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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고의 비합리성과 한국 기독교인의 사고
이정모(성균관대 심리학과 인지과학협동과정 교수)
1. 머리말
우리는 나름대로 상당히 합리적으로 생각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우리 주위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수 년 전에 수많은 경제학자, 금융가, CEO들이 한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IMF 위기가 닥칠 것을
예상하거나 대처하지 못했다.
작년 대선에는 많은 이들이, 특히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자기 당의 승리를 끝까지 믿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최근에는 누구도 예측 못했을 정도로 로또 복권 열풍이 불어 수백만의 사람들이 극히
희박한 가능성을 기대하며 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외국에선 수많은 학제간 학과와 교육 과정들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선
대학입시와 관련해 여전히 문과 이과라는 낡은 이분법이 불가침의 성역처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예들을 들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아직도 합리적이지 못한 사회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여서,
그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비합리적 사고들은 일종의 병리적 현상마저 노출하고 있다.
한국교회 내의 온갖 편협한 이분법적, 단정적, ‘미신적’ 사고의 만연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 사고에 강한 서구인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일들이 한국적 문화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한국식 사고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사고 능력이 온전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아무리 신앙이 궁극적으로는 합리성을 초월하는 것이라 해도,
합리적 사고는 여전히 일상적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사고하면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다음과 같은 호주의 어떤 한 부족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가 있다.
어떤 학자가 크펠레(Kpelle) 부족의 한 원주민에게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질문에 대하여 답하게 하는 사고 실험이었다.
실험자: 한 거미가 축제에 갔다. 음식을 먹으려면 다음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질문은: 거미와 검은 사슴은 항상 식사를 같이 한다. 지금 거미가 식사를 하고 있다.
검은 사슴도 식사를 하고 있냐?
원주민: 그들은 숲 속에 있었나?
실험자: 그렇다.
원주민: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냐?
실험자: 사슴은 항상 식사를 같이 한다. 지금 거미가 식사를 하고 있다. 검은 사슴도 식사를 하는가?
원주민: 하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어. 내가 어떻게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
실험자: 대답을 할 수 없을까? 네가 그곳에 없었더라도 대답을 할 수 있잖아. (질문의 반복.)
원주민: 오, 오, 검은 사슴이 식사를 하고 있어.
실험자: 검은 사슴이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알지?
원주민: 검은 사슴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숲의 나뭇잎들을 먹지.
그리고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또 먹지.
그야말로 동문서답 같은 대화지만,
이것은 문화적 요인이 사고 양식을 지배하는 극단의 예를 보인 것이다.
‘저개발국가’ 사람들은 감각적 인상에 의존하여 체험적인 실제 경험에 의해 사물을 생각하게끔 훈련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논리적 사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 사고 능력은 갖고 있으나, 일상의 사고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관찰 경험에 바탕해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이다.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바, 믿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호주의 한 원주민 부족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나은 사고를 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지난해 선거에서 극단으로 양분되었던 우리 국민 전체의 사고 방식이라든가,
세계 어느 나라도 뒤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점술이 성업중인 현실이라든가,
광신적 신앙 집단이 도처에 번성하고 있으며,
헌금 액수와 축복이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다수의 기독교 및 불교 신도가 존재하며
그러한 사고를 부추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상황이라든가,
심지어 목회자가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고 성적 관계를 요구하면 순종해야 하는 신도까지 있다든지,
종말론의 횡행이라든지, 그리고 교회 안팎의 여러 현상들을 볼 때, 과연 우리의 사고가 호주의
원주민들보다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 의심이 든다.
인간은, 우리는, 한국 기독인들은 정말 온전한 사고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2 인간은 합리적 존재?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인간 이성은 합리적이라는 명제가 인간들이,
특히 서구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다.
서구 철학과 논리학에서는 인간 이성이 합리적이라는 전제 위에 인식론을 전개하였고
사고의 논리 규칙들을 도출하였다.
이런 입장은 사람들이 문제 상황에서 논리적 사고와 합리적 판단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논리 규칙에 맞지 않는 사고, 자신의 욕구를 최적화하지 않는 행위의 선택은 비합리적인 사고들이며,
인간 이성이 마땅히 보여야 할 합리성을 벗어난 잘못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철학에서 인간 이성의 합리성 관점이 유지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회과학에서도 인간 이성의
합리성 관점은 문제시되지 않고 전제되어 왔다.
