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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이원록 시인 생가 원형 보존
개산양백 박 희 용
우리나라 근대시문학사에서 민족시인이란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시인이 3명이다. 근대문학이 개화한 이후 일제시대 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활동했지만 만해 한용운(충청도 홍성군. 1879~1944) ․ 육사 이원록(경상도 안동부 선성현. 1904~1944) ․ 윤동주(만주 북간도 명동촌. 1917~1945)의 세 이름은 해방 이후 70년 동안 해가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으며, 민족사가 계속되는 한에는 영예가 영원무궁할 것이다.
민족시인 세 분이 왜 소중한가. 그들이 지조를 통해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 간고한 노예의 삶을 살더라도 민족정신의 정체성만큼은 놓치지 말자는 민족문학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1930년 초부터 1945년까지 15년 동안 대부분의 문인들이 일제의 요구와 강압에 굴복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친일문학을 선전하는데 참여 또는 동원 되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민족문학을 꿋꿋하게 고수했다. 일제의 주구가 되어 호의호식한 친일문학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기득권을 누리며 승승장구한데 반하여, 이들 민족시인 3명은 1944년에 한용운이 일제의 억압에 눌린 심고로 사망하고 이육사가 북경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이듬해 1945년 2월에는 윤동주가 일본 구주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애국과 매국, 정의와 불의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해방 후에도 친일문학자들은 학원과 문단의 주류가 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커다란 추종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세 민족시인은 생전에 제자들을 양성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친일문학자들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외면당하여야만 했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친일문학자들과 그들의 문하생들은 해방이후부터 현재까지 문단의 기득권을 누리며 행세하고 있다. 그러므로 친일문학이 주류인 근대문학에 뿌리를 둔 현대문학이 근본부터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한 집단의 정신은 문학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친일문학을 이은 현대문학을 어찌 우리집단의 정신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문학정신의 맥은 세 분 민족시인에게 있다. 워낙 간고한 시대라서 충분히 예술성을 연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이 미학 면에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새로운 각도의 미적 안목에서 보면 무채색과 질박에서 더 깊은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유채색이 아름답지만 무채색도 아름답다. 화사함만 미가 아니라 간고한 시대를 핍진하게 표현하는 질박함도 미이다. 그들의 미학은 무채색의 아름다움과 질박의 강인함을 처연하게 나타낸다.
반대로 서정주, 정지용 등의 친일시인들의 시가 미학 면에서는 우수하더라도 그들의 시는 매국매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태생의 주인인 조선과 대한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굴복한 주인인 일제의 품안에서 쓰고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일본문학일 뿐이다. 더구나 1940년대 초에 일본어로 쓴 작품들은 더욱 조선문학이 될 수 없다. 조선문학이란 오직 조선 글로 씌어진 작품을 말한다. 진정으로 그들이 시를 아는 문학인이라면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시의 붓을 꺾어야 했다. 일체의 문학작품과 언론 등의 사회적 발표활동을 삼가하고 오직 호구를 위한 칩거를 선택했어야 했다. 그랬어야 문학 분야에서도 친일 청산이 확실하게 이루어져서 새 나라 새 문학이 움 틀 수 있었다. 엄동설한 속에서 고초를 겪는 조국과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고, 일제가 꾸민 가설무대 위에서 종이꽃 사꾸라가 펄펄 나리는 가운데 봄을 노래한 자들이 해방문단을 장악하여 재생산한 일본식 현대문학이 얼마나 이 땅의 정신을 왜곡, 오염시켜오고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무채색의 시대인데도 일제가 깔아 준 유채색의 멍석 위에서 한바탕 흐드러지게 논 친일문학자들은 그래서 꼭두각시인 것이다.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에게 무슨 생명이 있고 미가 있는가. 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또한, 현대문학이 조선문학의 맥을 올바르게 잇기 위해서는 친일문학자들의 문하생들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필요하다. 불의한 스승 밑에서 배운 문학은 불의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대학 신입생이 되어 자동으로 사제지간이 된 스승이 친일문학자들인 줄 모르고 배운 그들로서는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친일파에게서 문학을 배웠다는 것이 원죄인 것이다. 설혹 그런 관계였다 하더라도, 문학적 안목이 깊어져 친일문학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을 때에 과단성 있게 사제의 연을 끊었어야 했다. 근대사와 현대사에서 항상 양지쪽에 서 있는 자들의 제자들이 뿌리를 내려 증손, 고손 제자에까지 이르렀다. 조선조 때의 지배계층문학의 흐름이 친일문학론으로 이어지고, 후안무치하게도 현재는 보수문학론으로 행세하며 문학을 이용하고 있다.
