 전공(戰功)의 으뜸이 되었을 뿐 그러나 저 병부(兵符)를 차고 옥절(玉節)을 잡은 고관(高官)들에 이르러서는 대개가 새 짐승처럼 자취를 감추어 한 사람도 대항하는 이가 없었다. 이러한 판국에 공과 같은 이로 말할진대, 지위가 낮고 행적(行蹟)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며 또 강토(疆土)를 지켜야 할 직책(職責)도 없는 터이라, 살고자 하였던들 얼마든지 살았을 것이었건마는 공은 이미 의용(義勇)에 분격(奮擊)하여 홀몸에 창 하나로 눈을 부라리며 국난(國難)에 달려가 끝내 물러남이 없이 백병전(白兵戰)으로 적을 무찌르다가 마침내 거친 들판의 고혼(孤魂)이 됨을 감수(甘受)하였으니 고복(皐復) 반혼(返魂)을 화살로써 하고, 장사지냄에 입던 옷으로써 하니 아, 그 장렬(壯烈)함이야 어떠하다 하리요. 진실로 천성의 충의심(忠義心)에 뿌리함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었으리오? 묘갈명(墓碣銘)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薺恭) 일월(日月)이 정려(旌閭)를 비추고 송백(松柏)이 묘소(墓所)를 둘렀나니 공은 찾고자 할진대 공은 이 가운데 계시니라 묘지명(墓誌銘) 부제학(副提學) 청대(淸臺) 권상일(權尙一) 죽지 않았나니 그 기개(氣槪)요, 거두지 못했나니 백골(白骨)이로다. 충성되고 굳센 공(公)의 혼백(魂魄)은 강해(江海)의 어간에 떠돌아 있어 때때로 기나긴 무지개 되어 우러러 해에게로 뻗치는도다. 초혼묘(招魂墓)를 조상(조喪)하는 시(詩) 현감(縣監) 여강(驪江) 이헌락(李憲洛) 무릉의 서쪽 자락 한 웅큼 흙이 이 곧 이의사(李義士)의 무덤이라는구려. 그 날 의사는 죽어 돌아오지 못했어도, 바다 위 떠돌던 영혼화살 따라 돌아왔나니, 때때로 성난 구름 뭉게이락 걷히이락, 해마다 한 맺힌 꽃 피랑 지랑 하는 여기 넋이야 이 어름에 있든 없든 모른다손 그 원수 멸(滅)치 않는 한(限) 한(恨)은 아니 그치리!
출처 :청안이씨집안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정묘사
문천회맹과 경주읍성 탈환기 1592년(임진년) 음력 4월, 왜군이 부산 앞바다를 침입했다. 조선 선조 25년부터 31년까지 7 년간에 걸친 참혹하고 처절했던 임진왜란 당시 신라의 고도인 경주가 가장 많은 인명 살상과 신라천년 유물을 비롯한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 또는 탈취 파괴 됐다.문천회맹(蚊川會盟)은 선조 25년 6월9일 경주 문천가에 위치한 반월성에서 있었다. 문천은 남천이라고 하여 일찍이 경주를 대표하는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천회맹은 팔공산 회맹 화왕산 회맹보다도 앞서 일어난 것으로 많은 의의를 가진다. 의주에서 선조가 보낸 초 격문과 초유사 김성일이 보낸 격문이 함께 도착하자 더욱 분격하여 경주 의병진에 사발통문을 돌렸고 이 통문을 받은 의병 들은 문천회맹에 참가하기 위해 서 경주로 모여들었다.