경제학, 정치학, 행정학, 법학, 정치학 등 모든 학문들에서 인간이 합리적 이성을 가지고 사고하고
결정하고 선택한다는 전제를 깔고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적인 제도, 정책들이 입안되어 실시되어 왔다.
이들 학문들에서, 그리고 일반 상식에서, 인간의 감정은 비합리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며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한, 또는 신체적 피로 요인이 개입되지 않는 한,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이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일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판단하고 결정하는 당사자에게 있다는
것이 당연시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인지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지난 20여 년 간 심각하게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인지과학적 연구, 특히 인지심리학적 연구들은, 인간 이성이 감정의 개입 때문에 비합리적이 될 수는
있으나 이성 그 자체는 본래적으로 합리적이라는 통념에 대해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감정의 개입 때문이 아니라, 이성 자체의 본질이 주로 합리적 원리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3. 인간 사고의 정보처리적 한계성
인간의 마음은 각종 자극에 대하여 정보처리를 하는 인간 뇌의 정보처리 능력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뇌의 정보처리 용량과 처리 전략은 제한되어 있다.
목수가 일하는 작업대 위에 많은 일감을 한꺼번에 쏟아 부으면 작업대가 작아서 그리고 일손이 딸려서
작업을 제대로 처리 못하듯이, 인간의 마음도 각종 자극 상황에 대하여 주의하고, 지각하며, 인식하고
이해하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지적 작업대의 크기와 지적 일손
자원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뇌의 정보처리적 제약성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가지 한계적 특성을 보인다.
인간은 순간 순간마다 천문학적 양의 엄청난 정보를 접하지만 주의 용량의 한계, 기억 용량의 한계,
지식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정보처리의 효율성을 위해서 이들의 일부만 주의할 수 있고
나머지는 무시된다.
주의하여 인식한 대상에 대한 기억을 살펴보아도 기억은 사진 복사와 같은 방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 믿음, 동기, 정서 등에 의하여 주어진 바와는 달리 구성되고 왜곡되어
저장되며, 또 저장된 것이 그대로 다 기억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억에서 꺼낼 때에도 지식, 편견 등에 의하여 재구성되는 것이다. 언어의 이해도 있는 그대로의 이해란
존재하기 어려우며, 항상 이해자가 자신의 지식,
믿음 등을 동원하여 추론하고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사고의 세부 과정을 들여다보아도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대상이나 사건을 일단 범주화하여야 사고가 제대로 진행되는 데, 범주화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런 뚜렷한 범주 경계가 없으며, 범주를 가르는 기준이 항상 가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범주의 수를 가능한 한 줄이려 한다.
흑백논리식 이분법적 사고는 바로 우리가 여러 개의 범주를 동시에 주의하고 기억하여 정보처리하기가
어렵기에 일어나는 인간 정보처리 능력의 제한성, 지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 추리를 함에 있어서도 인간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합리적 논리적 사고자가 아니다.
정보처리의 한계성 때문에, 사고의 논리성이 결여되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더라도,
즉 정확성을 희생하면서라도, 비논리적 비합리적 편향이 개입되더라도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서
정보처리가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이게 하는 방향으로 사고하는 것이 인간 추리의 특성이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객관적 자료보다는 개인의 사전지식과 동기에 의존하는 경향성이 크다.
흔히 자신의 기존 지식을 과다하게 적용하고 특정 자료, 대상에 대한 편향적 선호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주먹구구식적, 즉 편의법적(heuristic) 사고를 하게 된다. 객관적 통계 자료 등에 대해
둔감하며, 정보를 주어도 잘 활용하지 못하며 (기상 예측, 명절 시 교통 예측), 그리고 기회와
우연에 대해 실제와는 다른 그릇된 관념을 지니고 있고, 예언 가능성을 무시하고 주어진 정보의 신뢰성,
내적 일관성, 충분성에 상관없이 그 정보가 자기가 기대하는 바와 부합하느냐 여부에 의하여 판단한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것에 고루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며,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하며,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충분히 사고하지 못하며, 정확하게 기억하지도 못한다. 인간은 각종
상황에 대하여 선별적으로 인식하며, 현실과는 다르게 인식하고 사고한다.