일제시대는 무채색과 질박의 미 시대였다. 온 백성들이 생존의 절벽에서 절박했다. 생존이 최우선의 목표인 그 절박한 시대에 문학, 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채색의 화려한 군무가 나이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남자는 처절한 절규였다. 그 절규의 중심에 세분 민족시인이 꿋꿋하게 서 있었고, 그 중 한분이 안동 출신이다. 육사 이원록,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가. 이 땅의 문학사가 살아 숨 쉬는 한에는 길이 헌창해야 될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육사 시인의 위대함이야 누구나 말하지만, 진실로 그의 문학정신을 바로 인식하고 그의 시 세계를 바로 이해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의 가치를 내면화하여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쓰기보다는 그의 유명세를 이용하거나 등에 업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현상은 출생지인 안동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핵심적 실증을 그의 생가 관리 상태에서 볼 수 있다.
작가의 생가란 고향과 함께 문학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유명 작가들의 생가 관리에 만전을 기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전국 곳곳 유명작가들의 고향에 기념관을 지어놓고 고장 자랑꺼리와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그 중에서 작가가 태어나 자란 생가는 한 작가의 문학의 출발점으로 대접하여 관리를 정중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장 안동의 자랑인 이육사 시인의 생가는 방치되어 홀대받고 있다. 안동시청의 문화사업으로 이육사기념관이 십수 년 전에 고향인 도산면 원천리에 지어져 있고 이육사문학제, 이육사문학상 등의 행사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또한 지역 유지들이 이육사기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육사 생가는 관심 밖에 소외되어 있다. 기념관과 대외행사도 중요하지만 생가가 원형대로 잘 보전되는 것이 그 모든 외형적 행사들의 전제 조건이 된다. 즉 기념관과 행사들은 외피이고 생가 보전은 알맹이인 것이다. 외피가 아무리 화려해도 알맹이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면 이미 생명력이 쇠약해진 것이다.
아래에 제시될 몇 장의 사진과 설명에 앞서, 현재 이육사생가가 어떤 상태에 처해있는지를 주변에서 듣고 직접 본 것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생가는 도산면 원천리에 있다가 안동댐 건설로 1976년 안동시 태화동에 이전되었으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홑처마에 ‘一’자 집으로 안채는 맞배지붕이고 사랑채는 팔작지붕이다. 앞뒤로 ‘一’자형 집이 평행으로 배치되어 서로 똑같은 공간을 이룬다. 사랑채와 안채는 서로 지붕이 맞닿아 있을 정도인데, 이 사이에 대문간을 만들었다. 안채는 부엌, 방,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 3칸과 왼쪽에 부엌을 두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된 이집은 이육사 직계 후손이나 국가 소유가 아니라 서울에 사는 채모 여사의 소유라고 한다. 그러니 민속자료 등재는 경상북도에, 관리는 안동시청에서 하고 있으나 건물 소유주는 따로 있다는 말인데, 이런 문제가 있다보니 관리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일단 건물의 유지와 보수, 화재와 도난 방지, 전기와 수도 등의 건물 관리는 안동시청에서 맡아서 한다고 한다.
