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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송광사
1. 송광사의 유래와 연혁
(1) 송광사 유래
송광사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조계산에 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조계산은 호남 정맥의 영산으로 덕유산, 추월산, 무등산 등과 함께 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이며, 송광사와 선암사를 동서 양록에 안고 순천시 승주읍․주암면․송광면․외서면․낙안면․상사면을 품고 있다.
옛날에는 송광사 뒤 영봉을 송광산(松廣山), 선암사 뒤 장군봉(884m)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송광산은 부유현(富有縣, 당시 순천부에서 60리 거리. 현재의 주암면 창촌리 일원) 서쪽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도 조계산과 송광산을 구별하여 불러 온 것 같다.
《송광사지》에 “당 고종 원년(661년)에 육조대사가 황매(黃梅)의 법인(法印)을 받고 … 영남 소주부(韶州府)-광동성 곡강현(曲江縣)-의 조후촌(曹候村)에 이르셨다. … 조숙량(曹叔良)이 공경하여 근처에 있는 쌍봉의 대계(大溪) 위 … 보림(寶林)의 터에 곧 대범찰을 세우고 대사를 맞아 주석시키매, 문득 은성(殷盛)한 보방(寶坊)을 이루게 되었다. 대사가 9개월여를 지내신 뒤에 이 시은(施恩)을 갚기 위하여 이에 조숙량의 ‘조(曹)’ 자와 대계의 ‘계(溪)’ 자를 떼어 조계로써 그 산 이름을 지으시니 …고려 중엽 보조국사가 조계종 굴산파(崛山派)의 종도로서 … 송광산에서 정혜(定慧)로 사를 맺으시고 … 조계종지를 크게 천양하셨다. 희종께서 … 어필의 친서를 하사하시니 이것은 국사의 도예를 지명(地名)에 붙여 영세에 흐르게 한 것이다.” 고 연원을 밝혔다.
그러나 선암사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선암사 일주문의 안쪽 현판에〈고청량상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 안택희서〉라 새겨 있고, 1828년에 새긴 대웅전 안의 현판 〈조계산 선암사 제육창건기〉에 “신라 법흥왕 때 아도(阿度)가 일선군에서 왔는데 예관한 김상흠이 성적과 번수하던 곳을 사모하여 기도하다가 꿈에 기별을 받고 비로소 가람을 창건하고 해천사(海川寺)라 일컬었는데, 다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다. 또 고려 선종 때 송나라에 들어가 불경을 가지고 환국한 대각국사가 선암사를 중창한 사실을 기록한〈조계산 선암사 사적비명병서〉에는 “그 뒤 고려 때 이르러 대각국사가 중창하고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 바꾸었으며 일곱 구역에 선원을 세워서 나라에서 조계종을 존경하게 되었는데 선종(宣宗)의 가르침을 존경한 것이다.” 고 기술하였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의천 대각국사가 조계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백여 년 뒤에 보조국사가 정혜결사를 하고 수선사(修禪社)를 개창하자 희종이 송광산를 다시 조계산이라 명명한 것 같다.
장군봉의 팔부 능선에 ‘배바구’가 있다. 이 바위가 선암(船巖)이다. 옛날에 ‘배바구’까지 물이 차 사람들이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고 ‘배바구’ 라고 부른다는 설화가 전한다. 그러나 선암사의 기록은 호남에 삼암(三巖)이 있다. 영암의 월출산에 용암(龍巖), 순천의 조계산에 선암(仙巖), 광양의 백운산에 운암(雲巖)이 그것이다. 도선국사가 다 그 곳에 절을 세웠다. 옛날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곳이다. 때문에 선암(仙巖)이라고 기술하며 조선 숙종 때 ‘배바구(배바위)‘에서 호암대사가 백일기도를 하고도 문수보살을 뵙지 못하자 신심이 두텁지 못함을 한탄하고 투신 하였는데 꽃같은 처녀가 치마로 받으며 ‘스님, 떨어지면 죽는 걸... ’ 하니 스님이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문수보살은 ‘보고도 모르시오.’ 하였다. 스님은 엎드리어 절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문수보살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이에 대오각성하고 선암사를 중창하였고 승선교를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송광산은 ‘솔메’가 원이름이다. 전남에서는 소나무를 ‘솔갱이’ 라고 한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솔’을 송(松)으로 ‘갱이’를 강(崗)으로 옮기고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복지라서 송광산(松廣山)으로 한자의 옷을 입힌 것이다. 송(松)자를 파자(破字)하여 ‘十八公’으로 보고 송광사에서 18 국사가 배출될 것인데, 이미 16 국사가 배출되었으므로 앞으로 2 국사가 더 배출되리라는 기대를 한다. 그러나 이는 점성가의 허황된 풀이로 본다.
보조국사의 제자 수우(守愚) 스님이 절터를 찾기 위해 모후산에서 나무 솔개를 세 마리 날렸더니 한 마리는 담양의 추월산에, 다른 한 마리는 여수의 흥국사에, 또 한 마리는 송광산의 치락대(鴟落臺)에 앉았다고 한다.
(2) 송광사 연혁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 및 승평속지(昇平續誌)등을 보면, 신라 말기에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당시에는 길상사(吉祥寺)라고 불렀고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의 석조(釋照)가 중창하려는 원을 세우고 役夫를 소집하고 林木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죽었으며,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50여년을 지난 뒤 보조국사가 이곳으로 정혜사(定慧社)를 옮겨옴으로써 새 규모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보조국사가 송광사를 대규모 도량으로 만들 수 있었던 연원은 1182년(명종 12) 개성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수행결사(修行結社)를 약속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법회에 참석하였던 승려들에게 도를 닦을 것을 간곡히 권유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맹문(盟文)을 지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을 것을 기약하였다. 그 뒤 10년이 지나, 정혜결사를 약속하였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득재(得才)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1188년 봄에 결사를 기약하였던 지기들을 모은 뒤 보조국사를 청하였다. 그 뒤 1197년에 보조국사는 결사의 동지들과 함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 들어가 3년 동안을 정진하다가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를 조계산 수선사시대라 부르는데, 이는 즉위하기 전부터 보조국사를 존경하였던 희종이 송광산 길상사의 이름을 고쳐 조계산 수선사로 하도록 친히 글을 써서 제방(題榜)을 내렸기 때문이다. 1210년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고제자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고, 그때부터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 15명의 국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선종을 이끌어왔으며, 이와 같은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송광사의 寺名은 신라 말에는 慧璘禪師 開山의 吉祥寺였고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의 定慧結社文에 입각한 定慧社, 그리고 고려 熙宗이 山名을 曹溪라 하고 社號를 고쳐서 修禪社라고 내림으로써 修禪社가 寺名이 되었다. 그러나 산의 舊名인 松廣을 修禪이란 이름과 병용하다가 결국 寺名이 지금의 松廣寺로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직후, 송광사 16번째의 국사에 해당하는 고봉화상(高峯和尙)이 이곳에 왔을 때에는 상당히 황폐한 상황에 있었다. 고봉은 1395년(태조 4) 佛...법......․... 법법 ․法․僧의 전당을 중건하였고, 정종은 수륙사(水陸社)를 중창하도록 윤지를 내렸다. 1420년(세종 2)에는 고봉의 뒤를 이어 중인(中印)이 당우도 증측하였고, 절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정종 때에 설립되었던 수륙사를 철폐하고 선종(禪宗)으로 복귀시키는 행정적인 절차도 밟았다. 그 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수각(水閣)․임경당(臨鏡堂)․보조암(普照庵)․천자암(天子庵) 등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왜군의 노략질을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다른 사찰로 옮겨가거나 속가로 되돌아감에 따라 한때 폐사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응선(應善)은 수각과 천자암과 보조암․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한 뒤 당시 지리산에 있던 부휴(浮休)를 모셨다. 부휴는 제자 4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옮겨와 조전(祖殿)과 동행랑(東行廊), 천왕문 등을 새로 짓고 기타 건물을 보수하였다. 그 뒤 600여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부휴를 모시고 동안거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3월 2일 낙하당(落霞堂)에서 일어난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하여 불우(佛宇) 5개소, 승료(僧寮) 8옥(屋), 공사(公舍) 12곳 등 2,152칸이 소실되었으며, 유물로는 대웅전의 삼존상(三尊像)․경판 및 외향각(外香閣)의 유조(柚槽: 감탕나무로 만든 구유), 창고에 있던 모든 소장품이 소실되었다. 이듬해 기봉(奇峰)과 용운(龍雲)은 대웅전․명부전․응향각․법왕문 등을 차례로 중건하였는데 1856년(철종 7)까지 중창에 소요된 기간은 14년이었으며 경비와 총액은 1만 1290냥에 달하였다. 그 뒤 율암(栗庵)은 관의 협력을 얻어 1924년에서 1928년 사이에 용화당(龍華堂) 등 9채를 중수하였고 명성각(明星閣) 등 7채를 중건하였으며, 사감고(寺監庫)․장탄문(墻坦門)을 신출, 종각을 증축하였다. 1948년 1월 여수반란사건과 6․25사변으로 조계산일대에 무장공비들이 잠입하자, 공비 토벌을 위하여 국군은 작전상 사찰 주변의 나무를 벌채하였고, 공비들은 사찰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다가 1951년 5월 대웅전 등 사찰의 중심부를 불태웠다. 1955년에서 1961년 사이에 취봉(翠峯)과 금당(錦堂)은 불탄 건물을 다시 창건 또는 중창하였다. 1970년대에는 조실인 구산(九山)이 설법전․수선사․화엄전 등을 보수하였고 조계총림(曹溪叢林)을 부활하여 수선사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며, 1983년부터 주지 현호(玄虎)가 대웅보전․지장전․승보전(僧寶殿) 등 크고 작은 건물 20여동을 새로 세우거나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차 중창부터 제8차 중창까지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제1차 중창
석조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명종 27년(1197) 불일 보조국사 지눌(佛日普照國師 知訥) 스님께서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도량을 팔공산 거조사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후였다. 지눌 스님은 길상사의 이름을 수선사(修禪社)라 고쳐 부르시고 당시의 여러 불교사상을 재정리하여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 선양하여 기울어 가던 고려 불교를 중흥시켜 한국불교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
․제2차 중창
지눌스님이 타계하신 후 스님의 법을 이은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 시켰다. 이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절이 비좁게 되었고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려 수선사를 크게 중축했다.
․제3차 중창
혜심 스님 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 초기에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 법장(高峰 法藏) 스님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했다.고봉 스님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선사(中印禪師)가 중축 불사를 완성하여 90여칸의 중축을 했다.
․제4차 중창
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절에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이에 응선(應禪) 스님이 복구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당시 서산대사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부휴(浮休)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하게 되었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부휴 스님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제5차 중창
헌종 8년(1842)에 절에 큰 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게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 겪은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제6차 중창
5차 중창이 끝난 후 약 70년의 세월이 흐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 스님과 율암(栗庵) 스님이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을 고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제7차 중창
1948년에 일어난 여순 반란 사건과 6.25사변으로 인하여 조계산 송광사 일대는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에 잠기게 되었다. 산중에 은신한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토벌대는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였고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 등 절 중심부를 태워 버렸다. 그 후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 스님과 화주 취봉(翠峰) 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제8차 중창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 스님은 승보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한다는 원을 세우고 그 일을 상좌 현호(玄虎)스님에게 위촉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승보종찰과 조계총림
(1) 승보종찰
불교에서는 참으로 귀하고 값진 보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래서 삼보(三寶)라고 한다. 그것은 <부처님(佛寶)>, <부처님의 가르침(法寶)>, 그리고 <승가(僧伽)>이다. 불교인의 신앙은 이 세 가지 보배를 귀한 것으로 알고 그에 귀의해 가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에 눈뜬 사람으로 2600년 전 인도에서 태어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말하며, <부처 님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깨친 다음 중생을 위해 설하셨던 내용으로 오늘날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승가>는 부처님의 제자로 구성된 신앙공동체를 가리킨다. 불보종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경남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이고, 법보종찰은 팔만대장경을 모시고 있는 경남 합천의 해인사(海印寺)이다.