거울처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여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인간
이성의 특성이 아닌 것이다.
인간 인식능력의 정보처리적 한계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인간 이성의, 인간 사고의 본질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심리학자-인지과학자로서 1978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 교수나, 작년 2002년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인지과학자
다니엘 카네만 교수가 밝혀낸 업적이다.
4. 한계적 합리성: 두 노벨 경제학상 수상 심리학자의 관점
단순한 숫자 계산기에 지나지 않았던 컴퓨터를 오늘날과 같이 각종 정보를 다루며 인간의 지적 능력과
유사한 능력을 지닌 기계로 개념화하고 정보화 사회의 개념적 틀을 제공하여 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의 한 사람이 19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 허버트 사이먼 교수이다.
그는 이러한 노력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심적 자원의 정보처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인간
이성이, 사고가, 한계적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 주었다.
피로나 감정이나 동기가 개입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사고 자체가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최적의
해결을 찾아내는 합리적 메커니즘은 아니라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최적인 결론, 결과보다는 한계적 정보처리 능력 내에서 그리고 제한된 정보처리
시간 내에서 어느 정도만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수준까지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고라는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과 카네만 교수는 작고한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 교수와 함께 이러한 사이먼
교수의 생각을 경험적으로 확인하며 새로운 개념 틀로써 발전시켰다.
카네만 교수는 1979년의 획기적 논문에서, 고전적 경제학에서 지배적으로 인정되고 있던 생각 즉
사람들은 자신에게 최대의 이익을 가져오는 결과를 도출하게끔 합리적으로 결정한다는 그러한 관점을
반증하였고, 사람들은 미래의 결과가 불확실할 때는 논리적 합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의법적 방식에
의존하여 판단하며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사고가 전통적 합리성이라는 규준에 어긋나게
작용하는 편향적 사고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그리고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편향적, 오류적 사고를 보이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5. 인간 사고의 편향적 오류의 특성
카네만 교수 등이 연구한 결과에 기초하여 인간 일반의 사고의 오류적, 편향적 특성과 그와 연결된 한국
기독교인의 사고 성향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생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단, 한국 기독교인의 사고 성향에 대한 언급은 정식 경험적 조사 연구에 의한 자료가 아니라
필자의 직관적 추정에 의함을 밝혀둔다.)
〈범주적 사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대상과 상황을 범주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길이나 전철, 버스, 백화점 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하여,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컴퓨터 관련 일이 기술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한 채 범주화한다.
그러나 실상 모든 대상과 사건의 범주를 규정짓는 속성들은, 즉 범주경계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확연히 가를 수 있는 유일한 속성, 경계란 없다.
범주의 경계란 맥락, 상황에 따라서 다르며, A범주에 묶어 넣은 것이 사실은 B범주 속성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분법적, 흑백 논리식 분류 범주화란 실제의 대상이나 현상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 때문에 흑백식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여
범주를 가르게 되고, 일단 어떤 범주에 묶어 넣으면 실제로 그 속성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속성을 몰아 넣게 된다.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는 곧 지적 능력의 한계와 연결된다.
불신자 또는 기독교가 아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상한 인간으로 취급한다든지,
‘예수 믿으면 천당, 예수 안 믿으면 지옥’ 식의 이분법적 사고라든가,
방언을 하면 신앙심이 깊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심이 옅다는 초등학교 식의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는
바로 이러한 인간 사고의 범주화의 정보처리적 한계, 지적 능력의 한계를 반영한다.
참 신성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러한 사고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판단과 결정〉:
매일 우리는 오늘 입고 나갈 옷이나,
외식의 경우 식사를 무엇을 할 것인가,
몇 번 버스나 전철을 탈것인가,
아침에 승용차를 갖고 나갈 것인가 등을 판단하여 결정한다.
