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씨공부, 나날이 비워내는 마음으로
- 금초 정광주
나는 전남 함평(咸平)의 진례라는 곳에 위치한 방우동(放牛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함평에서도 유명한 곡창지대로 넓은들이 우리 마을 앞으로 부채꼴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는데, 마을의 가장 뒤쪽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우리 집에서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들녘은 계절에 따라서 변모하는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마을앞 정자 건너의 저수지는 봄, 여름이면 이따금 찬란한 햇빛을 받아 거울처럼 번쩍거려 푸른 들판과 더불어 황홀한 정경을 자아냈고, 가을이면 살랑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황금 들녘이 멀리 굽이쳐 흐르는 영산강 줄기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한폭의 수채화 (水彩畵)였다.
나는 불혹(不惑)의 중년에 접어든 지금에도 그 풍경들을 가슴에 안고 산다. 좁은 생각에 누군가가 원망스럽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늘 그 고향의 넓은 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넓게 써야지 옹졸하면 모든 것이 잘아진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푼다. 초등학교는 그곳 시골에서 마치고 중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게 되어, 온 식구가 이사를 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몇몇 미술대회에 입상한 경험을 발판으로 미술 특기 장학생이라도 되려고 중학 입학을 하자마자 미술부에 등록하였다. 그때는 미술부원이 되면 4교시 이후는 그림만을 그렸는데, 켄트지 4절 크기로 풍경이 되든 인물, 정물이 되든 각각 다른 구도로 매일 4장씩 그려서 제출해야만 하교할 수 있었다.
만약 성의없이 적당히 그려냈다가 선배 미술부장 눈 밖에 나면 미술부원 활동이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년기의 미술부 활동이 힘들었지만 어린 시절의 그 활동이 나의 예술관이나 서예관 형성에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등학교를 입학하자마자 미술 선생님이 또 미술부를 권했으나 공부하여 대학도 가야겠고 가정 형편상 물감과 종이값 마련도 힘들어 미술부 활동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학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지도 않고 적성에 맞지도 않았는데, 대학과 학과 선택은 완전히 3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아버님의 합작품이었다. 미술대학 이나 국문학과 쪽이 마음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두 학과 모두 졸업 후 취업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영어교육과만을 적극 권유하는 선생님과 부친의 열화에 따른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은근히 걱정되는 것이 영어쪽이 아니고 오히려 한문쪽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 한 명을 부추겨 서예원에 다니기로 하였다. 처음엔 서예가 뭔지도 모르던 때라 덮어놓고 집과 가까운 서예원에 등록하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는데, 원장이신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선생님이 선비의 기질과 풍모로 뭇 서가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고 계시는 고명하신 분이란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유공권(柳公權)의 [현비탑(玄秘塔)]과 안노공(顔魯公)의 안근례비(顔勤禮碑)를 먼저 지도 하셨는데, 내가 기초를 마치고 나니 선생님께서 내겐 [안근례비]를 쓰도록 하셨다. 글씨를 모르던 때라 글자의 마모가 없이 판독이 용이하고 점획이 모지고 날카로우며 한눈에 장단대소(長短大小)가 뚜렷하여 산뜻하게 보이는 유공권 글씨가 나는 좋아 보였는데, 안근례비를 쓰도록 하시어 그 당시엔 내심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엄하신 선생님의 말씀이라 내색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쓰기만 했다. [현비탑]을 쓰지 않고 안노공(顔魯公)을 썼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가. 요즘 나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서체를 바꿀 때 생각 없이 이것 쓰겠다. 저것 쓰겠다고 고집할 때면 그때 나의 얘기를 꺼내곤 한다. 선생님은 한 서체를 시작하면 2. 3년은 써야 다른 서체로 바꿔주시는데, 내가 안근례비를 마치고 [예기비(禮器碑)]에 매료되어 있을 때 선생님께서 "이 글씨를 한번 써 봐, 광주에는 전서를 제대로 쓰는 사람이 없으니께 이것 많이 쓰면 좋은 글씨 쓸거여." 하시며 내게 책 한 권을 뽑아 주셨다.
그건 [산씨반명(散氏盤銘)]이었는데, 도통 생소하고 원시인같은 그 글씨를 다음날부터 그야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기 시작했다. 쓰고 있으면 잘못 썼다 하시고, 또 쓰고 있으면 잘못 썼다 하시니 힘겨운 게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문(金文)이 뭔지, 어떤 특성을 살려 써야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제멋대로인 나를 보다 못한 선생님께서 하루는 야단을 치셨다. "글씨를 그렇게 맘대로 쓰는 것이 아니여, 점은 점대로 획은 획대로 다 모양이 다른 것이고, 공간은 공간대로 다 변화를 주어서 써야 하는 법이여, 사람 모습이 다 다르고 성질이 다르듯이 다 다른 것이여, 그것 그렇게 쉽게 보면 좋은 글씨 못 쓴다."