송광사가 승보종찰로 불리우는 이유는 나라의 스승인 국사(國師)가 고려시대 때 180여년에 걸쳐 열여섯분이나 배출되었으며 항상 승풍진작(僧風振作)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기 때문이다. 송광사가 승보종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훌륭한 스님들이 송광사에서 끊임없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승보종찰의 터전을 닦으신 불일보조(佛日普照)국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에 실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승보종찰의 전통을 세운 송광사의 스님으로는 제1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 제2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스님 등 16국사와 조선시대 초기 서산대사 휴정과 쌍벽을 이룬 부휴 선수(浮休 善修)스님, 무용 수연(無用 秀演)스님, 풍암 세찰(楓巖 世察)스님, 묵암 최눌(黙庵 最訥) 스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근세에 이르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의 정신과 송광사의 전통을 계승한 분으로 효봉(曉峰) 스님을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은 10년 동안 송광사에 머물면서 계율과 선정, 지혜를 함께 아우르는 이른바 정혜쌍수의 전통을 선양하며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셨다. 또한 효봉스님이 송광사에 오시기 전부터 수백년간 송광사를 빛내고 지켜온 전통을 이어 근세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까지 평생 수행자의 모습을 흩트리지 않은 스님으로 취봉스님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효봉스님의 법을 이은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 목우가풍을 선양할 수 있는 터전을 굳게 하셨다. 또한 불일국제선원(佛日國際禪院)을 열어 한국 선을 국제화 하는데 에 공헌 하셨으며, 전국적인 신도조직인 불일회(佛日會)를 창립하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셨습니다.
송광사가 승보종찰의 향기로 빛나고 있는 것은 송광사를 이어오신 스님네들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승보종찰 송광사를 지켜 오신 스님들 처럼 현재 송광사에 살고 있는 스님들의 남다른 열정이 지금의 송광사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조계총림
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공부하는 스님네들이 사는 곳이다. 승가의 하루는 새벽 3시에 시작한다. 3시가 되면 한 스님이 목탁을 치며 도량을 돈다(道場釋). 그 목탁소리를 듣고 모든 스님들이 일어난다. 도량석이 끝나면 아침 종성과 4물(목어, 운판, 법고, 대종)이 울리고 이어서 대웅보전에서 경건하게 새벽예불을 올린다. 선원에서 정진중인 스님들은 도량석이 끝나면 선원 큰방에서 죽비로 예불을 드리고 바로 참선 정진에 들어간다. 예불이 끝나면 강원 스님들은 큰방에서 간경(看經)을 한다. 아침 공양은 6시에 있다. 스님들은 큰방에 순서대로 빙 둘러앉아 각자 자신의 발우로 공양을 한다.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도 번역한다. 승속(僧俗)이 화합하여 한 곳에 머무름이(一處住)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특히 선찰(禪刹)의 경우 이름으로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도 한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중(衆, 무리의 뜻)의 뜻이니 많은 비구가 한 곳에 화합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마치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룬 것을 林이라 함과 같으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즉 지금의 선원(禪院), 선림(禪林), 승당(僧堂), 전문도량(專門道場) 등 다수의 승려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을 총칭하여 총림(叢林)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총림이 되기 위해서는 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이 있어야 한다.
송광사가 조계총림(曹溪叢林)이 된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조계총림을 발족하면서 초대 방장에 구산 큰스님을 추대하여 한국불교의 동량을 키우는 새로운 정혜결사와 수선(修禪)의 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불일보조국사를 위시하여 16국사가 배출된 수행․정진의 도량으로서 승보종찰의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한 대도량으로서 오늘날 한국 선종의 맥을 잇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3. 송광사의 스님 - 보조국사 지눌, 효봉, 구산
(1) 한국불교의 중흥조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스님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53년(1158-1210)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고 갔지만, 그의 빛나는 삶과 뛰어난 가르침은 고려 불교는 물론 현재의 한국 불교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먼 미래에까지 인류의 사상으로 계승 발전 될 것이다.
①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
지금으로부터 약 840년 전인 고려 중엽 제18대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시 국학(國學-지금의 대학 및 대학원과 같은 기관으로 신라 및 고려에서 쓰던 이름. 조선시대의 성균관)의 학정(學正-국학 및 성균관 안에서 종사하는 정 8품의 벼슬)인 정광우를 아버지로 부인 조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나,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었다. 부친은 부처님 전에 맹서하기를 “병만 나으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으니, 병만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후 아이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이리하여 아이는 나이 겨우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가 정해준 대로 조계(曹溪-六祖 혜능을 지칭)의 먼 제자인 종휘(宗暉) 선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니, 그가 바로 후에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칭송 받고 있는 목우자(牧牛子) 지눌(知訥)스님이다.
스님에게 있어서 스승은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었으며, 올바른 것을 교시해 주는 이는 모두가 그의 은사였다. 스님은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오직 바른 진리를 찾아 자유롭게 배웠다. 당시 불교계는 의식(儀式)의 극대화로 말미암은 국가재정의 궁핍, 승려의 타락상 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진면목에서 어긋나 각 파는 명리를 선양하기에 급급하였으며, 특히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극심했다. 이에 스님은 선종과 교종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하여 그 합일점과 조화점을 모색하였는데, 자유로웠던 배움의 자세가 이러한 작업과 신념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② 상도보제사(上都普濟寺)에서 담선법회(談禪法會) 후 정혜결사(定慧結社) 결의
25세(1182)에 당시 출세의 관문이기도 한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이 때 스님은 생의 일대 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즉 명리를 떠나 산림에 은둔하여 정(定)과 혜(慧)를 닦는 이른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굳게 약속한 것으로, 승과합격 직후 당시 수도인 개성의 보제사 담선법회(普濟寺 談禪法會)에 참석한 후 동료 십여 명과 더불어 굳은 결의를 하게된다.
"이 모임이 파하거든 우리는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깃들어, 정혜를 균등히 닦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부지런히 예배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운력에 이르러서도 각각 그 소임을 따라 경영하여, 이같이 인연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면서 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 멀리 진인달사(眞人達士)의 높은 수행을 따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③ 전라도 창평현 청원사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 열람
그러나 보제사 이후 각자의 득실에 이끌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스님은 개인적인 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전라도 창평현(나주) 청원사에서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은 보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기는 것이므로, 비록 육근(六根)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더라도, 그 참된 성품은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일찍이 겪지 못했던 것을 체험하고 일어나 법당 안을 돌며 기뻐하였다. 이후 더욱 굳건한 마음으로 구도에 전념하였다.
④ 예천 하가산(下柯山) 보문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
그 후 스님은 28세(1185)되던 해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게 된다. 선승으로서 교학의 총서인 대장경을 열람하게 된 동기는 매우 특이하다.
당시는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과,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는 교종이 서로 대립되어, 교종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한 대장경이 참된 불법이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부처님이 교밖에 따로 마음을 전한 것(敎外別傳)이 선이 되었다 하여, 서로 그 우열을 다투는 것이 마치 적을 대하는 것 같이 하였다. 스님은 이에 대하여 '크게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고, 대장경을 열람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야경(般若經)과 원각경(圓覺經)과 능엄경(楞嚴經)과 기신론(起信論)등 많은 경론을 열람하게 되는데, 그 귀결 처는 한결같이 마음의 본 바탕이 어떻다는 것, 마음을 밝히라는 것, 본성을 되찾으라는 것 등이며, 그것이 바로 선종에서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고, 화엄경을 열람하다가 화엄경 출현품에 '한 티끌이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는 비유와 그 뒤의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 마음에 갖추어져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읽고 문득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의 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30세경) 당나라 이통현장자(李通玄長者)가 지은 화엄론의 십신초위(十信初位)를 해석하는 각수보살에 대한 설명, 즉 '범부가 믿음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자기가 범부임만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을 읽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어서 '모든 범부의 분별하는 마음이, 그대로 부동지불(不動智佛)이다.'라는 논지에서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리를 실증하고 그 뒤에 선교회통(禪敎會通),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우게 됨은 물론, 나중에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의 기초가 되었으니, 이는 보조국사의 크나큰 역사적 대과업으로 인도적 교와 중국적 선을 회통하여 한국적 불교를 표방한 일대 혁명이었다.
⑤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공포
이러한 지도이념에 의하여 스님의 나이 31세 (1188) 되던 해 봄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서 옛 동지 3,4인으로 정혜사 결성, 2년후인 33세 때에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그곳 팔공산 거조사에서 만 8년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수백 명의 대중이 모여들자, 잠시 홀로 휴양하기 위하여 명종 27년(1197) 스님의 나이 40세 되던 해, 시자 2,3인만 데리고 팔공산을 떠나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거하시게 되는데, 이때 내관(內觀)에 힘쓰시던 중,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이란 조용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렇다고 조용한 곳과 시끄러운 곳,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것을 떠나서 참선하려 해서는 더욱 안 된다' 라는 대목을 보고 불조의 현묘한 뜻에 계합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수심결>과 <간화결의론>을 짓게 된다.
⑥ 송광사로 정혜결사 도량을 옮김
그때 팔공산 거조사는 도량이 협소한데, 대중은 많아지므로 새 도량을 찾아, 1197년 제자를 보내어 당시 신라의 고찰 송광산 길상사를 확장 중건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3년 후 43세 되는 1200년 길상사에 오시어 낮에는 대혜어록을 강의하시고, 밤에는 대중과 함께 정진하시니, 이로부터 진정한 정혜결사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에 산 이름은 조계산, 절 이름은 정혜사로 바꾸었다가, 서기 1205년 이웃에 같은 이름의 절인 정혜사가 있는 관계로 절 이름을 다시 수선사로 바꾸게 된다. 이때 나라에서는 왕이 직접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社)>라고 하는 어필(御筆) 액자를 보내오게 된다.
스님의 나이 45세에 <진심직설(眞心直說)>, 48세에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그리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스님의 나이 52세 때에 공포된다. 수선사로 도량을 옮긴 후 11년간을 한결같이 부처님의 계율에 의거하여 대중과 함께 안거하고 선정을 닦으며, 두타행(頭陀行-검소한생활)을 하였던 스님은 이미 대립된 견해, 오해에 의한 편견을 극복한 성자다운 면모가 역력하였다.
스님의 비문에 의하면, 사방의 승속들이 그 명성을 듣고 모두 모여들었는데, 심지어는 명예도 벼슬도 처자까지도 버리고, 삭발염의하여 친구까지 권하여 함께 오는 이도 있었으며, 왕공 사녀들로서 수선사에 들어와 이름을 적는 이가 수백인에 달하였다.
스님의 비문에 스님을 평하기를, 국사는 오직 도만을 위하고, 남의 칭찬이나 비방에는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 또 그의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우셔서, 후배를 지도할 때에, 성질이 패류한 사람이 있어 그 뜻을 거슬리더라도, 그를 가엾이 여겨 껴잡아 주고, 그칠 줄 모르는 정리는 사랑스런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같았다. 스님은 또 위의를 잘 거두어 항상 우행호시(牛行虎視-소걸음과 호랑이 눈빛)로 지내시면서, 힘드는 일과 운력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대중에 앞서 솔선하였다.
스님은 후학을 지도함에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도록 권하였고, 뜻을 풀이할 때는 육조단경을 의지하였으며, 이치를 밝힐 때는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어록> 으로 소의(所依)를 삼았으며, 수행의 체계로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정혜쌍수),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돈오점수),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화두참구)의 세 가지 문을 세워 가르치셨다.
⑦ 위대한 열반
그 후 스님은 희종 6년(1210) 2월에 재(齋)를 베풀어 어머니를 천도하였으며, 그 해 3월 20일에 미질 (微疾)을 보이시더니, 27일에 이르러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법고를 울려 대중을 모이게 하 였다. 그리고 향을 사루고 예불한 뒤에 법상에 오르시어 평일처럼 설법하시되 '이 눈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이 코도 이 혀도 그렇다. 이제 이 山僧의 목숨을 대중에게 맡기노니, 찢든지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때 한 스님이 질문하기를 '옛날의 유마거사가 앓은 모습을 보인 것이, 오늘 스님께서 보이신 모습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 이에 '너는 같고 다른 것만 배웠는가?' 주장자를 세번 치시고 '천만가지가 다 여기에 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앉으신 채로 고요히 숨을 거두시니, 이때가 세수 53세, 법납 46세이었으며, 다비를 마치고 사리를 수습하니 큰 것은 30과요, 작은 것은 무수였으며,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왕은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못내 슬퍼하며,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 하고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남기신 저서로는, 상당록(上堂錄), 법어가송(法語歌頌), 선각명(禪覺銘) 등은 현존하지 않으며,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수심결(修心訣),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訣疑論), 진심직설(眞心直說),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염불요문(念佛要門) 등이 있다.
⑧ 지눌스님의 사상
지눌스님이 살았던 그 시절은 안팎으로 몹시 어지러웠던 격동의 시대였다. 사회적으로는 계속된 무신들끼리의 권력다툼과 정변의 소용돌이에 불교가 휘말리어 수행과 교화 등 종교적인 기능을 다 할 수 없었고, 안으로는 선(禪)과 교(敎)의 대립이 심했다.
그 때의 승려들은 추악한 정치권력에 휩쓸림에 따라 승려 사회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타락된 고려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벌인 운동이 정혜결사(定慧結社)다.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은 그 당시 불교 중흥을 결의한 일종의 선언서다.