이전만 해놓고 빈집 상태로 수십 년간 방치된 상태가 되자, 부랑자들이 함부로 들어와서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잘 뿐만 아니라 불을 피우는 경우가 자주 있어 화재 위험이 증가되자 몇 년 전에 안동시청에서 월세를 놓아 사람이 거주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는 안채에 1년 사글세 80만원에 독거여인이 살고 사랑채에는 사글세 100만원에 역시 독거여인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채에 사는 사람은 방안에 무구와 부처, 연꽃, 태극기 등이 있고 밖에 ‘천명’이란 간판이 있는 걸로 봐서 무업에 종사하는 사람 같은데, 사글세도 안 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불명이 된지 2년이 되어간다고 한다. 사글세는 서울의 건물주에게 보내진다고 한다.
사글세를 놓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려다보니, 아궁이, 부엌, 문 등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사진에서 보듯 온갖 살림살이와 잡동사니가 너절하여 이 집이 도저히 민족시인의 생가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일년에 백여 명의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생가를 방문한다는 데, 낮 시간 내내 대문이 잠겨있어서 안채와 사랑채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 본다하여도 너절한 살림살이에 실망하고 개인들의 사생활 공간에 들어갔다는 부담감 때문에 이육사생가 방문에 환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이 돌아가서는 이육사생가 관리에 무책임한 안동시장 이하 공무원들을 얼마나 비방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육사의 고향인 안동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다. 또한 그들이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는 전공자들이기 때문에 안동의 문화인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안동의 시인들에 대하여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러나 다행이랄까, 대문이 잠겨있는 바람에 방문자들은 겉모습만 보고 돌아갔지 내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러한 치부를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것,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국고로 관리되고 있는 유명 작가의 생가는 국민들에게 공개되는 게 마땅하고, 이육사의 시정신을 현대에 의미 있게 되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적인 행사도 잘 해야 하겠지만 생가부터 말끔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동시청은 책임감을 갖고 이육사생가 관리와 보전에 노력해야 할 것이고, 안동시민들, 그 중에서도 시인들은 고장의 선배시인을 똑바로 모시겠다는 생각을 갖고 생가 원형 보존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더불어, 민족시인 이육사를 추모하는 시인이라면 지역과 소속을 불문하고 누구나 생가보존에 힘을 보태야 한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장기적 사업이다. 그러려면 생가 보존에 관심을 갖고 노력할 사람들의 모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동의 시인으로서, 특히 언덕 하나 너머에 사는 사람으로서 한 개비의 성냥이 되는 심정으로 가칭 ‘육사이원록시인생가보존회’, 약칭 ‘육생회’를 발족하고자 한다. 안동과 경상북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시인과 문학인들 가운데 뜻을 함께 할 사람들은 참여 의지를 모아 3월 중순 경에 안동에서 발족모임을 갖고자 한다. 헛된 명예나 이익을 탐하는 시인은 말고, 진정으로 이육사 문학을 사랑하고 그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여 의지를 이메일 p4092@chollian으로 보내주길 기대한다.