물론 건강 검진에서 암 가능성이 발견되어 수술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주식투자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의 중요한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상황에 있어서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우리가 생각하기보다는
상당히 비합리적이며, 편향적이고 오류 투성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첫째 특성이 확인편향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
믿는 바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범주화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을 논리학, 인지과학에서는 확인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고치기 힘든 확인편향적 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
며느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 눈에는 며느리의 모든 것이 부정적이고,
나쁜 것으로 범주화되고,
그렇게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제3자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칭찬할 특성도 시어머니에게는 며느리의 좋지 못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측면으로 해석된다.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밉게 보이기 시작한 시어머니의 모든 말, 행동들이 나쁜 시어머니라는 자신의 생각,
믿음을 확인하여 주는 증거로 판단되고 범주화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재판에서 검사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모든 대상이나 사건들,
상황들을 죄인의 죄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인식하여 범주화하고 판단, 결정하게 된다.
변호사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로의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확인편향적 사고는 전문 과학자에게서도 일어난다.
또한 이러한 확인편향이 있기에 우리는 연애 시절에 상대방의 좋은 점만 눈에 들어오고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하여 결국 결혼하게 된다.
이러한 확인편향이 없었다면 과연 결혼이라는 문화 양식이,
아니 더 나아가서 인류의 존속이 가능하였을까 의문이 가기까지도 한다.
이러한 확인편향적 사고를 하는 대표적 집단이 정치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기 당의 관점만이 타당하고 좋은 관점이라 믿고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만 찾으며, 다른 측면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자료, 의견만 듣고 다른 의견들은 거부하게 된다. 산업개발지상주의자, 환경/시민 운동가, 교인들의 사고 방식도 이러한 확인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단점만 눈에 띈다든지,
우리 교회 목사님이 하는 일은 다 옳다든지,
번역된 성경의 무오류성을 맹신한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확인편향의 예들이다.
또한 자기가 갖고 있는 신관, 신학관, 그리스도관, 목회자관을 지지하는 말이나 성경구절,
그리고 그런 성경구절을 지지하는 생활 속 사례들만 눈에 띄고 그 옳음을 확인하여
주는 쪽으로만 확신된다는 것 등은 다 확인편향의 예이다.
심하게 표현한다면,
인간의 확인편향적 정보처리 특성이 없었다면
어떤 종교든 세상에 오랜 기간 존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용성(可用性) 편의법〉:
우리는 대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판단할 때,
우리 주변에서 그 대상이나 사건의 발생 빈도가 높은 부류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하여 편향을 지니게 된다.
사건이나 대상을 쉽게 기억 또는 떠올릴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그 대상,
사건의 빈도나 확률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용성 편의법이라고 한다.
서울사람은 다 ××도 사람이야. 고위관리직은 모두 ××× 출신이야...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집 근처나 친구,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서 과다하게
일반화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식으로 범주화하여 판단하고 결정한다.
또한 유망한 사업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실패한 사례가 있으면 시도조차 안 하기도 한다.
기억에서 쉽게 찾아지거나 생각해 낼 수 없으면 가능성,
확률을 적게 생각하고 판단,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삶을 부르짖으면서도 기도를 하거나 복을 빌게 되면,
나, 내 아이,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교인, 기독교인, 한국인 등에 편향되어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가용성에 의존하는 인간 정보처리의 한계가 아닐까?
〈착시적 상관〉:
우리는 한 사건이 의미적으로 다른 하나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면 함께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다. 어떤 정치가의 부친이 일본 관리였다던가,
친척이 좌익이었다 하면 그 사람까지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실제는 상관이 없는데도 과다한 상관 관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 비기독교신자 또는 그의 자녀가 비행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예수를 안 믿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나,
예수를 비난하거나 교회를 욕한 사람이 사고를 당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하던가, 좋은 일을 하였더니,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였더니 재물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 뉴욕 참사를 비롯한 각종 부정적
인간사를 신의 진노로 해석하려는 것은 착시적 상관 사고의 오류일 수 있다.
〈회귀에 대한 오해〉:
천재 집안의 가계를 살펴보면 천재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지능의 아이,
저능아도 태어난다.
탁월한 골프 선수가 아닌 사람의 경우는 잘 치는 날도 있고 잘 못치는 날도 있다.
자연은 평균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어떤 노력에 의해서나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서
더 좋아지거나 나빠진 것이 아니라 들쭉날쭉한 것이 자연적 현상인 것이다.