스님은 수심(修心)에 투철할 것을 강조한다. 마음 닦는 일을 통해 정법이 구현되고 선․교간의 갈등도 해소될 수 있으며, 중생의 온갖 시비도 이 수심으로 인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수심의 근거는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데에 있다. 수심결(修心訣)에서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부처란 곧 이 마음인데, 마음을 어찌 먼데서 찾으려고 하는가. 마음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이 수심결에서 스님의 뛰어난 사상인 '돈오점수(頓悟漸修)'가 등장한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과 그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수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틀은 깨달음과 닦음이다. 올바른 수도는 먼저 마음의 바탕을 분명히 깨치고 나서, 그 깨침에 의지해 점점 닦아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생들이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 성품이 참 법신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지혜가 진짜 부처인 줄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번뇌 없는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아는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므로 돈오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면 한번 깨쳤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닦음이 또 필요하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 『수심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은 갑자기 없애기가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는 이것을 점수라 한다.'
또 이 가르침에는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바른 행이란 우리들 일상적인 삶이다. 그렇다면 깨달음과 닦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하는 두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다. 또 깨달음과 닦음의 관계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지혜와 자비에 일치한다. 자비가 없는 지혜는 메마른 것이고, 지혜가 없는 자비 또한 맹목에 흐르기 쉽다. 깨달음과 닦음은 종교적인 주장이기에 앞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눈을 떠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돈오점수의 사상은 불타 석가모니의 45년의 설법정신을 이루고 있는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더 닦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 말은 그럴 듯하지만 깨닫고 나서의 닦음이야말로 진짜 닦음이다. 중생교화란 무엇을 말함인가. 점수란 무얼 뜻하는가. 눈을 뜬 사람이 마땅히 해야할 닦음이 아니겠는가. 닦음(修)이란 곧 행(行)인데, 행에 완성이 있을 수 있는가. 중생계가 끝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일시에 마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종교란 영원한 닦음이고, 끝없는 행이다.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을 떠난 허무맹랑한 공리공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진심직설(眞心直說)은 실제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물음과 대답(사실은 자문자답이다)의 형식으로 된 이 글은 스님의 방대한 독서량을 마음껏 활용하면서 진심(眞心), 곧 무심(無心)을 배우고 익히는 후학들에게 밝은 스승의 역할을 해 준다.특히 진심을 드러내기 위한 열 가지 공부는 참으로 뛰어난 법문이다. 스님은, 이 열 가지 무심 공부를 반드시 순서적으로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그 중 한 가지 길을 골라 공부를 성취하면 그릇된 마음이 사라지고 진심이 드러날 터이니, 자신의 근기와 취향에 맞추어 익혀 가라. 이 망심(妄心)을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진 것이니 글이 번거롭다고 탓하지 말라.'
그것이 참다운 수행이요, 무심이요 무위이다. 무위란 먼저 번뇌의 성품이 공함을 이미 깨친 까닭에 다스려지는 습기(習氣)가 주관과 객관을 따라 지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위는 동시에 소득이 없다. 만일 참된 것이다, 헛된 것이다 하는 것이 모두 소득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 소득이 없음을 아는 자도 또한 소득이 없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화로 위에 놓인 한 점의 눈송이 와 같게 된다.
이러한 탁견이 지눌스님을 선교융섭(禪敎融攝)의 위대한 인물로 규정짓게 한 것이다. 돈오점수를 주장한 것도 결국 교나 선이나 그 믿음에 들어가는 출발과 수행의 방법이 사람의 근기(根機)에 따라 같지 않기 때문에 설정한 수행방법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면 '말과 사려의 길이 끊긴' 무사(無思)에 일치되는 것이다.
스님의 사상에서 특기해야 할 또 한가지는 나 스스로가 갖춘 본래적인 것이라는 자의지적(自意志的)경향이다. 나 자신이 부처이기에 부처님의 지혜가 곧 나의 지혜요, 비춘다 하더라도 내가 나를 비추는 것이므로 밖을 향하여 나갔던 빛을 나 자신에게 되돌리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인 것이다.
스님은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을 배격하였다. 나 자신 스스로가 밝음의 원천임을 깨치면 나를 제약하는 모든 속박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해방이니 자유니 하는 말도 오히려 새삼스럽게 될 것 이다. 이미 그러한 경지를 얻었고, 그 경지를 남김없이 토로했던 지눌스님은 신라의 원효스님과 더불어 한국불교의 거대한 봉우리였다.
⑨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
정혜결사는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근수(勤修)하는 결사(結社)이다.
정혜결사는 첫째 당시에 극히 속화되고 미신화된 ‘호국기복불교' ’우상불교'에서 현실적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구세제중(救世濟衆)하는 ‘정법불교'의 복귀운동이며, 둘째 명리(名利)의 도구화된 '형식불교, ’가면불교'에서 진실한 출세간의 길을 밟아 성불도생(成佛度生)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행불교'의 재건운동이며,퇴폐하고 변질되어 버린 ‘궁중불교' '관권불교'에서 참신하고 생명 있는 ‘민간불교'․‘대중불교’의 건설운동이었다.
보조국사는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서 구시대적 불교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한편 참다운 ‘수행불교'․‘정법불교'․‘민간불교'를 실현하기 위하여 <근수정혜결사(勤修定慧結社)>를 발기했다. 이 세 종류의 불교이념이 그 결사의 제호에 그대로 표현되었는데 ‘근수(勤修)'는 ‘수행불교'의 재건을 뜻하는 것이고, ‘정혜(定慧)'는 ‘정법불교'의 복귀를 말하는 것이며, ‘결사(結社)'는 지난날 궁정불교, 관권불교를 탈피한 새로운 민간자유의 수행집단을 구축하는 민간불교, 대중불교를 지향한 것이며, 이것이 정혜결사의 근본 취지이다.
정혜결사는 한마디로 새로워지려는 몸짓이다. 보조국사는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 닦는 불교를 정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정혜결사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바로 세우는 정법결사(正法結社)이며, 마음을 닦는 수심결사(修心結社)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이 말씀하신 마음을 닦는 결사의 기본은 마음을 닦는 기본과 다르지 않다.
첫째로 스님은 마음이 바로 부처(心卽佛)라고 했다. 곧 부처가 멀리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마음 닦는 일에 있어서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일은 중요하다. 우리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디서 부처를 찾아야 하는가? 스님은 절대로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는 형상이 잇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우리들 존재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 일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蒸沙作飯)'과 같이 무모한 일이라고 했다.
두 번째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은 단순한 말이나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확신으로 확인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 마음 닦는 일은 더 이상 밖으로 헤매지 않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선정과 지혜를 항상 함께 닦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정(禪定)이란 본래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집중하는 일로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며, 지혜(智慧)는 마음을 환히 밝게 가지는 것으로 어두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이다. 스님이 말씀하신 선정과 지혜는 본래 우리의 마음이 비어있으면서도 밝은 두 면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항상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되(定慧雙修)생활의 질서인 바른 삶의 자세, 즉 계율의 실천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 마음 닦는 일은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는 실천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은 깨달음과 더불어 일체의 모든 생명을 건지고 이롭게 하는 자비의 실천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님은 선의 수행이 자기 수행에만 머무는 실천으로 이해되기 쉬운 것을 자기의 완성과 더불어 이웃의 완성을 위한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 번째로 스님은 불교 안의 다양한 흐름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회통적(會通的) 전통을 소중하게 여겼다. 스님은 선종(禪宗) 출신의 스님이면서도 결코 종파나 문중의 입장에 서지 않고 ‘오직 진리를 따랐을 뿐(惟道之從)'이었다.
이렇듯 정혜결사를 통해 고려불교는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으며, 이러한 정혜결사의 전신은 한국불교의 굳건한 전통이 되어 오늘날까지 송광사를 근본도량으로 삼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즉 보조국사의 선(禪)과 교(敎)를 아우르는 것과 선정(禪靜)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 각기 능력에 맞는 수행을 존중한 점 등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정신이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에 전승되고 있다.
(2) 효봉(曉峰, 1888-1966)스님
효봉(曉峰禪師)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에서 아버지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과 어머니 김씨의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스님은 스물 여섯에 졸업한 후 서른 여섯이 될 때까지 10년간(1913~1923)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했다.
1923년 스님의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자신의 존 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하게 되었다.'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라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유랑 생활을 하다가 1925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 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스님을 찾아갔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사미계(五戒)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서른 여덟에 오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는 '늦깎이'라고 한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잠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坐禪)에만 전 념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선 다. 그러나 불가의 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스스로 참구(參究)하면서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금강산으로 돌아와 정진한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만에 드디어 토굴의 벽이 무너진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다음은 스님의 오도송이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海底燕巢鹿抱卵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火中蛛室魚煎茶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此家消息誰能識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白雲西飛月東走
스님의 마흔 다섯 되던 1932년 4월 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설악산 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등의 청정한 선원에서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7년 스님의 나이 쉰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이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되었다. 스님은 선원(禪院)인 삼일암(三日庵)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무시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이셨다.
8.15 광복으로 일제의 탄압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 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 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개원하게 되는데 스님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어 조계산을 떠나 가야산으로 갔다. 그 후 여러해가 지나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거처를 밀양 표충사로 옮겼다.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2일),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시고 일흔 아홉의 생애를 마치고 앉은 채 입적하셨으니 법랍은 41세였다.
내가 말한 모든 법 吾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 都是早騈拇
오늘 일을 묻는가 若問今日事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月印於千江
제자들이 스님의 사리를 거두어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에 사리탑을 만들어 나누어 모셨다.
(3) 구산(九山,1909-1983)스님
구산스님은 1909년 음력 12월 17일 전라북도 남원시 내척리 509번지에서 진양 소(蘇)씨 재형씨를 아버지로, 최성녀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1935년 27세 때 우연히 병을 얻어 신음하던 중, 진주에 사는 한 거사(居士)를 만 나 그에게서 “본래 청정한 자성(自性)자리인데 어디에 병이 붙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홀연히 발심하게 되어 그 길로 지리산 영원사를 찾아가 백일동안 천수기도를 하여 성취함으로써, 육신의 병도 낫고, 불법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29세 때 입산 출가하여 서른살되던 이듬해 4월 초파일날 효봉선사를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5계를 받았고 1939년(31세) 4월 보름날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해담화상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고 그해 여름을 통도사 백련암에서 지내고난 후 청암사 수도암 정각토굴에서 착실히 정진 선(禪)수행의 기반을 닦았다. 1946년 효봉선사를 방장으로 가야총림이 개설되자 총림에 들어가 도감 소임을 보면서 지내다 그 이듬해 가야산 중턱에 법왕대 토굴을 짓고 안거하던중 견처가 생겨 큰절 대중의 요청으로 최초의 법상에 올라가 법문을 했다. 1950년 6․25 사변으로 가야총림이 흩어지자 진주 응석사에 가서 분발하여 정진. 이듬해 정월 동래 금정선원에 계신 은사께 게송을 지어 바친다.
46세 때인 1954년 여름 안거를 마치고 상경하여 교단 정화운동에 적극 참여, 5백자 혈서를 써서 정화의 결의를 굳게다졌으며 1955년 초대 전남 종무원장에 취임하고, 57년에는 광양 백운산의 상백운암을 중건하고 정진. 1960~67 년까지 조계종 중앙 종회의원으로 종단일에 관여하고, 1962년(54세)에는 대구 동화사 주지에 취임했다. 1969년(61세) 4월 보름날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립되자 초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고, 그해 9월 5일 총림의 후원 단체인 불일회(佛日會)가 창립되었으며 스님은 총재 겸 총회장에 취임한다. 이와같이 하여 스님은 희미해져가던 호남지방의 불교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고, 송광사는 고려 보조국사 이래 연면히 계승되어온 승보도량의 면모를 새롭게 확립하기에 이른다.
1972년 겨울 운허화상과 함께 북미 카멜 삼보사 개원식에 참석차 도미, 미주를 두루 순방하고, 이듬해 봄 미국인 제자 현조를 데리고 귀국,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였으며 1975년 불교의 생활화를 위해 7바라밀 책자를 발간하여 유포하고, 76년 가을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법문을 모아 외국 출신 제자인 혜명, 혜행의 도움으로 영어로 된 Nine Mountains를 출간하여 해외에 널리 소개한다. 1979년 제2차 미주순방길에 올라 LA에 고려사를 개원하고, 다음 해인 1980년 Nine Mountains의 원고를 손질하여 법어집 석사자(石獅子)를 간행. 1982년(74세) 제3차 미주순방 끝에 유럽쪽으로 발길을 넓혀 7월에 스위스 제네바에 불승사를 개원하고 10월에는 미국 카멜에 대각사를 개원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70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펼치기 위해 과로를 무릅쓰고 헌신한 결과 송광사는 오늘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제선원을 개설하여 미흡하나마 한국불교를 해외에 수출하는 창구 기능을 하기에 이르렀다.
