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은 '세시봉' 시절 자신의 신상에 대해 함구하거나 과장을 일삼아 이를 못마땅히 여긴 조영남에게 얻어맞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거칠 것 없는 자유인 송창식에게도 어두운 어린 시절이 있었으나 예술가로 방향을 전환하자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이 되었다.
경찰로 근무하던 부친이 여덟 살 때 세상을 뜬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모친은 돈 벌러 나가 소식이 없었고 어린 송창식은 조부모 밑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동네의 또래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해 홀로 지내던 그는 삼촌이 사준 하모니카에
마음을 뺏겨
음악에 입문하게 된다. 중2 때 영화 '토스카'를 보고 성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중3 때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에 오를 만큼 재능은 출중했다.
예고 성악과 수석 입학, 가세 기울어 방랑생활
세시봉서 통기타 치며 오페라 열창 청중 큰 반향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5년 예고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거기까지가 송창식의 한계였다. 이미 가세는 기울어 차비도 마련하기 힘들 정도였다. 인천의 집에서 서울까지 통학하기가 힘들어 아예
학교에 취사도구를 가져다 놓고 살았다. 전담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꼬이는 바람에 2학년 때 낙제를 하면서 집도 절도 없는 방랑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송창식은 인천 부근의 무위도에 무작정 찾아가 여름 내내 지내다 오곤 했다. 거기 놀러온
대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이때 대학생 중에서 출중한 기타실력을 보인 사람이 서유석이었다. 해태제과의 청부를 받아 친구들과 함께 도로변에 해태상을 세우는 일을 하다가 1967년 호남선을 타고 40일간
무전여행을 한 뒤 거지꼴로 서울에 돌아왔을 때가 그해 7월이었다. 홍대
미대로
진학한 친구를 따라 밥 먹고 같이 수업 듣고
교정에서 통기타를 치다보니 홍대의 명물이 되었고 자연히 홍대생으로 알려져 버렸다.
당시 홍대의
공예학부 2학년이던 이상벽이 '세시봉'에서 '대학생의 밤' 사회를 맡아 홍대의 명물 송창식을 '세시봉' 무대에 세웠다. 남루한 차림의 송창식이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는 놀랍게도(본인에게는 당연하지만) 오페라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음성으로 통기타를 치면서 오페라를 부르는 장면을 처음 목격한 청중들은 문화적 충격과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클래식 음악가로 충격적 데뷔를 한 송창식은 이번에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단아한 자세로
팝송을 부르는 윤형주를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때까지 배웠던 클래식은 격식에 갇힌 음악이었지만 그가 목격한 팝송이라는 대중음악은 자유로운 음악이었다. 자유인 송창식의 예술의지는 불이 붙었고, 1968년 2월 '트윈폴리오' 결성과 함께 송창식의 비상은 마침내 시작되었다.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