신이 창조한 자연의 자율적 원리에 의하여 들쭉날쭉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개개의 현상 각각에 신이 일일이 개입하여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성이 빚어내는 일종의 확인편향적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지닌 사람은 이러한 사고의 오류에서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할인〉:
인간의 사고 특성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할인이다.
에어컨을 살 때에 당장은 싸지만 비경제적인(전기 소모가 더 큰) 것과 아니면 조금 더 비싸지만
경제적인(전기소모 적은) 것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전자를 선택한다.
3년 후면 후자가 훨씬 더 이득인데도 불구하고 전자를 선택한다. 사람들의 미래할인율을 계산해 보면
약 25% 심지어 70%가 될 경우도 있다. 인간은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동등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미래의 가치가 실제보다 할인되며, 현재의 가치가 실제보다 할증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신자들은 불신자들보다 미래에 대한 할인이 적다고 할 수 있다.
현재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며, 삶의 과정에서 사후 세계의 문제들에 대하여 현재
못지 않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종교생활이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미래 할인 경향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나중에 후회하고 속죄의 기도를 올려야 할 좋지 않은 일을 지금 억제하지 못하고 행하거나,
또는 좋은 일을 행하지 않고 기피하기 때문이다.
좋은 신앙생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랑의 삶을 통해 미래에 맛볼 충일함이 지금 당장 그 가치가
할인되고 현재의 안락이 부각되어 할증되기 때문이다.
서구인에 비하여 한국인이 당장의 단기적 결과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래할인적 사고가 강하다고
하는데, 한국 교인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물론 이것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치함수〉:
두 개의 인접 산봉우리는 어느 산에 올라가서 보느냐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동일한 양의 이득이나 손실도 그것이 이득이냐 손실이냐에 따라 그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
인간의 사고 특성은 동일한 정도의 이득보다는 손실에 더 비중을 둔다.
10만원을 얻은 것보다 10만원을 잃은 것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주관적 가치의 평가, 즉 가치함수의 기울기가 다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인지적 특성 때문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행한 일을 당하면 크게 후회하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비슷한 정도의 이득을 얻으면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열심히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려 하지만 잘 잊고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신으로 남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인간 인지의 본질적 특성에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적(egocentric) 사고〉:
발달심리학자 삐아제의 연구에 의하면,
유아들은 자기 앞에 놓인 물건을 건너편에 앉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중심적 사고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똑 같은 현상이 기독인 대부분에게서 일어난다.
신실한 신도라고 하지만,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상황과 생각을, 그들의 느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시 나 자신의 느낌, 상황, 생각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어른들은 타인의 처지를 알고도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사고가 아직도 유아적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의 극단의 예는 인간중심적 신관에 있다.
그것은 신이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존재한다는 식의 인간중심적 혹은 신인동형론적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신을 상과 벌을 주는 존재로 개념화하는 사고이다.
우리가 잘 행동하면 신이 상과 복을 내려 주고, 잘 못하면 노하고 벌을 준다는 유치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사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잘 하면 기뻐하고 상주며, 잘 못하면 노하고 벌준다는 개념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후에 생겨난 관념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인간적 관념을 창조주 하느님께 무비판적으로 입혀 놓는 것은 바로 유아적인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한계에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6. 한국 기독교인의 사고 방식의 재구성: 특히 상벌의 하나님 개념을 중심으로
어떤 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많은 짐승들이 죽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신의 노여움도, 신의 축복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이 신의 섭리대로 작동하는 과정상에서 일어난 전체 자연 현상의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한 개체가 죽고 사는 것은 신의 노여움과 기쁨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신이 태초에 만들어 놓은 그 질서에 따른 작은 물방울의 일고 짐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개체의 생각이나 행동 하나 하나의 잘잘못은 신의 기쁨과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감정의 메타포를 빌어 이야기한다면, 신은 그저 담담히 그 현상을
보시고 수용할 뿐이다.
인간이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 만들어 낸 상과 벌, 그리고 기쁨과 분노의 개념, 이러한 인간적 개념을
신에게 직접 입히는 일상의 잘못된 편향적 사고 연습을 우리가 멈출 때, 그것이 하나의 메타포임을
망각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런 것들을 넘어서는 신의 개념을 정립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독일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하는 참 하나님 혹은 ‘신성’(Gottheit)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식 이분법 인식틀은 조로아스터교로부터 와
인간이 행동을 잘 하면 하늘로부터 보상을 받고 잘 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종교에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오랜 관념이기는 하나, 특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서 강조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참 신이 그러한 유아적 인간의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인 상벌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창조세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에서 나온 유치한 생각이 아닐까?
