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슨의 다음의 말에 있은 잘못된 주장과 잘못된 성구인용을 비판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새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더욱더 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히2:2),10:28-31).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심판이 실제로 그들에게는 시작될 것이다(벧전4:17). 아모스 선지자는 그 메시지를 알았을 것이다(암3:2).
우리는 교회가 누리는 새언약이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시킨다는 생각('대체신학'으로 알려진 아주 일반적인 오류)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 새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을 위해 계획된 것이었다(렘31:31). 새언약 아래서도 이스라엘의 모든 죄는 지워질 수 있다(행3:19)"(p.70-71).
히브리서2:2와 10:28-31의 잘못된 언급을 비판하였으니, 이제는 벧전4:17을 보자.
실은, 벧전4:17을 언급하는 부분은 역자의 실수인 것 같다. 포슨의 영어원문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포슨이 주장하는 내용의 문맥으로 보아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미치지 않는 심판이 실제로 그들에게는 시작될 것이다'고 한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에게는 미치지 않는 심판이 실제로 그들(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시작될 것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포슨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이고, 그 내용 뒤에 벧전4:17을 언급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언약에 참예했던 사람들이 그것에 제외될 수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가 벧전4:17을 언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벧전4:17은 이렇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하나님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심판이 먼저 이르고 그리고 나서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이르게 되는데, 그 심판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하나님의 집에 임한 심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혹심할 것이다....는 것이다.
과연 이 벧전4:17이 포슨이 주장하는 대로, 새언약에 참예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새언약에서 제외되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가? 포슨의 논리는 이럴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하나님 집'에서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그 '하나님의 집'은 '새언약에 참예한 사람들"이라고 볼 때에, 새언약에 참예한 사람들에게도 심판이 임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포슨의 논리가 올바른 것일까? '하나님의 집'이 '새언약에 참예한 자들'을 말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구절의 "하나님의 집"은 구약적 경륜 하에 있는 이스라엘백성들, 곧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해석은 바로 베드로전서의 전체 문맥에서 지지된다. 베드로는 서신에서 분명하게 그의 편지를 받게 되는 수신자들을 밝히고 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이런 수신자에 대한 언급은, 2장10절의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자니라"는 말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곧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중에서 복음으로 거듭난 자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너희"들과 바로 베드로전서4장17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유대인인 베드로 자신과 동일시 되는 집단(사도단?)과 대비되는 그룹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베드로가 "만일 우리에게 먼저 (심판)하면"이라고 할 때의 그 '우리'는, 구약의 경륜 하에서 '하나님의 집"으로 여겨졌던 "유대인들"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새언약"에 참예한 자들이 결코 아닌 것이다! 곧 옛언약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임하고 나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는데, 그 심판이 더욱 클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가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알려졌던 선택받은 백성, 유대인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면,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심판이 얼마나 더 클 것인가! 베드로가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수신자들이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권면은 너무나 적실하다. 택하심을 입은 그들이지만, 그 택하심에 머물러 있도록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1:16-16). 이런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거듭남이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베드로가 바로 이 거룩함의 명령을 하고 있는 바로 그 구절 뒤에 거듭남의 성鳧?너무나 놀라운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거듭났다고 하는지 살펴보라. 썩을 것으로 거듭났는지, 썩지 않을 것으로 거듭났는지 베드로가 제시하고 있는 방식을 연구해 보라(1:18:25)!
함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이 엄숙하고 장엄한 진리를 훼손시킬 수 있단 말인가!
포슨이 아모스3장2절을 언급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자. 구약의 이스라엘백성, 그것도 북이스라엘백성이 모든 새언약에 참예했던 사람들이라는 그의 비성경적이고 무모한 전제에 대해서, 비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눈있는 자는 확인할 것이요, 귀있는 자는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체신학"에 대한 언급과 롐31:31을 구약백성에게만 적용시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다음 주쯤 틈나는 대로 다뤄보기로 하자.
첫댓글 포슨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도 얼마나 얼토당토않는 인용들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구절을 아무리 많이 인용해도, 이단적 주장을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은 것이 교계의 현실입니다. 주의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쁜일로 미루다가 오늘에야 전체를 한꺼번에 주~욱 읽어보았습니다. 덕분에 많은 공부가 될것같습니다. 그리고, 14개의 게시물을 1개의 한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교회와 사람에 대해서는 제가 잘모르니 논할것이 못되고, 구원에 대해 알파에서 오메가까지의 믿음의 여정에 대한 많은 주장들이 있음을 더욱 알게 되는군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칫 가라지일수 있다는 경계를 점검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리라는 은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윗글들이 다른사람에게만 적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구요..참다운 믿는이라하더라도 알파만 강조해서도 오메가만 강조해
안되겠다는 생각들 하게됩니다. 또한, 어느교단은 알파는 교리적으로는 인정은 하지만, 실행면에서 중요도를 낮게 책정하고, 많은 부분을 오메가로 가는 '경주'에 촛점을 모음으로 인수증가에 문제가 있어, 생명력의 부족함이 드러나고, 또 어떤교단은 알파를 너무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구원이후의 생활에 많은 문제가 드러나게 됨을 보게됩니다. 오늘 제 자신을 돌아볼때에 2가지 모두가 부족했음을 고백하게 되네요. 주님께서 나에게 매일의 알파가 되시기를 소망해봅니다.
저의 글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로님의 글과 마음에 공감하면서, 또한 저도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알파관점', 혹은 '오메가관점'이라는 용어 자체를 저는 그렇게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포슨이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의 복음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편의상 만든 용어입니다. 포슨의 용어입니다. 포슨의 비판을 비판하고 있는 저의 관점에서 그가 허구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만든 이런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바울이 전했던 복음조차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무 자주 '그럴 수 없느니라'는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견인교리가 비록 오해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도 또한
이 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부단히 '그럴 수 없느니라'고 외쳐야 하겠지만,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든 용어들을 차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이후에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알파관점, 오메가관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 있어서는 바울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 오직 하나뿐입니다.
알겠습니다. ^^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