스님은 1983년 가을 미질(微疾)을 보이시더니 삼칠일 정진 후 세연(世緣)이 다 됨을 유언하시고 12월 16일(음 11월 13일) 오후 6시 25분, 46년 전 바로 스님이 득도수계하셨던 송광사 삼일암에서 많은 제자와 문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부좌하신 채 입적하셨으니 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法臘)은 47세였다. 문도들이 수습된 사리를 거두어 적광탑과 탑전을 건립하였다.
45년에 걸친 스님의 수도생활은 애써 정진하면서 가는 곳마다 절을 짓고 고치는 가람수호에 힘쓰셨고, 「일수좌」의 별명을 들을 만큼 잠시도 쉴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항상 대중과 함께 예불하고 운력하고 공양하면서 동사섭의 덕을 닦았다. 스님은 또 효상좌의 소리를 들을만큼 은사를 모시고 섬기는데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항상 문호를 개방하여 누구하고나 만났고, 한결같이 “이뭣고” 화두로써 법문을 삼았으며, 많은 붓글씨로써 대중에게 불연을 깊게 하셨다. 말년에 해외로 다니면서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널리 선양하셨다.
오도송(悟道頌)
깊이 보현의 터럭 속에 들어가 深入普賢毛孔裏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捉敗文殊大地閑
동지날에 소나무가 저절로 푸르니 冬至陽生松自綠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간다 石人駕鶴過靑山
열반송(涅槃頌)
온 산의 단풍이 불꽃보다 고우니 萬山霜葉紅於二月花
삼라만상이 그 바탕을 온통드러내는구나 物物頭頭大機全彰
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하니 生也空兮死也空
부처의 해인삼매 중에 미소지으며 가노라 能仁海印三昧中 微笑而逝
3. 송광사의 3대 명물
송광사에는 단일 사찰로는 국가지정문화재가 제일 많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성보문화재는 송광사의 지나 온 역사이기도 하지만, 송광사와 하나인 것이다. 경내박물관인 성보각(聖寶閣)에는 국보와 보물 그리고 지방문화재 등 많은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송광사에 전설로 남아 있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송광사 삼대명물은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이다. 비사리구시와 능견난사, 천자암의 쌍향수가 바로 그것이다.
(1) 쌍향수
쌍향수는 송광사에서 동남쪽으로 4km의 산길을 걸어 가면 나오는 천자암(天子庵)에 있는 상록침엽교목(常綠針葉喬木)에 속하는 향나무이다. 보조국사 스님과 그의 제자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짚고 온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난 것이라고 한다.
(2) 능견난사
직경 16.7cm. 능견난사(能見難思)는 “능히 보기는 해도 그 이치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을 가진 그릇이다. 보조국사 스님이 중국 금나라 황제 장종을 위한 기도 때 부처님 전에 올리던 그릇으로 본래 명칭은 응기(應器)였다. 훗날 조선 숙종이 이 그릇을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포개지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겨 장인(匠人)에게 만들게 하였지만 똑 같이 만들 수는 없었다. 이에 숙종은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어필제명(御筆題名)을 하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500개 였으나 현재는 29개만 남아 있고,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3) 비사리구시
비사리구시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년 전인 1724년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느티나무(槐木)가 태풍으로 쓰러져 있던 것을 가져다 만든 것으로 조선 영조 이후 절에서 국재(國齋)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일종의 밥통으로 목조(木槽)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비사리구시에는 쌀 일곱가마 분량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비사리구시와 싸리나무 이야기(불일 9월호)
어떤 연유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전국의 수많은 사찰에는 건물의 기둥을 비롯하여 구시(구유)와 목불(木佛)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유물이 싸리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승보종찰 송광사의 성보문화재인 쌍향수, 능견난사(能見難思)와 함께 싸리나무로 만들어 졌다는 크고 작은 2개의 비사리구시는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설명을 보면 <1724년 전라도 남원 송동면 세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영조이후 국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이라 함(약 7가마 분량의 밥 저장)>이라고 쓰여져 있다.
큰 구시는 얼핏 보아도 지름이 거의 2 m나 되고 나이도 150살이 넘는 거대한 나무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싸리나무는 콩과, 싸리속이라는 무리에 들어가는 나무로서 아무리 크게 자라도 높이 2-3m, 굵기 2-3cm에 불과한 작은 나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수 백년 혹은 수 천년 전에는 싸리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식물학적인 상식으로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또 전해지고 있는 사서(史書)나 농서의 기록에도 옛날 싸리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랐다는 기록은 없다. 잠깐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고구려 미천왕 31년(330)조에는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하여 화살로 사용하였다. 열전 온달조에 평강공주가 온달의 집으로 바로 찾아갔다가 온달의 어머니로부터 퇴짜를 맞고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온달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자세한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하여 싸리 울타리로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조 원년(1392) 총서에 <태조는 활을 쏠 때 큰 깍지와 우는 살을 사용하기 좋아하였는데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었다>고 하고 연산 원년(1495) 2월1일 조에는 한치형 등이 아뢰기를, <발인할 때에, 도성에서 전곶(箭串)까지는 사재감에서 싸리 횃불을 장만하여 각사의 노비 5백 명에게 들리고, 전관부터 능소까지는 경기․충청․강원도에서 싸리 횃불을 준비하고 군인을 차출하여 들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하여 횃불의 재료로 궁중에서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문헌에서 본 것처럼 싸리나무는 삼국시대나 조선왕조 때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싸리나무와 쓰임새나 크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옛날 싸리나무라 하더라도 기둥이나 구시를 만들만큼 크게 자랐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송광사 비사리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나무는 오늘날의 무슨 나무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하여 필자는 현미경으로 세포모양을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싸리나무가 아니라 실제로는 흔히 괴목(槐木)이라 불리는 느티나무이었다. 느티나무는 조상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든 나무로서 아름다운 무늬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면서 가공이 쉬운 최상의 재질을 가진 나무이다. 천마총의 목관, 화엄사 및 통도사 대웅전,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기둥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가구까지 수많은 목질유물이 느티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느티나무 목질유물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는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추정은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처음에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든 느티나무를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송광사 비사리구시 설명서에서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만든 나무는 <…느티나무가 태풍에 쓰러진 것…>으로 고쳐 쓰는 것이 식물학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다.
4. 송광사의 성보문화재
송광사에는 많은 성보문화재가 있다. 우리가 소중히 아끼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이러한 문화재들은 송광사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대표적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국보 3점 - 42호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 43호 고려 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 56호 국사전(國師殿)
․보물 13점 - 90호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 1책, 134호 경질(經帙) 2매, 175호 경패(經牌) 43개, 176호 금동요령(金銅搖鈴) 1개, 204호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1책, 205호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1책, 206호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纘述) 1책, 207호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經疏開玄초) 1책, 572호 수선사형지기 및 노비첩(修禪社形止記/奴婢帖) 2첩, 263호 하사당(下舍堂), 302호 약사전(藥師殿), 303호 영산전(靈山殿), 1043호 16국사진영(16國師 眞影)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8점 - 18호 자정국사 사리함(慈靜國師 舍利函), 19호 능견난사(能見難思), 22호 금강저(金剛杵), 28호 고봉국사 주자원불(高峰國師 廚子願佛), 30호 파스파 문자(文字), 59호 삼청교 및 우화각(三淸橋 / 羽化閣), 91호 보조국사비(普照國師碑), 97호 풍암영각(楓巖影閣)
1. 송광사 불상
①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송광사 목조삼존불감은 송광사에서 활동한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의 念持佛龕으로 전하는 유물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불감(龕 높이 13.9cm, 龕 지름 6.9cm)의 형태는 닫으면 위가 둥근 원통형이 되고 열면 세쪽이 연결되어 있는데 중앙에 본존불을, 좌우에 보살상을 조각하였고 세 쪽을 경첩으로 연결한 형식이다.
본존상은 석가모니불이거나 로사나불로 볼 수 있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두 줄씩으로 된 음각의 옷주름이 나타나 있다. 또 본존 주위에는 합장한 승상과 보살․동자상․사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위쪽에는 천개가 있고 불단 아래에는 고사리 모양의 초문이 투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코끼리에 탄 좌협시상은 보현보살이고 사자에 탄 우협시상은 문수보살이다. 양쪽보살상의 천개에는 비천이 날고 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은 매우 정교하고 세밀하며 각종 장엄 또한 화려하다.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말경으로 추정된다.
이 불감과 구조나 양식면에서 비교되는 목조불감이 日本 高野山의 金剛峯寺에 있는데, 일본의 밀교 진언종의 개조인 弘法大師 空海(774~835)가 806년 唐에서 귀국할 때 가져왔다고 한다. 따라서 송광사 불감의 彫像에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나 양식이 당시 우리의 불상과는 다른 이국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 일본 불감의 경우와 같이 唐에서 전래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전래시기는 알 수 없으며 다만 普照國師는 고려시대 때 사람이므로 그 이전에 전래된 불감이 국사의 念持佛로 예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42호로 지정되었다.
② 영산전 목조여래좌상(靈山殿 木造如來坐像)
송광사 영산전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여래좌상이다. 위에 금분을 입혀 중앙불단에 모셔진 이 상은 복장(腹藏) 조사를 통하여 1780년에 조성되었음이 알려졌다.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는 매우 낮아 머리와 구분이 어려우며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있다. 얼굴은 조선 후기의 불상에서처럼 네모나면서도 넓적하나 턱선을 굴려서 둥근 감을 준다. 이목구비는 크고 뚜렷하여 반월형의 눈썹, 길고도 크게 뜬 눈, 오려붙인 듯한 코, 도톰한 느낌의 미소를 띤 입술 등이 표현되어 표정이 온화하다. 미간에는 백호가 있으며 양 귀는 턱선 부분까지 내려왔고,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왼쪽 어깨를 중심으로 내려져 팔까지 덮고 있으며 왼쪽 목깃부분에서 한번 반전한 자락이 등뒤를 돌아 오른쪽 어깨를 감싸 팔목부분을 내놓은 채 오른팔 뒤로 돌아가고 있다. 가슴에는 승각기가 보이지만 매듭표현은 없다. 법의는 다시 결가부좌하여 왼쪽 다리 위에 얹은 오른발만 내놓고 양 무릎을 감싸고 있는데 형식적인 주름이 표현되었다. 무릎 위에서 왼손은 촉지인을 취하고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이 끝을 맞댄 아미타인을 결하고 있다. 머리․상체․하체가 각각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감을 주면서도 1884년의 예천 용문사 아미타삼존상이나 1894년의 남장사 보광전목각불탱(南長寺 普光殿木刻佛幀) 등에서처럼 이국적 느낌은 주고 있지 않은데, 이유는 원만한 얼굴선과 둥근 무릎선 같은 특질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깨는 비교적 왜소하여 상체를 약간 앞으로 숙인 듯하나 승각기 아래의 약간 튀어나온 배의 양감은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상의 형식은 17세기 들어 많이 유행하던 것으로 같은 목조인 실상사 약수암목각불탱(實相寺 藥水庵木刻佛幀, 1782)과 비교해보면 훨씬 덜 느슨하며 덜 도식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즉, 이 불상은 조선 후기의 기년명(紀年銘) 조각으로 편년적 자료가 불충분한 조선 후기 조각의 변천을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③ 약사전 목조여래좌상(藥師殿 木造如來坐像)
이 불상은 약사전이란 조그마한 전각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형식과 조각기법은 영산의 불상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수인과 통견의 법의 형식이 약간 다를 뿐이다. 수인은 양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미타정인을 결하고 있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의문선이나 발목 부위에서 무릎으로 퍼진 의문선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작가가 조성한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약사전은 1974년의 중수할 때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인조 9년(1631)에 중건되었으나, 5년 뒤 병자호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영조 27년(1751)에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약사전을 새로 중창하면서 이 불상도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여진다.