이계수 등 10여명이 회맹에 참여하기 위해 문천으로 왔고 이를 시작으로 울산에서 이경연 등 11명, 영천에서 정세아 등 14명, 연일에서 김천목 등 8명, 장기에서 서방경 등 3명, 흥해 에서 정일헌 등 11명, 양산에서 박희근 등 6명, 이들은 각각 의 병을 거느리고 왔다. 그 다음날 최계종 등이 정병 300여명을 거 느리고 와서 모였고 후에 박의장이 합세하니 의병군이 4200 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분기에 찬 의사들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하고 향토를 지켜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으로 왜적을 맞아 끝까지 싸워 죽기를 맹세하고 전장의 선봉에 선 결과 마침내 국란을 극복하 고 향토를 보존하게 됐다. 매년 6월9일 임란의사 창의공 원에서 임란의사들의 나라정신 을 기려 추모행사를 갖고 자손 만대 귀감으로 삼고 있다. 조선의 동남에 위치한 경주는 왜군의 강력부대로 정평이 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의 침입로로 점령당해 병참기지화 됐다. 적진 속에 놓여 고 립무원이 된 상태에서 경주의 지식인 들은 창의거병하여 금장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흩어진 관군을 수습했고 영남의 의병들은 경주로 집결했다. 그리고 문천회맹을 결행해 영천과 경주읍 성을 탈환하게 된다. ■ 임진왜란과 금장대 전투
경주성 부윤 윤인함은 61세의 고령으로 박의장이 부윤직책대리를 맡았다. 윤인함은 포장장을 맡아 패잔병과 흩어진 병사와 도망간 병사들을 모아 전투에 참여시켰다. 이후 선조 25년 6월9일 영남의 12 고을의 의병장 132명이 경주 남천의 상류인 월성에 모여 문천회맹을 맺고 경주읍성의 탈환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해 7월27일 영천읍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8월21일과 9월 7~8일 2차례에 걸쳐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했다. 경주읍성 탈환에 참여한 고을 및 병력 수는『 선조수정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제조번방지』 등에 는 16읍 1만여 명으로 되어 있 으나, 손엽의『 용사일기』에는 11읍 3만7000여 명으로 되어 있고, 최락이 지은『 경주 선생안』에는 16읍 5만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왜군은 의병군의 동태를 파악 하고 대처하기 위해 언양에 있던 병력 을 뽑아 읍성 근처와 백률산, 향교 등 에 매복시켰다. 관군과 의병군은 8월21일 새벽 경주성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읍성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금장산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금장산 정상에 올라 아군의 활동상황과 적의 변동을 살피며 전투를 했다. ■ 기록으로 보는 금장대 전투 『수월재실기』 난중일기, 8월 20일 또 여러 의사들은 협모 합진하여 적병 을 크게 깨뜨렸다. 이눌, 이인방, 권응수 는 적을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정세아, 정대임은 허점을 보아 실토했으며, 최 인제 손덕심, 정의번은 힘써 싸웠으나 전사하였다. 『난중잡록』2, 임진년 8월 27일 박의장『과감록』 권1 가전, 9월 초7일 『동경통지』 권12 충의조 김응택은 전투 중 급박한 상황에서도 천죽을 등에 업고 바로 뒤에 있는 구미산 속으로 가 그가 숨질 줄 알고 낙엽으로 몸을 숨겨 놓았다. 그러나 그가 숨을 쉬자 천죽 을 다시 업고 산을 넘으면 바로 고향이기 때문에 그 밤에 산중 70 여리를 달려 집으로 갔다. 그래서 일단 목숨은 건졌지만 끝내 천죽은 불구의 몸이 되어 다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참고자료: 최효식『 경주부의 임진항쟁사』, 신상구 교수(위덕대) 「금장대 컨텐츠 개발 연구 - 금장대 스토리텔링 金丈臺」 계림문화 재연구원「석장동 암각화주변 금장대 중창」, 「경주시 신비로운 경주 삼보 삼기 팔괴」, 경 주문화논총 창간호(1998)를 참조, 인용했음 을 밝힙니다. 파워 인터뷰
최병수 임란추모회 회장 “향토를 지켜야 한다는 충의의 일념으로” 최병수 회장(71)은 경주시 공무원으로 30년간 재직했으며 임란의사 운암 최봉천의 후손으로 천북면 성지리 성남서사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현재 경주 향교 예절 인성교육 예절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금장대 전투에 대해 “금장산은 안강과 영천에서 들어오는 길목에 있으며 서천을 끼고 있어 요새로 활용되었다. 낮은 구릉으로 된 산이지만 읍성이 한눈에 내려 다 보여 지휘를 하기에 좋았다고 한다. 의병들은 경주성을 탈환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격진천뢰에 대해. “당시 왜군들은 조총이라는 총을 갖고 와 전투에 참여 했고 우리는 활로 맞서 싸웠다. 우리 군의 손실은 말을 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영천 군기사의 화포장 이장손이 창안한 ‘진천뢰’ 는 경주읍성 탈환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성안으로 진천뢰를 가져다 화포구에 넣어 쏘면 능히 500~600보가 날아가서 땅에 떨어져 한참 있으며 불이 그 안으로부터 일어나 터졌는데 왜적들은 그 포탄을 만져 보다가 터지면 혼비백산 겁을 먹고 달아났다고 한다.” -기억에 남는 의병이 있다면. “현곡에 사는 서덕천은 사원과 사적 두 아들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현곡 하구에서 의병 창의를 하며 금장산에서 적세를 살피다 순찰하던 왜군에 발각돼 항전하다 전사했다. 아들 사원과 사적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비 다섯 명을 데리고 싸우다 형 사원도 전사하고 말았는데 사적은 의병장이 되어 끝까지 싸워 임란에 큰 전과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진설명 메인-북쪽에서 바라본 금장대. 단청작업 중 난간작업만 남겨두고 있으며 단청의 그림은 월정교 단청문양과 같으며 신라시대 유물에 있는 문양을 재현해 그렸다. 사진1 경주부윤 투구와 갑옷(국립경주박물관 사진제공) 사진2 비격진천뢰(국립진주박물관 사진제공) 사진3 남쪽에서 바라본 금장대. 사진4 최병수 임란추모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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