[顔書]와 [禮器碑]를 쓰며 나름대로 정리된 서의 개념이, 금문을 쓰며 엄청나게 혼돈되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후 나는 [모공정명(毛公鼎銘)]과 그 외의 금문등도 함께 공부했는데, 서의 변화와 조화를 금문에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서를 구성하는 점과 획의 변화나 그 독특한 선질을 이루기 위한 붓과 먹의 오묘한 조화, 어리숙하면서도 소박하기 그지없고 꾸밈없으면서도 격조 높은 결구, 그리고 그 점획이 상호相生하며 호흡할 수 있도록 좁은 데는 좁은데로 넓은 데는 넓은대로 변화 무쌍하게 조성된 포백(布白), 그 외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선생님을 통하여 금문에서 배운 것들이라, 이 금문의 공부로 인하여 나는 지금도 서의 바탕, 즉 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갑골(甲骨)이나 금문(金文)등의 전서(篆書)에 두고 이해한다.
그 후 [석문송(石門頌)], [사신비(史晨碑)], [조전비(曹全碑)], [공주비(孔宙碑)], [장천비(張 遷碑)] 등의 예서를 공부하였고,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 [난정서(蘭亭敍)], [황산곡(黃山 谷)]등의 행서와 [장즉지(張卽之)], [정희하비(鄭羲下碑)], [장맹룡비(張猛龍碑)], 등석여(鄧 石如)등을 공부하였다.
모두가 선생님께서 선정하여 권하고 지도해 주신 것들이니 지금와 생각해 보면 선생님 은혜야말로 잊을 수가 없다.
83년은 내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해였다. 서예가로서 삶이 힘겹고 안정된 직업이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산다는 점과 우리의 것을 익히고 전수한다는 긍지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 하나로 4년간 몸담아 오던 고등학교 교사직을 과감히 사직한 것이다. 그때의 결단이 결과적으로는 크나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지만, 공부도 부족한 때에 남을 지도한다고 나섰으니 시행착오야 오죽하겠는가?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서예라는 것이 취탁동시가 되어야 닭이 되든 꿩이 되든 하는 것인데, 내 자신이 한참 공부해야 할 때에 알을 품고 앉은 꼴이었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되었을까!
지도란 아는 것 밖에 가르칠 수 없는 노릇이고 비록 아는 것이라 할 지라도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로 가르칠 수 없는 대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배움과 지도의 지난(至難)함 속에서 크나 큰 번민과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중 나의 의식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다 준 88년이 되었다. 동방연서회에서 주관하는 동방서예아카데미 제1기 수강생으로 등록, 여초 김응현 선생님의 강의와 지도를 받게 된 것 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새벽 5시에 기상하여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강의를 듣고 광주에 도착하면 새벽 한 두시일 때가 많았다.
힘겨운 1년이었지만 단 한번도 결석 없이 열심히 공부한 한 해였다. 서예에 입문한 후 나름대론 88년까지 16년 동안 탐구하고 연마한 서예에 대한 정보나 서예 본질에 대한 이해, 서예의 예술성과 정신성에 대한 것 등 제반 지식 등을 쌓았지만 이론적인 체계화는 여초 선생님의 가르침으로써 이 때부터 새롭게 체계화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내가 있게 된 것은 두 분 선생님의 가르침이 무엇보다 컸고, 서울을 오르내리는 버스 속에서의 수많은 시간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갖게 되었고, 내 주변의 많은 것들에 대한 생각들을 함으로써 남다른 철학과 서예관을 정립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항상 공부를 하며 서예에서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특히 나의 글씨 공부에서 좌우명처럼 여기는 두 가지 지표가 있다. 첫째는 "항상 자아성찰로써 의식을 바꿔야 하며, 자신의 인식으로 모든 것을 규정짓지 말라" 라는 여초 선생님으로부터의 가르침이며, 둘째는 변모와 발전은 오직 마음 공부로서만이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니, 쉼없이 마음 가꾸기와 마음 비우기로 기질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글씨를 새로운 기법과 표현의 체득으로 얻으려 한다면, 다소 변화는 가져올 수 있으나 큰 변혁은 어렵다고 본다. '書는 性情의 표현이요, 書如其人이라'고 볼 때 결국 마음 공부로서만이 변통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에서 숨막히도록 답답하고, 가로막힌 골목에 다다른 듯 예술 표현으로서 한계를 느낄 때, 높은 산에 올라 바다처럼 뻗어나간 시원스런 벌판을 한 번 쳐다보자. 어디가 막히고 한계가 있는가? 한계가 있다면 마음의 눈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글씨 쓰는 법이란 법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고, 마음 공부로써 그것을 느끼고 깨닫는 자만이 참으로 좋은 글씨를 쓰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과 글씨 공부의 실천 지표를, 매사를 쉽게 규정짓지 않고, 넓고 멀리 보는 마음 갖기로 삼는 것이다.
(三知軒 觀吾堂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