2. 송광사의 불화
송광사 불화는 1969년과 1970년에 국립박물관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그 결과를 韓國의 佛敎繪畵 松廣寺란 책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 내용을 각 전각과 암자별로 간략히 요약하여 소개하고 대표적인 불화 몇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1) 불조전 불화 : 탱화는 불단위 소조불상뒤 벽면에 오십삼불, 삼신불, 오방여래(화기에 의함) 등 육십일불이 칠개 탱화에 나누어 모셔있다. 1725년(英祖 1, 雍正 3)
① 中央七佛幀(사진 27)
② 五十三佛幀(第一, 三, 五, 七, 九, 十一, 十三, 十五, 十七 等 九佛幀)
③ 五十三佛幀(第二, 四, 六, 八, 十, 十二, 十四, 十六, 十八 等 九佛幀)
④ 五十三佛幀(第十九, 二十一, 二十三, 二十五, 二十七, 二十九, 三十一, 三十三, 三十五, 三十七, 三十九, 四十一, 四十三 等 十三佛幀)
⑤ 五十三佛幀(第二十, 二十二, 二十四, 二十六, 二十八, 三十, 三十二, 三十六, 三十八, 四十, 四十二, 四十四, 四十六 等 十三佛幀)
⑥ 五十三佛幀(第四十五, 四十七, 四十九, 五十一, 過去毘波尸佛等 五佛幀)
⑦ 五十三佛幀(第四十八, 五十, 五十二, 五十三, 當來彌勒尊佛等 五佛幀)
2) 화엄전 불화
① 華嚴幀 : 1770년(乾隆 35), 271.4×299cm, 絹本彩色
② 神衆幀 : 1823년(純祖 23, 道光 3), 119×57.5cm, 絹本彩色
③ 淸凉國師眞影 : 추정 18세기 후반, 153×98.3cm, 絹本彩色
3) 국사전 진영
十六國師幀 : 1780년(正祖 4, 乾隆 45), 165×91cm, 絹本彩色
① 第一世祖師願力受生海東佛日普照國師眞影
② 第二世祖師眞覺國師眞影
③ 第三世祖師贈諡淸眞國師眞影
④ 第四世祖師冲鏡眞明國師眞影
⑤ 第五世祖師晦堂和尙慈眞國師眞影
⑥ 第六世祖師圓鑑國師眞影
⑦ 第七世祖師慈靜國師眞影
⑧ 第八世祖師慈覺國師眞影
⑨ 第九世祖師湛堂和尙眞影
⑩ 第十世祖師別傳宗主重續祖燈妙明尊者慧鑑國師眞影
⑪ 第十一世祖師妙嚴尊者贈諡慈圓國師眞影
⑫ 第十二世祖師慧覺國師眞影
⑬ 第十三世祖師覺嚴國師眞影
⑭ 第十四世祖師復庵和尙淨慧國師眞影
⑮ 第十五世祖師弘眞國師眞影
⑯ 第十六世祖師高峰和尙眞影
4) 영산전 불화
① 靈山大會幀 : 1725년(英祖 1, 雍正 3), 256×200cm, 紵本設彩
八相幀 : 1725년(英祖 1, 雍正 3), 132×153.8cm,
② 兜率來儀相
③ 毘蘫降生相
④ 四門遊觀相
⑤ 遊城出家相
⑥ 雪山修道相
⑦ 樹下降魔相
⑧ 鹿莞轉法相
⑨ 雙林涅槃相
⑩ 神衆幀 : 1879년(高宗 16, 光緖 5), 109×181cm,
⑪ 慈靜庵 地藏幀 : 1879년
⑫ 廣遠庵 地藏幀 : 1879년
5) 약사전 불화
① 甘露庵上壇後佛幀 : 1904년(光武 8, 光緖 30)
6) 응진당 불화
① 應眞靈山幀 : 1724년(景宗 4, 雍正 2), 163.5×170.5cm
② 十六羅漢幀(第一, 第三, 第五尊者幀) : 1725년(英祖 1, 雍正 3), 140×105cm
③ 十六羅漢幀(第二, 第四, 第六尊者幀)
④ 十六羅漢幀(第七, 第九尊者幀)
⑤ 十六羅漢幀(第八, 第十尊者幀)
⑥ 十六羅漢幀(第十一, 第十三, 第十五尊者幀)
⑦ 十六羅漢幀(第十二, 第十四, 第十六尊者幀)
⑧ 帝釋幀 : 140.5×104cm
⑨ 梵王幀 : 140.5×107cm
7) 관음전 불화
① 地藏幀 : 1765년(英祖 41, 乾隆 30), 183.4×190.6cm
② 山神幀 : 1858년(哲宗 9, 咸豊 8), 120.6×101.5cm
③ 神衆幀 : 1900년(光武 4, 光緖 26), 175×123cm
④ 獨聖幀 : 1906년(光武 11), 133.8×106cm
⑤ 七星幀(第一), (第二), (第三) : 1867년(高宗 4, 同治 6), 92×109.5cm
⑥ 觀音殿後佛幀 : 1847년(憲宗 23, 道光 27), 220×190.7cm
⑦ 藥師後佛幀(新造觀音欌內後佛幀) : 추정 1740년대, 137×122cm
8) 기타전각 불화
① 神衆幀(海淸堂) : 20세기 초
② 神衆幀(大智殿) : 1914년
③ 山神幀(山神閣) : 1899년(光武 3, 光緖 25)
9) 천자암 불화
① 地藏幀 : 1851년(哲宗 2, 咸豊 1), 202×193cm,
․영산전의 영산회상도(靈山殿의 靈山會上圖)
영산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는 이 영산회상도는 영산회상의 모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즉, 석가모니부처의 설법을 청하여 듣는 청문중(聽聞衆)을 그림의 하단에 배치하고 설법하는 석가불과 협시중(脇侍衆)들을 상당에 배치하는 이른바 영취산(靈鷲山)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단의 청문대중들은 중앙에 법을 청하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을 향해서 배례하는 뒷모습을 묘사하였고, 이 좌우로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인 청신남(淸信男)․청신녀(淸信女)들이 좌우로 꿇어 앉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왕과 장군, 악대 그리고 법천․제석천까지 배치되고 있는데 통도사 응진전의 설법도와 비슷한 배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청문중과 설법중 사이에는 좌우로 3구씩 6보살이 일렬로 나란히 시립하고 있어 석가불과 청문중을 연결해주는 다리의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석가불은 상단 중앙에 커다란 광배를 등지고 앉아 있는데 우견편단적인 착의법이지만 가사자락을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친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모자 같은 육계, 둥근 얼굴, 균형잡힌 체구 등은 직지사 영산회상도(1744)의 본존불과 비슷하며, 흥국사 팔상전 영산회상도(1693)와도 상통한다. 이 불상 좌우로 10대제자와 분신불이 있고 이를 둘러싸고 사천왕과 신중들이 있는데, 이들 모든 협시중들은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단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색채는 연한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어서 환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으나, 선명도가 약해서 은은하면서도 밝은 느낌은 별로 없다.
이 탱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을 하였으며, 크기는 가로 186.5cm, 세로 214cm이고, 1725년에 조성되었다.
․영산전의 팔상도(靈山殿의 八相圖)
현재 영산전 영산회상도(1725)의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최근 일부분이 절단된 외에는 완전한 편이다. 작은 화면에 여러 장면을 나타내고 여기에 많은 인물들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예천 용문사의 팔상도(1709)보다 훨씬 복잡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각 장면마다 장황하게 해설을 써넣고 있어서 더 한층 번잡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작은 화면에 복잡한 구도로 인하여 모든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작게 묘사되었는데, 이들은 다소 딱딱한 형태를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상당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이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등에 보이는 나무의 표현은 상당히 능숙한 편으로 당시의 수지법(樹枝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점은 ‘비람강생상’의 왕 뒤편 병풍에 보이는 산수화의 화격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점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그림의 분위기는 또한 색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밝고 선명하다기보다는 다소 탁한 편으로 붉은색도 적홍색으로 19세기에 유행한 붉은색의 선구가 되는 것 같다. 통도사 팔상도나 쌍계사 팔상도(1728) 등과 함께 18세기 팔상도의 전형적인 그림으로 손꼽힌다.
이 탱화는 8폭이며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고, 크기는 가로 119.5cm, 세로 123cm이며 1725년에 조성되었다.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
이 그림은 몇 점 남아 있지 않은 화엄경변상도 가운데 하나로서 신역(新譯) 화엄경(699년 寶叉難陀三藏譯, 80卷)의 내용을 압축, 묘사한 그림이다. 즉, 일곱 군데서 아홉번(七處九會:지상에서 다섯 번, 하늘에서 네 번) 설법한 것을 한 폭에 압축하여 그렸다. 화엄경을 설법한 법회 가운데 하늘에서 설법한 네장면은 화면의 상단부에 2열로 배치하고 지상에서 행한 다섯 번의 설법은 하단부에 역시 2열로 배치하여 화면전체를 꽉 채운 복잡한 구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하였다시피 아홉번의 설법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그 공간을 부처님들과 구름 등으로 묘사하여 화면을 조화시키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18세기말의 작품이지만 불․보살상들의 형태는 단정하고 정연하여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색채는 밝은 편이지만 홍색이 선명도가 다소 떨어지고 청색이 남용되고 있어서 18세기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아홉장면이 배치된 아래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는 장면도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예가 드문 화엄경변상도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탱화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가로 255cm, 세로 281cm이고 1770년에 조성되었다.
․국사전의 십육조사진영(國師殿의 十六祖師眞影)
16국사의 진영은 1995년의 도난으로 인하여 대부분 유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제1세 보조, 제2세 진각, 제14세 정혜국사의 진영에 불과하다. 16조사진영은 1990년 9월 20일에 16폭 모두 보물 제1043호로 지정되었으며, 18세기 한국 불화 양식과 초상화 양식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은 乾隆四十五年(1780)에 金魚 快玧과 福粲에 의하여 조성되었으며, 모두가 의자에 좌정한 모습으로 삭발을 하고 장삼에 가사를 걸치고 있는 형식이나 고봉화상진영만이 머리를 길고 있어 15국사와 구별하고 있다. 모두 비슷한 양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16진영 가운데 보조국사진영만 살펴보고자 한다.
보조국사진영(普照國師眞影)은 국사전에 봉안된 16국사의 영정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그림으로 녹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오른손에 주장자(拄杖子)를 짚은 전형적인 스님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기운없이 처진 눈썹, 관조하는 듯한 눈, 작은 입 등 담백한 색조 위의 골상(骨相)이 연약한 선에 의한 백묘법(白描法)으로 표현되어 있어 언뜻 보면 약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개성적인 얼굴표정과 직시하는 듯한 눈매는 스님의 강한 심성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 옷자락의 표현은 철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의 농담으로 각 부분을 묘사하여 색감의 효율성을 살리고 있어 적절한 배합과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을 효과있게 나타내고 있다. 이밖에도 크고 장식미가 돋보이는 의자, 화려한 금환구, 그리고 주장자의 정교한 표현 등에서 16국사 중 중심이 되는 스님의 높은 지위를 확연히 해주는 듯하다. 이 그림은 화기에 의하여 1780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으나 십육국사영정기(1621)에 의하면 이보다 앞선 영정이 1560년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진영은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가로 77.5cm, 세로 134.5cm이고 1780년에 조성되었다.
3. 송광사의 부도(浮屠)와 비(碑)
1) 국사들의 부도
보조국사 지눌은 송광사에 萬古의 영광을 가져오고, 우리 역사에 빛을 더한 위대한 종교적 巨星이었다. 그러나 이 송광사가 그후 길이길이 우리 불교사상 僧寶의 사찰로서 불멸의 전통을 쌓아 올리게 된 까닭은 그에게 탁월한 후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그의 高足 혜심(慧諶)은 왕명에 의하여 조계산 수선사의 제2세주가 되었고 그때부터 조선왕조 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동안에 16명의 국사(보조국사 지눌, 진각국사 혜심, 청진국사 몽여, 진명국사 혼원, 원오국사 천영, 원감국사 충지, 자정국사, 자각국사, 담당국사, 혜감국사 만항, 자원국사, 혜각국사, 각진국사 복구, 정혜국사, 홍진국사, 고봉화상)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선사의 정신을 이어 우리나라 정신계, 사상계를 이끌어 왔다. 이들 16명 국사 부도 가운데 송광사에 다음과 같이 7기의 부도가 남아 있고 그 밖에는 보성 대원사, 영광 불갑사 등에 있다.
① 보조국사 부도
관음전의 뒤쪽 언덕에 제1세 조사 보조국사의 부도가 있다. 높이 286cm의 이 부도는 고려 부도에서도 완전히 말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고 4각 기단 등은 대체로 딱딱한 감을 주고 있다. 寺中 기록에는 熙宗 6년(1210)의 건립이라 했지만 조형상으로는 훨씬 후대 것으로 보인다.
