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도슨의 '유사'복음주의적 전제들 다섯가지를 제시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전제들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주장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까 의심해 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의심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을 제3장의 비평에서 실제로 확인해 보게 될 것이다.
도슨의 책 3장은 그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성경적으로 비판하겠다고 하면서 그 제목을 'Scriptural Indications"(성경적인 입장)이라고 달아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그의 견해가 얼마나 '성경적이지 않는가'를 본격적으로 비평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어느 견해가 과연 진짜로 성경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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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약을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신약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다. 먼저 구약부분을 비평해 보자.
그의 말부터 들어보자:
"하나님의 모든 선택된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를 누렸는가? 그 대답은 분명히 부정적이다. 처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체결하셨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 약속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였고, 에서는 이삭의 장자였다. 에서의 경우는 자신의 순간적인 만족 때문에 기업을 박탈당했다"(p.65).
얼마나 그의 견해가 천박한가?
그는 지금,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맺게 된 그 언약에 참여한 자들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는 이스마엘조차도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 자로 여기고 있고, 에서도 언약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언약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그렇게 두 가지 언약이 있다고 구분하지 않았던가? 갈라디아서4장21절부터 읽어보기를 바란다: "네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21-24절).
곧 언약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하갈로 비유가 되는 시내산의 율법의 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로 비유가 되는 새예루살렘의 언약, 곧 새언약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마치 새언약의 자녀인 것처럼 여기기 쉽상이다. 그래서, 도슨처럼 억지주장을 하게 된다. 성경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성경적이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파괴시키는데 앞장을 서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바울사도가 '두 언약'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을 '비유'라고 말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라의 몸에서 난 모든 자녀들이 모두 '새언약'의 자녀인 것처럼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거니와 비유이다. 곧, 이 비유가 하갈과 사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데, 그렇게 하갈과 사라의 경우에 해당되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
바로 믿음의 원리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새언약에 참여하게 되고,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모든 자들을 일러서, 아브라함이 사라로 인하여 낳게 된 그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의 원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참된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은 바로 사라로 인하여 낳게 된 자들인 셈이다. 사라가 바로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고 "자유자'이며, "곧 우리 어머니"가 되는 이유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는 것이고, 그 아내 사라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믿는 자들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라고 이런 대목에서 주장하는 자들은 지금 무슨 말을 홀리죠이가 하는 지 파악조차 못하는 자들이다!).
육체의 접촉으로 말미암아 생산하게 된 자녀들을, 영적인 원리에 의해서 낳게 된 자녀들과 혼동하는 것은, 더러운 것과 거룩한 것을 뒤섞여 놓는 것과 같이 추한 일이다. 도슨의 주장이 바로 그런 추한 주장인 셈이다.
따지자면, 하갈의 육적인 자녀들 중에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자들이 없었을까? 이삭이 낳은 자녀들 모두가 믿음을 갖게 되어서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도슨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마치, 이삭의 육신을 통해서 나온 자녀들이라면 누구나 언약에 참여한 자들이 되고,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에서처럼 구원과 기업에서 탈락하게 되었다는 논리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오히려 성경에서는 에서가 아예 언약에 참여하지 못한 자임을 강조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말라기1장2절)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언제, 에서가 도대체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더란 말인가?
에서는 도대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적도 없는 것이다!
이삭의 자녀라는 점에서의 언약을 맺었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맺게 되는 언약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육적인 언약인 셈이다. 곧 시내산의 언약이고, 새예루살렘의 언약이 아닌 것이다.
