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에서 제사를 지낼때의 계욕장소
계욕장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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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에는 ‘포석사’ 또는 줄여서 ‘포사’(鮑祠)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포석사 또는 포사의‘사’는 사당‘사’(祠)자다. 사당은 신주를 모셔둔 집이다.
1999년 5월7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포석정(鮑石亭) 남쪽 담장 밖 유적을 조사하다 폐기와 무지에서 '포석’(砲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발굴하였다
깨진 평기와는 가로 5.5㎝, 세로 8㎝의 네모난 구획으로 나누고 그 안에 포(砲)자는 4.3㎝x4.0㎝, 석(石)자는 2.4㎝x3.0㎝의 크기로 쓰여져 있다.
포석(砲石)은 포석정(鮑石亭)의 포석(鮑石)을 발음대로 쓴 것이다. 영묘사(靈妙寺)를 영묘사(令妙寺)로 쓴 신라시대의 기와가 출토된 예를 보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신라인들은 어려운 한자를 쉬운 한자로 바꾸어 기와의 명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포석명 기와의 출토로 포석사가 삼국시대 신라의 사당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됐다. 뿐만 아니라 제기에 사용되었을 토기와 술잔 등 제기류도 출토됨으로서 경애왕의 유흥장소가 아닌 국가적인 행사나 제사의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신라시대에 포석사는 무엇을 하던 사당이었을까.
“화랑세기”에는 이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자료가 있다. 포석사에서 길례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고대에 행하던 5례에는 길례·흉례·빈례·군례·가례 등 5가지가 있었다. 그 가운데 길례는 제사의 예를 가리킨다
김춘추와 문희가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하였고 12세 풍월주인 보리공과 동륜태자의 부인 만호태후의 딸 만룡 역시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했다. 또 문노와 그의 부인 윤궁이 포석사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이러한 행사에 앞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는 계욕행사가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몸을 씻는 계욕장소로 보여지는 웅덩이가 포석정 옆으로 흐르는 개울의 큰 바위돌에서 확인되었다
한사람이 들어갈만한 크기로 깊이가 약 1m정도인 웅덩이며 개울의 바닥물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따로 동쪽의 산기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들어오게 물길이 파여있고 이 물은 다시 서쪽의 수로를 따라 개울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수로와 웅덩이 둘레에 깎은 흔적이 역력해 이 웅덩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2007.11.1)
첫댓글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