모임이 갖춰지면, 먼저 민속자료 제10호인 이육사생가에 대한 관리의 주체인 경상북도지사와 안동시장이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한 여론 환기와 청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청원의 목적은 생가의 원형 보전이다. 그러기 위해선 입주자들을 내보내고, 방, 아궁이, 부엌, 부엌문, 방문, 변소 등 원형이 크게 훼손된 부분들을 이전 때의 설계도에 따라 복원해야 한다. 또한 집안 곳곳에 누적된 잡동사니들을 말끔하게 청소해야 한다. 또한 화재 경보와 방지 시설을 갖추고 불필요한 전선과 시설 등을 철거해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대지와 건물에 대한 부동산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이다. 전술한 대로 서울의 채 여사가 소유권을 갖고 있으며, 도청과 시청에서는 도 지정 민속자료로 등재되었기 때문에 유지, 보수,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집주인이 원형을 훼손해가면서 사글세를 받는 것은 민속자료 지정에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1976년 이전할 때 기증 받든지 매입하든지 했어야지,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전하여 민속자료로 지정하고는 해마다 많은 돈을 관리비로 지출하는 데도 불구하고 원형이 훼손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현재처럼 애매한 상태가 계속되면 이육사생가로서의 가치와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인멸될 것이 분명하다. 원천 이육사기념관 뒤에 똑같은 모양의 생가를 지어놓았다고 하나, 태화동에 실재의 목재와 주춧돌, 처마돌을 옮겨와 복원한 생가가 있는 이상에는 그것은 짝퉁일 뿐이다. 소유권 문제와 임대 문제가 계속 해결되지 않는다면, 태화동 대지에 집을 지어주고 생가를 그곳에 옮겨 복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생가가 복원되어 정리를 마치면 관에서도 유지, 관리 등의 할 일이 있지만 육생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에게도 할 일이 많다. 무엇보다 민속자료 관리비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주기적인 방문을 통해 관리 상태 점검, 청소, 정리 등의 활동이 필요하다. 외형적인 사안이 정리되면 이육사 시문학과 독립투쟁에 대한 다양한 연구, 발표 활동 등을 현장인 생가에서 직접 가짐으로써 회원들과 일반 시민들의 교양을 향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육사 시정신을 잇는 시 창작실이 되어 우리 민족문학이 한층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고 낡은 안내표지판. 태화 오거리 에서 예천통로, KBS방송국 입구 위 골목 포도길, 예전에 포도밭이 많았다
육사 시 <청포도> 와 같은 이미지이다.
대문은 항상 개방되어 있으나 대문은 늘 닫혀있어서 앞마당까지 볼 수 있다.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되어 도와 안동시가 관리하고 있다. 보수 할 적마다 많은 돈이 든다고 한다. 문인협회와 문예진흥원에서 1995년에 기념표지비를 세웠다. 안동시에서 이육사박물관을 원천에 세우고, 관리는 안동문협에서 하고있다.
가장 통탄스러운 게 민족시인 이육사 생가가 무당집이 된 것이다. 시인이자 유학자이기도 했던 이육사의 생가에 잡귀들이 횡행하다니, 참으로 안 될 일이다. 이런 상태를 2년 째 방치하고 있는 안동시장 이하 공무원들의 무의식이 개탄스럽다. 하루 빨리 잡귀를 몰아내어 신성한 육사 시정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부처상, 탱화, 연꽃, 향, 그릇, 신상도 태극기 등이 있는 걸 보면 무속+불교 +민족종교의 잡탕인 듯 하다.
민족시인 육사 이원록의 생가가 어찌하여 이 꼴로 타락하였는가. 신선한 정기가 꽉 차 있어야할 생가에 어찌하여 잡귀들이 내뿜는 요기가 흐르고 낡은 살림살이와 잡동사니 내 뿜는 속기가 쌓였단 말인가. 아 아 이육사 시인이시여 불학무식한 이 속물들을 꾸짖어 주시옵소서!
살림 사는 사람이야 내보내면 되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생가의 원형이 훼손되고 있는 점이다. 원래의 장작 아궁이와 시골집 부엌문을 사글세를 주기 위해 연탄아궁이와 유리밀문으로 개조했다. 방과 부엌은 방주인이 부재 중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는데, 원형이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걱정이다.
대문에도 알림종이가 너절하게 붙어있다 안채 뒤에는 전에 살던 사람들이버린 잡동사니가 많다. 옆집과 담이
없다
생가 중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된 곳은 섬돌이다. 무보수 관리인의 말을 들으니 이 섬돌은 원래의 생가의 돌들을 고대로 옮겨와 그 모습대로 쌓았다고 한다. 안동댐 때문에 낙동강가 원천의 돌들이 안동시내 태화동에 이사왔다. 서까래에는 민족시인의 기상이 서렸다.
어린 이원록이 뛰어놀았던 앞마당 따뜻한 봄 햇살이 소복하다 겉보기엔 고풍이 살아 있어 민족시인의 생가다운 지붕과 담장.
민족시인의 생가가 산뜻하게 복원되어 이육사 시인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 시인의 뜻과 정기를 이어받기를
고대한다. 경상북도 + 안동시 + 문학인들 + 육생회의 노력으로 육사 이원록 시인의 생가가 본래의 모습을 찾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2013년 3월 1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