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슨은 '구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했다. 마치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으로 절단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구원의 '보증'으로 주어진 성령님을 과거의 성령, 현재의 성령, 미래의 성령으로 '절단'시켜버리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믿음'도 오해하고 있음을 두 번째 설명에서 보여준다.
먼저 그의 견해들을 그대로 옮겨 놓아 보겠다: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이 마음에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어떤 것인가? 놀랍게도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더 관련이 깊다.그것은 당신이 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p.43).
"그러나 지금까지는 안타깝게도 믿음의 실천보다 믿음의 고백을, 그리고 행함보다 신조를 가르쳐 왔다. 그 '믿음'은 선포될 수 있지만, 증명될 수 없다. "난 내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일 것이다"라고 야고보사도는 말하고 있다(약2:18)"(p.43-44).
"고백이 실천을 대신할 때, 그것은 '구원얻는 믿음은 단지 순간의 문제'라는 생각을 향한 잔걸음이 된다. 그들은 '당신이 그 분을 당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믿는다고 말만 하라'고 한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단 한 순간의 믿음이 영원한 구속을 보장해 준다고 주장한다. 그 말이 죽어가는 사람(예수님 오른 편의 두 강도처럼)에게는 맞을 지 모르지만, 산 사람의 경우에는 다르다. 죽어가는 사람은 계속해서 믿음을 실천할 수 없지만, 산 사람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구원처럼 믿음도 계속 진행되는 어떤 것이라는 게 신약의 생각이다. 믿음은 행동으로 표현되는 지속적인 태도이다. 특별히 믿음이 한 인격과 관련되어질 때 더욱 이 성격을 보인다. 누군가를 단 한 순간 믿는다는 것은 용어상으로도 모순이 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를 진실로 믿는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을 계속 신뢰(혹은 순종)할 것이다"(p.44).
이러한 도슨의 '믿음'의 이해에 대해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첫째, 그가 믿음이 '의지'와 '실천'에 관계된다고 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옳고,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믿음은 '의지'와 '실천'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감정'과도 관계되고, 또한 '지성'과도 관계된다. 한 마디로, 지, 정,의의 전인적인 위탁이 믿음이다. 어느 하나만 강조해서는 잘못될 수가 있고, 치명적일 수가 있다.
믿음의 인격적 요소에 있어서, 의지만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근대교회사에 있어서 바로 찰스 피니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잘못들을 지적하자면, 너무 긴 글이 되어 버릴 것이다. 도슨이 반대하고 있는 '믿음'은 순간적인 '감정'적인 고백이거나 '지적' 인정에 그쳐버리고 마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당연히 비판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믿음'을 비판한다면서, 또 다른 잘못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니다.
그의 비판이 그렇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주장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에서도 분명해 진다. 곧, 도슨이 '믿음'의 의지적, 실천적 측면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바로 "계속적 성격'을 한 편으로는 올바르게, 한 편으로는, 잘못되고 왜곡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믿음'의 성격과 특성을 다시 한 번 더 음미해 보자. 그것을 위해서 이런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깨어 있는 순간에는 분명히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믿는' 어떤 사람이, 혹은 전인적으로 믿는 어떤 사람이, 잠을 자는 밤 중의 8시간 정도의 수면 기간에는 과연 그 믿음을 '계속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과연 그 사람이 수면하는 그 기간 동안에, 믿음이 표현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기간 중에는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도슨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잠자는 수면기간 중'는 어떤 사람도 믿음이 없다고 하는 셈이다. 의지적으로 계속 실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인성으로 공생애기간 중에 '수면을 취하셨음'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 수면하는 순간에 예수님은 믿음이 없으셨다. 도슨이 논리가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불완전한다. 흠이 있는 제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류구속을 위한 참된 제물로서의 자격을 상실해 버린다.
믿음이란, 오른편 강도가 믿음을 가졌으되, 그 믿음을 표현할 기회도 없는 채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게만 아니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의지'적인 것만이 아니고, '실천적'인 것만도 아니다. 이런 나의 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믿음은 실천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함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나의 주장은, 믿음은 의지적으로 계속 실천하는 것 그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믿음은, 의지적 계속 실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을 동원한 결단이기 때문에, 잠을 자고 있는 순간에도 열심히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의지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식을 집중하지 않는 그런 순간에도,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존재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런 믿음을, '마음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코, '감정'의 믿음도 아니고, 의지도 믿음도 아니고, 머리의 믿음만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통합되어 그 사람의 영혼의 밑바닥과 토대에 깔려 있는 삶의 자세이고,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태도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눈에 드러나는 것만도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행함을 강조하는 것과 유사해질 수 있다. 위험한 주장이다. 의지를 강조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얼핏 올바른 것 같아도, 이런 외적 행위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도슨의 주장이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책에서 그는 계속해서, 그의 잘못된 믿음의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믿음에 대한 헬라어명사와 동사를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나의 비판을 참고하고 본다면, 그의 설명이 믿음의 특성의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 직접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20장31절에 요한복음서의 기록목적을 '불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도슨은 주장하고 있다. "계속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서를 '불신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적당치 못하다고까지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의문을 던져보실 수 있기를 바란다. 극단적인 주장은 언제나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왜, 요한복음서가 신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고, 불신자에게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인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지 않을까?
'감정'의 믿음도 아니고, 의지도 믿음도 아니고, 머리의 믿음만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통합되어 그 사람의 영혼의 밑바닥과 토대에 깔려 있는 삶의 자세이고, 하나님을 향한 전인적인 태도이다. 아멘입니다, 새로 읽으니 더욱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