② 자정국사 부도
불일암은 본래 자정암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자정국사가 주석하였고 또한 국사의 부도가 이곳에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불일암 동쪽 언덕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마련하고 5.9m×4.15m의 탑구를 정한 중심에 건립하였다. 全高 2.32m로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다. 높직한 방형의 3단을 重積하고 기단부를 형성하였는데 8각의 하대에는 큼직한 복련 8판을 돌리고 원형의 중대석 위에 원형상대를 놓았으며 상대에는 16판의 앙련을 장식하였다. 8각의 탑신에 별다른 조식이 없고 정면에 「慈靜國師妙光之塔」이라 음각되어 있어 주인공을 알 수 있다. 平薄한 8각의 옥개석에는 기와골과 우동마루가 표시되고 8隅轉角에는 귀꽃문이 장식되었다. 상륜부에는 보륜과 보주가 갖추어져 있다. 기단부의 구성과 각부의 조각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의 所作으로 추정된다.
③ 진각국사 부도
全高 2.27m로 높직한 2단의 方形地石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원형지석을 重積한 하대위에 16판의 단엽앙련이 돌려진 하대석을 놓아 탑신을 받고 있다. 8각의 탑신석 각면에는 정면의 長方額內 「眞覺國師圓照之塔」銘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인왕상을 배치하고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두툼한 8각옥개석은 하면에 홈이 파여 있고 또한 낮은 받침 1단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우동마루가 뚜렷하고 8隅의 전각에는 귀꽃문이 장식되어 있다. 상륜은 보개와 보륜 보주 등이 장식되어 있다. 이 부도는 각부의 橫成과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반기의 건립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 밑에는 넓은 태지가 있어 암자터라고 하는데 약 30년전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
④ 자각국사 부도
일명 甘露庵浮屠라고 한다. 全高 2.45m로 3단의 방형지대위에 건립하였다. 8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8각하대석의 하단에 굽을 돌리고 큼직한 8판의 복련을 장식하였다. 중대와 상대는 동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8각의 중대석에는 8隅에 연주문주형이 모각되고 원형의 상대석은 2단의 받침과 8판앙련을 조각하였다. 8각의 길죽한 탑신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정면에 「慈覺國師澄靈之塔」이란 주인공의 음각명이 있을 뿐이다. 옥개석은 평박한데 하면에 받침이 있고 낙수면에는 기와골과 8隅의 귀꽃문이 있다. 상륜은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노반과 보륜, 보주 등이 장식되었다. 기단부의 구성과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반기에 건립한 부도로 추정된다.
⑤ 고봉화상 부도
전고 2.05m로 높직한 2단의 방형지대위에 건립한 부도이다. 팔각원당형을 따르고 있는데 8각의 하대석하단은 굽을 돌리고 큼직한 8판의 복련을 조식하였다. 원형의 중대석은 고복형을 이루었고 원형의 상대석은 하면에 받침 1단이 모각되고 앙련 12판이 돌려졌다. 8각의 길쭉한 탑신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정면에 46cm×13cm의 額을 마련하여 「高峰之塔」이라 주인공명을 음각해 놓았다. 옥개석은 하면에 낮은 2단의 받침이 있고 평박한 낙수면에는 우동마루와 귀꽃문이 있으나 형식화된 것이다. 상륜은 1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노반과 앙화, 보주 등이 장식되었다. 주변의 先師浮屠들인 고려시대 所作을 본따고 있으나 기단부의 앙복련과 옥개석은 형식화되어 조선시대 전반기의 건조물이 아닌가 한다.
⑥ 청진국사 부도
全高 2,28m로 높직한 3단의 방형지대위에 건립하였는데 원형의 하대에는 복련 13판이 돌려지고 상면에 원형괴임 1단을 조출하여 고복형 중대 1석을 받고 있다. 원형의 상대석은 하면에 1단받침이 있고 단엽중판의 앙련 13판이 장식되어 있다. 8각탑신에는 별다른 조식이 없고 정면에 「淸眞國師寂照之塔」이란 음각명이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다. 옥개석은 하면에 낮은 받침 4단과 넓직한 받침 1단이 있고 낙수면의 합각은 뚜렷하며 8隅轉角의 귀꽃문은 형식화 되었다. 상륜은 정상에 1석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부도는 기단부의 구성과 연화문의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반기의 건조물로 추정된다.
⑦ 원감국사 부도
全高 2.35m로 일명 東庵浮屠라고도 칭한다. 높직한 2단의 방형 지대석 위에 건립하였는데 8각하대석에는 굽형 2단을 돌리고 복현 16판을 장식하였다. 중대와 상대는 동일석인데 중대석은 낮은 고복형이다. 원형의 상대에는 앙련 16판을 돌리고 8각탑신에는 별다른 조식없이 정면에 「圓鑑國師□之塔」이란 주인공명이 있다. 옥개석은 하면에 2단의 받침이 있고 서까래가 표시되어 있다. 낙수면에는 기와골이 표현되었고 8隅의 우동마루로 잘 나타나 있는데 귀꽃문은 없다. 상륜은 1석으로 조성하였는데 복발, 보륜, 앙화, 보주 등이 장식되어 있다. 기단부의 구성과 옥개석 등 각부의 양식과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반기의 건조물로 추정된다.
2) 부도전(浮屠殿)의 부도와 탑비(塔碑)
법당에서 서북쪽 약 1km 지점에 부도전이 위치하고 있다. 부도전의 제일 위쪽에는 보조국사비와 송광사 사적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아래로 총 25기의 크고 작은 부도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그 밖에 3기의 비석이 더 있다.
① 보조국사비(普照國師碑)
전체 높이 3.94m이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다. 「해동조선국호남로순천부조계산송광사증시불일보조국사비명병서(海東朝鮮國湖南路順天府曹溪山松廣寺贈諡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숭정기원무진오십일년무오십월일중건사문설명(崇禎紀元戊辰五十一年戊午十月日重建沙門雪明)」이란 명문이 있다.
② 송광사 사적비(松廣寺 事蹟碑)
전체 높이 3.2m이며 장방형대좌와 이수의 개석을 갖추고 있다. 「승평조계산송광사사원사적비(昇平曹溪山松廣寺嗣院事蹟碑)」, 「숭정기원무진후오십일년무오십월일입비설명(崇禎紀元戊辰後五十一年戊午十月日立碑雪明)」이란 명문이 있다.
③ 25기의 부도와 3기의 비명은 浮休大師塔(높이 1.72m, 팔각원당형), 雷靜堂眞靈之塔(높이 1.84m, 팔각원당형), 圓照碧巖大師之塔(높이 2.8m), 松溪大師靈覺之塔(높이 2.38m, 팔각원당형), □□之塔(높이 1.87m, 석종형), 柳影之塔(높이 1.95m, 팔각원당형), 慧空之塔(높이 1.7m, 석종형), 栢庵之塔(높이 1.48m, 석종형), 休庵之塔(높이 1.75m), 栢庵大師碑(높이 3.8m), 友溪之塔(높이 1.65m, 석종형), 無用堂塔(높이 2.25m, 팔각원당형), 碧梧之塔(높이 2m, 팔각원당형), 一珠之塔(높이 1.5m), 影海之塔(높이 2.1m), 玩華堂浮屠(높이 1.7m, 석종형), 斗月和尙塔(높이 2.1m), 楓巖靈珠塔(높이 2.1m), □雲堂塔(높이 2.3m), 黙庵和尙浮屠(높이 2.24m, 팔각원당형), 黙庵大師碑(높이 2.91m), 碧潭堂塔(높이 2.07m), 慈庵堂守之塔(높이 1.47m, 석종형), 華雲堂塔(높이 2.25m), 幻海和尙浮屠(높이 2m, 팔각원당형), 龍雲大宗師碑(높이 2.7m), 會溪堂靈珠塔(높이 2.17m), 翠峰堂塔(높이 2.55m) 등이다.
④ 송광사 부도군(Ⅱ)의 부도
또 하나의 부도전이라 칭하는 부도군이 서쪽 한적한 곳에 있다. 모두 8기의 부도가 있는데 6기는 조선시대 후기의 부도이고 2기는 근년에 세운 부도이다.
溪峰岩牛禪師之塔(높이 2.7m, 근년 작), 華峰柳葉禪師塔(높이 2.7m, 근년 작), 花潭堂快律塔(높이 2.7m), 葆月堂道佑塔(높이 2.7m), 二珠堂塔(높이 2.7m), 五珠堂塔(높이 2.7m), 桐月之塔(높이 2.7m), 桂月之塔(높이 2.7m)
⑤ 송광사 비전의 비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 올라가면 일주문에 못미쳐서 오른쪽 어구에 碑殿이 있다. 이 비전에는 15기의 석비가 있는데 모두 조선시대 후기와 근년에 세워진 석비들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浮休堂碑(높이 3.85m, 大正九年四月日立), 碧巖大宗師碑(높이 3.8m, 大正七年月日立), 霽雲大師碑(높이 3.6m, 大正七年戊午十月初五日立), 黙庵大師塔(높이 3.2m, 世尊紀元二千九百五十年癸亥陰三月望日五世孫栗庵贊儀焚香謹識), 斗月大宗師碑(높이 3.5m, 大正七年戊午十日月日立), 奇峰大師碑(높이 4.12m, 大正七年戊午月日立), 峰大和尙碑(높이 3.33m, 大正七年戊午月日立), 曉峰大師碑(높이 3.3m, 世尊紀元二千九百九十四年西紀一九六七年丁未秋九月望立), 栗庵大宗師碑(높이 2.92m, 佛紀二五二六年壬午五月立竪), 綺山大宗師碑(높이 3.1m, 佛紀三千年, 西紀一九七三年癸丑四月十五日建立), 幻海大禪師碑(높이 3.4m, 大正九年三月日立), 龍雲大宗師碑(높이 3.37m, 世尊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甲子陰五月五日門孫栗庵贊儀謹識), 大愚大禪師碑(높이 3.2m, 佛紀二千五百二十三, 西紀一千九百七十九年乙未六月日立), 龍湖大禪師碑(높이 3.22m, 佛紀二千九百六十二年乙亥四月日立), 錦溟大宗師碑(높이 3.41m, 佛紀二千九百六十九年壬午二月日立)
4. 송광사의 불교공예
1) 범종
① 감로암 동종(甘露庵 銅鐘)
朝鮮朝後期鐘目錄에 따르면 이 종의 용뉴는 單龍이고, 天板은 반구형의 중국종양식을 갖고 立狀帶는 없다. 상대는 梵文을 돌렸고, 빗살문양의 유곽은 4좌이며,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4구의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종의 유곽은 탁본한 결과 20 × 20cm의 정사각형을 형성하고 있으며, 乳廓帶는 거친 빗살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유곽내에는 9(3 × 3)유를 배치하였으며, 각 유는 직경 3.6cm의 원형 10葉 蓮花 乳座 위에 직경 9mm의 융기된 乳頭를 갖고 있다.
보살상은 유곽과 유곽 사이에 1좌씩 4좌가, 너비 12cm, 높이 26.5cm 크기로 배치되었으며, 각 보살은 머리에 보관과 두광을 갖추었고, 합장하며 기원하고 있다. 이 종이 파손되어 전체를 볼 수 없게 되었으나, 탁본에 의한 鑄成年代는 乾隆 20年 을해인 영조 31년(1755)으로 밝혀졌다.
② 건륭명 동종(乾隆銘 銅鐘)
이 동종은 구경 44.6cm, 전고 69.4cm, 두께 3.8cm의 小鐘으로서 雙龍으로 된 용뉴, 上帶位置에 배치된 梵字紋과 鐘身을 구획하는 4개의 太條線을 돌렸으며, 유곽과 보살 등은 모두 생략되었다.
鐘腹에는 "乾隆乙酉順天松廣寺」天子庵中鐘百五十斤"이란 銘文이 있어 정조 9년(1785)에 주성된 150근의 天子庵 동종임을 알 수 있다.
2) 송광사 경패(松廣寺 經牌, 보물 제175호)
이 경패는 불경을 넣은 목함에 달아서 불경의 내용을 표시하는데 사용된 것이며 현재 43개가 남아 있다. 표면에 액을 만들고 經名과 번호를 刻字했으며 주연에는 여러가지 문양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문양은 연주문, 당초문, 학문 등으로 각양각색이다. 또 밑으로는 보살, 나한, 신장상 등이 양각되고 貞, 周, 晉, 何 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형식은 대체로 밑은 방형이고, 위는 호형이어서 위패형과 같고 조각기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재료는 상아와 목재이고, 크기는 높이 12.2~16.2cm, 너비 2.3~3.5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75호로 지정되었다.