참 하나님은 그런 것을 넘어서는 차원의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도덕 개념의 발달은 그 개인의 지적 능력 수준에 달려 있다.
인간의 도덕적 발달을 지적 발달 수준과 연결시킨 이론을 제시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던 심리학자
콜버그(Kohlberg)에 의하면, 인간의 도덕성 발달은 지적 발달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여러 단계를 거친다.
1, 2단계는 생후 4세에서 10세 사이의 아동기로서,
1단계는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규범에 맞는 행동을 하는 단계,
2단계는 보상을 받기 위해 타인이 만든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단계,
지적 발달이 더 이루어진 단계인
3, 4단계는 10세에서 13세 소년기의 단계로서,
3단계는 타인을 기쁘게 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규범적 행동을 하는 단계,
4단계는 법과 질서 지향적이어서 의무로서 규범을 지키는 단계이다.
13세 이후의 성인기의
제5단계는 사회적 계약과 합의에 의한 기준을 따르는 단계,
6단계는 양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보편적 도덕성의 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7단계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존재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행위를 하는 단계이다.
지적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어릴 때는 인간은 상과 벌의 외적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지만,
성숙한 인간이 되면 이를 넘어서서 보다 상위 수준의 규준에 의하여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인간도 성숙하면 이러한 단순한 상벌의 규준이라는 아동기적 개념화 수준에서 벗어나는 데,
하물며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잘 하면 상을 주고, 잘 못하면 벌을 주는 그러한 낮은 지적,
도덕적 수준의 존재라고 개념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지적 수준이 낮은 단계의 사람들 중심으로 신이 세상을 운영한다!?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볼 때, 신이 이 세상을 그러한 상벌의 단순 원리로 운영한다는 것은
신의 본질을 너무 격하시키는 것 같다.
개개인의 행동에 따라 상과 벌, 심판을 내리는 그러한 단순한 신의 개념화란 인간의 한계적 사고의
이분법적 범주적 사고와 확인편향적 사고, 착시적 상관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나는 본다.
신은 그러한 낮은 수준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적) 사고를 하지 않는 하나님! 아니, ‘사고’가 없는 하나님!
그것이 참 하나님의 본질이 아닐까?
신의 상벌 개념으로 전개되는 모든 종교적 개념들, 제도들, 예식들, 말들... 약속과 규제와 협박들.
모두 다 지적으로 미숙한 인간이 미숙한 자신들의 모습을 흉내내어 만들어 내어 억지로 신에게 갖다
입힌 덧옷, 덧칠이다. 불경한 짓을 하는 것이다.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지적으로 미숙한, 인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근원적 존재, 참 존재이다.
상과 벌의 개념!
그것을 깨끗이 빼어 버릴 때에, 그리고 보다 높은 수준의 원리의 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성숙한 사고를
할 때 비로소 하나의 종교는 참다운 신의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한 재 개념화된 신관 위에서 종교의 교리는 전개되고 신실한 교인의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불교이건 기독교이건 간에.
인간의 한계적 사고가 만들어 낸 온갖 왜곡된 신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얻는다.
그 참 자유란, 참 신의 개념 안에서, 보다 상위적 원리의 신의 세계 안에서, 보다 고차원적 수준의 우주적
삶의 원리 안에서 신과 밀접하게 하나가 되는 자유로움이다.
그것은 아동기적인 유치하고 단순한 사고에 기초한 상벌 위주 신관에 따른 삶이나, 사고의 한계와
편향성으로 점철된 삶이 아니라, 성숙한 사고를 통해 보다 깊고 넓고 본질적인 의미의 우주적 신관
안에서, 그 원리와 내가 일체가 되기 위해 무한한 책임과 의무와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신’ 속에 ‘매임’을 통하여 우리는 참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사고의 본질에 내재하여 있는 비합리성, 오류 경향성,
편향성을 극복하고 보다 온전하고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끊임없는
반성적 노력을 하여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