두 언약이 있다는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한다면, 도슨의 주장은, 단칼에 무너지게 된다. 그의 계속되는 구약의 "한 번 구원받았지만" 그 구원에서 탈락된 자들의 수많은 예들이 이렇게 잘못된 개념들에 근거해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새언약'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조차도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논할 때, 신구약 사이의 연속성을 근거로 한 '언약 신학'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신학자들이 신구약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든다면, 유아세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할례를 사용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사실 그들은 옛언약과 새언약을 하나의 '은총의 언약'으로 보기 좋게 융합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주님 오시기 전에 이 언약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주님 오신 이후에도 가능하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p.68-69)
(작성중입니다....바쁜 일이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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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 글을 올려두고, 다시 틈이 생겼기는 했지만 윗글을 이어서 비평을 잠시 쉬었던 것은, 위에서 인용한 붉은 색표시 부분의 글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오해에 근거한 것인가를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슨은 '언약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신구약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면서도, 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에는 '신구약사이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도슨이 '언약신학'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약신학'은 무엇인가? 신구약성경의 핵심주제들 중의 하나를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임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구약과 신약에 공통되면서도 공통되지 않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연속적인 것과 동시에 불연속적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언약신학'이다. 그런데,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어떤 면에서는 '연속성'을 주장하면서,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불평하니, 도대체 도슨이 '언약신학'을 알기라도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무엇이 연속적이며 무엇이 연속적이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문제의식을 갖지도 못한 채로, 불평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어리석은 비평은, 그가 예로 든 '유아세례"에 대한 설명에서 여지없이 그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유아세례는 구약의 할례에 나타나는 언약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런데, 할례의 언약과 유아세례 사이에 있는 연속적인 부분과 불연속적인 부분을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엄연히 구분한다. 곧, 신자의 자녀들에게 주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와 "유세"가 연속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할례받았다고 해도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유아세례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는 면에서 그 연속적인 공통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할례는 남자아이의 생식기의 껍질을 벗기는 예식으로서 신약의 교회에 전혀 binding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면에서 신약의 유아세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곧 불연속적인 것이다. 이것을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이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슨은, 이런 '언약신학'의 주장을, '옛언약과 새언약을 하나의 "은총의 언약"으로 보기 좋게 융합시켜 버렸다'고 한다. 융합은 무슨 융합? 엄연히 구분하면서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분별하고 있는데, 융합은 무슨 핵융합인가! 참으로 괴이한 주장이다. 유아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게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너무나 큰 오해이다. 아마도 도슨이 가지고 있는 '중생'의 개념 중에서 baptismal regeneration의 개념을 수용하는 부분 있어서 도둑이 제발 지린다는 말처럼 자신의 주장의 모순을 미리 드러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이 점에 대해서는 조만간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 지게 될 것이다!)
영원한 구원은 결코 할례로도 보장받는 것이 아니고, 유아세례로도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보장되는 것이다. 그 믿음을 허락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음을 갖는 이가 그 믿음의 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바라보게 하시는 그 역사로 가능한 것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융합'인가?
할례의 언약을 받은 이들도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유아세례의 언약을 받은 이들도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관되고, 너무나도 지속적인,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이런 언약신학을 알지도 못한 채로 비판하는 도슨의 비판이 너무나 어이가 없다.
어떻게 이런 주장을 책으로 내는 것일까?
이런 책을 출판하고 있는 모리아출판사는 도대체 어떤 출판사일까?
이런 출판사를 운영하는 윤모장로는 어떤 분일까?
도대체 존경을 받는다는 그 분의 신학과 분별력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첫댓글 뒷부분을 첨가했습니다. 생각하면 할 수록, 더욱 어이가 없어지는군요.
윤종하총무님이 성서유니온사의 매일성경을 통해 큐티를 보급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과 인품이 훌륭하여 존경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을 출판하시어 윤총무님을 신뢰하는 많은 분들에게 혼란을 주었을 수도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조용기목사가 토마스주남여사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번역하고 추천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그 책을 당연히 성경적인 책으로 오인하게 만든것처럼 이 책이 마치 성경적인 것으로 오인하게끔 하신 것이 유감입니다.
holyjoy 님 비평을 들으니 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갑자기 제가 '포슨'을 '도슨'이라고 쓰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데이비드 포슨'이라는 이름을 '융합'시켜버린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의 ㄷ와 포슨의 오슨을 합해서 '도슨'이 된 모양입니다 ㅎㅎ
안그래도 한번 말씀드릴려다가 포슨의 다른 이름이 혹시 도슨인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앞으론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즉각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저도 참 실수가 많답니다. 그래서 저를 가까이서 아는 분들은 그 실수 때문에 너무나 인간적이라면서 좋아하시더군요 ㅎㅎ....실수가 없이 너무 완벽해서 정나미 떨어지쟎아요, 그죠? ^^
영원한 구원은 결코 할례로도 보장받는 것이 아니고, 유아세례로도 보장받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보장되는 것이다. 그 믿음을 허락하시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음을 갖는 이가 그 믿음의 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바라보게 하시는 그 역사로 가능한 것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다. ~아멘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는 몇번더 읽으면서 공부해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