3) 송광사 금동요령(松廣寺 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이 搖鈴은 불가에서 법요를 행할때 사용한 佛具로서 몸은 4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어깨부분은 원형을 이루어 반구형이 되었고 하단은 각 隅角을 정점으로 각면을 향하여 사선을 그리다가 중앙에서 반원형이 되었고 단조로와지기 쉬운 구연부에서는 변화를 주고 있다. 몸위에는 중앙에 마디가 있는 긴 손잡이가 있으나 몸과 접촉되는 곳에 후보의 흔적이 있고 상단부도 손상을 입고 있다. 몸의 전면에는 문양이 양각되었는데 구연 주위에 융기선을 돌리고 여기 붙여서 내면에 화판문이 연속되고 있다. 이 윤곽 안 각면에는 몸을 틀고 위로 치솟는 도안화된 용 한마리씩이 양각되었으며 그 사이에는 운문이 조각되었다. 이 佛具의 형태는 우아할 뿐 아니라 조각도 수려하여 현존하는 요령중에서도 걸작에 속하며 제작 연대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동요령의 규모는 높이 20.6cm, 직경 6.6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4) 자정국사 청자사리합(慈靜國師 靑磁舍利盒, 道 유형문화재 제18호)
이 사리합은 뚜껑이 있는 청자합으로 자정국사의 사리를 보관하였다고 하나 현재 사리는 없고 용기만 남아 있다. 뚜껑에는 국화문, 운학문, 연화문 등이 시문되었고 유약은 미세한 빙렬이 약간 있으나 비교적 얇게 시유되었다. 크기는 지름 15cm, 높이 7cm이다.
5) 송광사 능견난사(松廣寺 能見難思, 道 유형문화재 제19호)
이 능견난사는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가 元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銅으로 만든 佛具의 일종으로 불가에서 반식기로 사용한 것인데 보고도 만들 수 없어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현재 29개가 송광사에 남아 있으며, 크기는 지름 16.7cm이다.
6) 송광사 금강저(松廣寺 金剛杵, 道 유형문화재 제22호)
이 금강저는 三鈷형식으로 중앙의 손잡이 부분에 화문과 연화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금강저는 절에서 승려가 修法할 때 사용한 佛具의 일종이며 菩堤心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재료는 銅이며, 크기는 길이 30cm 정도이다.
그 밖에 衣裳으로 선암사에 금란가사와 용문탁의가 있다. 이들은 대각국사 의천의 유품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근거는 없고 오랜세월이 흘러서인지 양호한 편은 아니며 의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5. 송광사의 불서와 경질(佛書와 經帙)
① 松廣寺 沙法蓮華經觀世音若蓮普門品三玄圓贊科文(보물 제204호)
이 책(一冊)은 대각국사 의천이 간행한 高麗續藏經의 일부로 조판이 圓表式으로 되었으며 종횡으로 선을 그어서 文章을 연결하였다. 해행의 字數가 일정하지 않으며 板心에 “普門疏科”라는 書名 약칭과 매수를 새겨 넣었다. 첫머리 제목 다음에 “覺花島海雲寺崇祿大夫守司空轉國大師賜紫沙門思孝科定”이라 하여 저자의 宋의 승려인 思孝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은 없고 다만 “壽昌五年乙卯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彫造”라고만 되어 있다. 여기 壽昌五年乙卯는 高麗 肅宗 4年(1099)에 해당한다.
책의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36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② 松廣寺 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보물 제205호)
이 책(一冊)은 고려 대각국사가 간행한 高麗續藏經의 하나로 책머리에 “大奉先寺沙門玄範述”이라고 記名되어 있어 著者가 玄範임을 알 수 있다. 또 卷 第14의 끝에 다음과 같은 刊記가 있다. “大安九年癸酉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彫造”
이로서 위 冊은 당초 高麗 宣宗 10年(1093)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阿毘達磨(Abhidharma)라는 말은 불교의 경전을 經律論으로 구분한 가운데 論部의 총칭을 말한 것이다. 즉, 부처님의 설법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論이라 하는데, 이 論을 일면 阿毘達磨라 한다. 이 책의 내용은 부처님이 열반한 것을 기술한 喪禮法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36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③ 松廣寺 妙法蓮經讚述(보물 제206호, 사진 54)
이 책(一冊)은 高麗 大覺國師가 간행한 고려속장경의 일부이다. 책의 저자는 唐의 慧淨이며, 이 책을 쓴 사람은 간기에 의하면 南宮瑤임을 알 수 있다. 刊記를 보면 “壽昌元年乙亥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秘書省楷書同正臣南宮瑤書”라 하였다. 이 책은 高麗 獻宗 元年(1095)에 초간되고, 朝鮮 世祖 때 간경도감에서 복간되었다.
묘법연화경은 法華三部經의 하나로 이를 줄여서 法華經이라 한다. 이 경은 석존이 이 世에 나온 본 뜻을 말한 經典으로 지금까지 총 28品이 전해지고 있다.
책의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36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④ 松廣寺 金剛般若經疎開玄鈔(보물 제207호, 사진 55)
이 책(一冊) 역시 高麗續藏의 하나이다. 중국 승려인 公括이 지은 것을 志蘊이 다시 추가 보충하였는데 이 내용이 책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蜀郡沙門公括述東京天淸寺賜紫沙門志蘊後重刪補” 또한 卷 第四의 끝에는 다음의 刊記가 있다. “壽昌四年戊寅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將仕郞尙衣査長同正臣王 鼎 書” 卷 第五의 끝에는 “壽昌四年戊寅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將仕郞尙衣査長同正臣 李衍 書” 卷 第六의 끝에는 “壽昌四年戊寅歲高麗國大興王寺奉宣雕造」 將仕郞司宰主簿同正臣 李彪 書」 講華嚴經興王寺通奧大師賜紫沙門臣尙源校勘」 講華嚴經佛日寺慈應大師賜紫沙門融觀校勘」 講華嚴經佛日寺慧炤大師賜紫沙門臣滋顯校監」 天順五年辛巳歲朝鮮國刊經都監奉敎重修”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이 책은 高麗 肅宗 3年(1098)에 초간되었고, 朝鮮 世祖 6年(1461) 간경도감에서 복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특징은 各卷마다 쓴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世祖때 刊經都監에서 重刊하였다는 기록이다. 이것으로 송광사에 보존되고 있는 여러 高麗續藏이 모두 刊經都監의 復刊임을 확증케 한다.
책의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36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⑤ 松廣寺 經帙(보물 제134호, 사진 56)
이 경질(2枚)은 佛經을 말아두는 책갑의 일종으로서 고려시대의 제작품인데 지금까지 그 유례가 없는 희귀한 것이다. 가느다란 참대조각을 색실로 엮어서 장방형으로 만들고 끝단에는 삼각형의 비단 베를 붙여 그 끝에 끈을 달아 경책을 말아두게 하였다. 대쪽은 색실로 엮어 꽃무늬를 넣고 둘레에는 비단을 둘러 그 안에 종이를 발랐다.
손상이 매우 심한 편이지만 色실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문양은 지금도 생생하고 정교하다. 비록 헐고 그 형체만 남아 있을지라도 이는 불교신앙에서 우러나온 미술공세품으로 高僧들의 정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竹製 경질의 크기는 ① 가로 71cm, 세로 32.5cm, ② 가로 59cm, 세로 32.5cm이며,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6. 송광사의 기타 불교문화재
1) 송광사 팔사파문자(松廣寺 八思巴文字, 道 유형문화재 제30호)
이 문자는 몽고문자로서 八思巴라는 말은 사람 이름으로 티벳 후기밀교 샤카派의 僧 빠끄빠(1235~1280)를 가리킨 말이다. 이것은 원감국사가 고려 충렬왕의 명을 받고 元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길에 元世祖가 신분을 보장하는 여행증으로 준 것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해독이 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문자가 써 있는 종이의 크기는 가로 61cm, 세로 48cm이다.
7. 송광사의 건조물
(1) 국사전
국사전이야말로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사찰은 단순히 승려가 있어 사찰이 아니라 수도하는 고승대덕이 있음으로 해서 그 격은 더욱 높고,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나는 것입니다. 옛부터 송광사는 16분의 국사를 배출했다. 다른 사찰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승보사찰의 전통이다.
국사전은 송광사와 더불어 나라를 빛낸 국사들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일종의 법당이다. 옛날에는 참선을 하던 수선처였다. 이 곳에 봉안된 16국사는 조계종의 가풍을 선양하고 불교의 참 면목을 드러낸 한국 불교의 종장들이니다.
본래 국사는 나라의 사표(師表)가 되는 고승에게 국왕이 직접 내리는 칭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고려시대에 있어서는 늘 나라의 사표가 될 만한 고덕한 승려들에게 이러한 국사의 칭호를 내렸던 것이며, 이 곳 송광사에는 특히 열 다섯 분이나 되는 국사를 배출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따로 국사전을 만들고, 그분들의 덕을 길이 추모하게 된 것이다. 송광사의 16국사란 고려조에 와서 국사의 칭호를 받은 15인, 그리고 조선조에 와서 그 공덕과 법력이 지난날의 국사와 같다하여 종문(宗門)에서 추앙한 고봉화상(高峯和尙)을 합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국보 제 56호로 지정되어 매우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조 초기 목조건물 및 불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지만 그 건립년대를 확실히 할 사료는 없고 1450년 전후의 건물로 판정하고 있었는데, 보수를 하면서 건립연대가 확인된 바 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4간, 측면 3간(11m×4m)의 단일 통문(通門) 5량집 구조이며, 맞배지붕이다. 기둥 역시 조선기의 민흘림의 소박한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 높이(235cm)와 처마 깊이(198cm)는 큰 차이가 없어 건물이 몹시 낮아 보인다. 대체적으로 맞배집이 그러한 것과 같이 건물의 무게가 지붕에 쏠린 듯하여 더욱 육중해 보이는 하중은 안정감을 더해 주고 있다.
내부에는 제1세 조사인 불일 보조국사, 제2세 진각국사, 제3세 청진국사를 비롯한 16국사의 眞影이 모셔져 있었다. 이 진영은 1780년 4월에 완성되었고, 1990년 보물 10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봉안 전시중이다.
(2) 하사당
하사당은 보물 제 263호로 지정되어 있는 특수한 건물이다. 건축 양식이 국사전과 동일하여 조선 초기로 생각되는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3간(342cm), 측면 3간(351cm)으로서, 왼쪽 2간은 온돌방이고 그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으며, 오른쪽 1간은 부엌으로되어 있다. 송광사지(임석진편, 1965)에 의하면 광무 3년(서기 1899) 가을에 총섭 수현(守玹)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며 건물의 내부구조는 드러나 있다.
(3) 풍암영각
풍암영각(楓巖影閣)은 조선조에 와서 송광사의 대덕들이 거의 다 풍암스님의 법손이므로 불려진 이름이다. 사중기록에 의하면 철종 3년(서기1852)에 건립되었으며 1951년의 대화재를 모면하였으므로 건립 그 당시의 건물로 생각된다. 전면 3간, 측면 2간의 이 건물 내에는 주로 풍암문하 대덕들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4) 약사전
약사전은 송광사내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법당이다. 건물 양식이 독특하여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4방 1간으로서 내부에는 대들보가 없고, 중창된 시기는 인조 18년(1640)으로 상량문에 기록되었다. 내부에는 약사여래를 봉안했고, 후불탱화는 본래 감로암에 있던 후불탱으로 생각된다.
(5) 영산전
영산전은 현재 보물 제303호로 지정되어 있. 1640년에 약사전과 동시에 중건 되었고 영조 13년(서기 1737)에 중수했으며 1974년도에 다시 중수된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집이다. 영산전은 일명 팔상전(八相殿)이라고도 하는데 법화경에서 비롯되었다. 또는 영산정토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영산전내에 본존 석가여래 조상을 봉안했고 후불탱은 영산회상의 법화경 설법상을 묘사한 영산대회탱이다. 또 좌우에는 석가여래의 일생을 나타낸 팔상탱을 봉안했다. 중앙의 영산대회탱은 영조 원년(서기1725)에 조성되었다.
(6) 삼청교 및 우화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정면 1간, 측면 4간, 팔작지붕, 폭 5m, 높이 2.3m, 1976년 9월 30일 지정
삼청교와 우화각은 밑은 홍교로서 다리역할을 하고 위는 건물이면서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통로역할을 하는 구조이다. 우화각은 기단은 바로 홍교의 상층부분의 장대석으로 결구된 평면을 이용하였고 양편에 긴 장대석 4개를 연결시켜 낮은 난간을 삼았다. 주초는 약간 높은 원형초석을 놓았고 기둥은 원형기둥인데 전면은 추녀밑에 활주를 세웠다. 포작은 주심포인데 주첨차는 교두형이며 행공첨차는 초각을 하였다. 들어가는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 지붕끝은 맞배형으로 처리하였다.
홍교는 19개의 방형 장대석을 짜올려 홍예를 이루었으며 양측면도 역시 다듬은 방형장대석을 쌓아올려 가중을 지탱케 했다. 홍예형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가 돌출해 있다. 이 삼청교는 일명 능허교라 부르기도 한다. 1774년에 쓴 「능허교중창기」에 의하면 원래 판목으로 만든 다리였던 것 같다. 1707년에 홍교를 조성한 뒤 60여년이 지난 뒤에 중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7) 대웅보전
종고루를 지나 다시 내정(內庭)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자(亞字)형 대웅전 건물이 정면으로 우뚝 솟아 있고, 왼쪽에는 승보전,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날개처럼 벌려 서 있다. 이 건물은 8차 중창불사 때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이 불사에 직접 동참하여 자기 연구 성과를 거리낌없이 반영한 것이다. 그 결과 우리 건축사상 목조 건물이 가질 수 있었던 온갖 장점을 결합하고 파생될 수 있는 온갖 결함을 배제하여 현대 감각에 알맞은 108평 순 목조 대웅전 건물을 이룩하였다. 대웅보전 안에는 삼세여래(三世如來)와 사대보살상(四大菩薩像)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는데 우리들이 영원히 공경하고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도록 친근하고 아름다우며 위엄이 깃든 자비상을 보이고 있다.
장차 부처님이 되실 분은 수없이 많은 생을 착한 일로 보내야 하고 또 먼저 부처님께서 그것을 보시면 장차 부처님이 되실 것을 미리 알수 있어서 언제 부처님이 되리라는 약속을 주시게 된다고 하니 이것을 수기라 한다. 현재불인 석가모니불도 과거 전생에 연등불(燃燈佛)로부터 이런 수기를 받으시고 부처님이 되셨고 부처님이 되신 후에는 미륵(彌勒)에게 수기를 주셨다. 그래서 미륵불은 앞으로 56억 7천만 년 후에 나타날 미래불로 예정되고 있다. 따라서 승보종찰인 송광사는 장차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사자 상승(師資相承)으로 석가모니불의 법등(法燈)을 지켜 그 공백을 메워 줄 책임이 있기 때문에 대웅보전에 과거 연등불과 현재 석가모니불 및 미래 미륵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게 된 것이다.
(8) 승보전
승보전은 옛 대웅전 건물을 손상없이 이건(移建)하여 원형을 보존해 놓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여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十六羅漢)그리고 1,250인의 비구제자상을 재현하였는데, 송광사가 승보종찰임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9) 지장전
지장전에는 지장삼존(地藏三尊)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조성 봉안하였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난받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신 분이다. 돌아가신 분의 천도를 위하여 지내는 모든 재식(齋式)이 지장전에서 거행된다.
(10) 수선사
수선사는 최초의 조계총림의 방장인 보조국사의 거실이었다. 그러나, 조선조 말기에는 조사전으로 쓰였고, 당시 주지 해은(海隱)대사가 33조사의 영정을 도서실로 쓰이던 대장전으로 이안하고 그 대신 부휴스님의 영정을 수선사에 봉안했으나 이들은 1951년의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현 건물은 1968년 여름에 착공하여 196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전면 6간, 측면 4간으로서 측면은 전후에 툇마루가 각각 1간씩 있으며 현재 내부에는 커다란 둥근 거울만 하나 있을 뿐이다. 이 건물은 송광사내에서 명실상부한 수도처로서 약 25명의 선객이 상주하고 있다. 일체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는, 분위기가 차분한 선실이다.
(11) 설법전
설법전은 본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인쇄하여 봉안해 두던 곳이다. 광무 3년(서기1899)봄에 나라에서 해인사 대장경 4부를 칙인하여 그 1부는 전국의 명찰에 분산 보관했고 나머지 3부는 삼보사찰에 각각 봉안하게 했다. 이 장경이 통도사와 해인사에는 지금도 보존되어 있으나 송광사의 장경은 1951년 화재시 설법전과 함께 소진되고 말았다. 또 보조국사의 설법상(說法床)이 있었다고 구전되어 오나 함께 소실되었다. 현 건물은 1968년 4월 30일에 중건되어 법회 등을 위한 대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2) 상사당
상사당은 하사당과 함께 남향으로 서 있는데 제 9대 조사 담당국사가 이 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도를 깨쳤다고해서 일명 삼일암(三日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사는 본래 천자암에서 수도하다가 이 곳 상사당에서 3일 만에 오도했는데 이후 그때 마신 우물을 삼일영천(三日靈泉)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상사당 뒤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상사당 건물의 크기는 전면과 측면 각각 3간이며, 송광사지에 의하면 철종 7년(서기1856) 봄에 화주 용운(龍雲)대사가 임응환의 시주로 삼일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지금의 수선사를 짓기 전에는 이 곳이 선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상․하사당을 모두 사용할 때는 상사당에는 구참납자가 거처했고, 하사당에는 주로 신참납자가 정진 했다.
(13) 응진당
응진당은 사중 기록에는 인조 원년(서기 1623)의 건물이라고 하고 있다. 정면 3간, 측면 4간으로서 조선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지붕은 역시 맞배지붕 내부에는 석가여래와 그의 제자 16나한을 봉안했는데 각양각색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다.
(14) 관음전
관음전은 문수전의 우측에 있다. 현 건물은 사중기록에 있는 광무 7년(서기 1903)에 건립되었다.
(15) 화엄전
송광사의 주요 전각이 위치한 영역의 남쪽으로 계류 건너편에는 화엄전을 비롯한 몇개의 건물이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후원 계곡을 건너 자리잡고 있는 화엄전은 인조 19년(서기 1641)에 창건되었다. 내부에는 송광사의 장경 판본을 봉안했으며 53불의 석불을 봉안한 불조전과 성산각(星山閣)․월조헌(月照軒)․명성각(明星閣)이 있다. 현 건물은 북향하여 있으며 정면 3간, 측면 2간의 주심포(柱心包) 맞배집이다.
4. 송광사의 부설기구
(1) 수련원(修鍊院)
송광사에서는 일반인들을 위하여 매년 여름에 수련법회를 실시하고 있다. 최근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한시적인 ‘출가' 프로그램이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서 쌓인 몸과 마음의 피로를 공해와 소음이 없는 산사에서 풀 수 있는 기회이다.
한번에 4박 5일씩 보통 6-8차에 걸쳐 실시하며 5월 중 송광사에서 발행하는 월간 <불일회보>와 교계신문에 공고를 한다. 모집기간은 보통 5월 20일부터 6월 10일까지 20일간이며 모집인원은 매 차수 100명이며 수련은 7월초 부터 8월 중순까지 실시하고 있다.
(2) 보조사상연구원
보조사상연구원은 1987년 불조의 혜명을 계승하고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의 사상과 가풍을 연구․계발하여 정신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한국불교의 중흥으로 불국토 건설을 그 목적으로 하는 송광사의 연구기관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제것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남의 것만을 우러르는 자주성을 망각한 사대적인 경향 때문에 자기네 조상에 대한 학구적인 관심마저 결여되는 경향이 있어 과학과 물질만능의 그릇된 풍조 속에 인간의 진심을 잃은 채 뒤바뀐 가치의식으로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세속의 가치만으로 진정한 삶의 길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세계의 양심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하여 보조사상을 잉태하고 공표하고 몸소 실천했던 근본도량인 승보의 가람 송광사에서 때늦은 감은 있지만 보조사상연구원을 발족하게 되었다. 이 연구원을 통해서 보조사상을 오늘 이 땅에 새롭게 심으려는 뜻이다. 보조 스님의 가르침이 편협한 종교계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인 인류의 사상으로 수용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뜻 있는 분들의 많은 관심과 동참이 있기를 바란다.
․주소 :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12 / 보조사상연구원(우 540-930)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1-1, 법련사내 / 보조사상연구원(우110-190)
․전화 : (02) 733-5335, 5336
(3) 불일회
불일회는 송광사 조계총림의 신도 후원단체 조직이다. 1969년 구산스님에 의해 불교의 불모지인 호남지방에 조계총림이 개설되었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방장스님의 선풍(禪風)을 흠모하여 여법(如法)히 정진할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수행납자들의 뒷바라지였다. 이에 현호스님은 구산스님의 뜻을 받들어 대구의 몇몇 신심있는 보살들과 협조하여 총림의 운영과 발전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총림의 후원단체인 불일회(佛日會)를 만들기로 하고 1969 년 9월 5일 대구 관음사에서 불일회 창립법회를 갖게 되었다.
불일회는 회(會)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고려불교를 중흥시킨 불일 보조국사의 사상을 따라 제2차 정혜결사운동을 벌여 이 땅에 새불교를 펴자는데 그 뜻이 있다. 불일회의 특징은 사부대중이 참여하여 불법의 혜명(慧命)을 이을 본분납자를 길러낼 조계총림을 후원하며 나아가서 회원상호간의 친목유대는 물론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실천하는데 있다.
또한 불일회의 근본취지는 영원한 생명 속에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는 불도(佛道)의 지혜와 사바의 고뇌 속에 오직 중생만을 위해 사는 것이 불보살의 대자대비임을 자각하고, 신라․고려의 황금시대에 무수한 고승석덕(高僧碩德)들이 지혜와 자비로써 위대한 빛을 남기어 국가와 민족문화에 찬란한 횃불이 되었음을 새롭게 인식해 보고자 하는데 있다.
16국사가 배출된 대선불장(大選佛場)인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가 총림으로서의 면모를 세우는 데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듯이 도연(道緣)과 외호연(外護緣)이 함께 공존되어야 한다. 따라서 총림의 후원회를 세움은 이러한 외호연으로서의 적극적인 참여의 의미가 있다.
불일회의 성립은 다른 신행단체와는 그 동기부터 다르고 사부대중이 참여하여 불일 보조스님의 사상을 계승하며 순수하게 총림의 발전을 위한 후원단체로 오늘날과 같이 송광사가 승보종찰로서의 면목과 수도장으로 발전된 될 수 있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
(4) 불일회보(佛日會報)
불일회보는 정법(正法)을 구현하고 선사상(禪思想)을 고취하며 불교의 생활화를 위하여 1980년부터 송광사에서 매달 발행하고 있는 잡지이다. 당시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에서 주지 현호스님을 발행인으로 현음스님을 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식 등록을 하고 발행하는 문서포교의 효시였다. 불일회보는 스님들의 법문과 시사문제 제시와 해결책 등을 게재하고 있으며 교리강의, 사찰순례, 불일회 탐방, 송광사 본말사 소식 등을 싣고 있다. 처음 4면으로 시작한 불일회보는 현재 지령 200호를 넘었으며 16면으로 발행하고 있다.
․연락처 : 불일회보사 전화 02-733-5315, 팩스 02-733-5316
(5) 불일출판사(佛日出版社)
불일출판사는 송광사에서 설립한 불교전문출판사로서 문서포교를 통하여 부처님의 정법 선양과 한국불교의 선사상 을 고취하며 불교문화의 보급을 통해 대중들의 정서를 함양하는데 이바지 하고자 1983년에 설립되었다. 현재 60여종의 불교서적을 간행하여 불교출판의 선구자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주소 : 서울 지사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121-1 법련사내
․전화 : 02-733-5311, 팩스 02-733-5312
(6) 정혜사(定慧社)
정혜사는 강원 학인스님들이 발행하는 계간지이다. 학인스님들이 평소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혜사는 원래 현재 송광사 큰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요사채의 이름입니다. 정혜사에서는 매일 간경하고, 공양하고, 참회하고, 포살하는 등 대중생활 전반이 이루어지고 있다.
5년전인 1993년 강주스님을 비롯한 강원스님들이 송광사 강원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보고자 뜻을 같이하여 해청당(海淸堂)을 발간하게 되었다. 해청당은 지금 큰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정혜사 이전의 큰방 이름이다. 그 후 학인스님들의 숫자가 늘어 큰방이 비좁게 되어 새로 방사를 마련하여 1997년 5월 새로 입주한 곳이 지금의 정혜사이다. 보조스님께서 정혜결사를 하신 곳답게 선원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은 수선사요, 강원 학인스님들이 정진하는 곳은 정혜사라 이름한 것이다.
정혜사 잡지는 외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원고에서 편집까지를 모두 학인스님들이 담당하고 있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가끔은 어색한 면도 많지만, 여러 독자들의 후원으로 갈수록 회원도 늘어가고 내용도 알차게 꾸며지고 있다.
☏. (061)755-5300, 5302
* 참고문헌
송광사 홈페이지, 문화재도록(전라남도)
韓國佛敎文化硏究院, 1984, 松廣寺, 一志社.
강건기 외, 1997, 송광사, 대원사.
聖寶文化財硏究院, 1998, 韓國의 佛畵 - 松廣寺 本末寺篇(上․下)
崔淳雨․鄭良謨, 1970, 韓國의 佛敎繪畵 松廣寺, 국립박물관.
최인선, 2000, 순천시의 불교문화유적, 순천시의 문화유적(Ⅱ), 순천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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