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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권 의열투쟁 Ⅰ - 1920년대 / 제3장 의열투쟁의 조직적 전개와 확산 / 3. 국내 기반 비밀결사들의 의열투쟁
3. 국내 기반 비밀결사들의 의열투쟁
3·1운동은 국내 비밀결사의 족출簇出이라는 현상도 수반하였다. 3·1운동 발발 이후 군 또는 면 단위로 소규모의 전위적 조직들이 전국 각처에서 급속으로 꾸려져서 만세시위 추진과 주도, 각종 선전물 인쇄 및 배포 등의 활동으로 만세운동의 대중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3·1운동 종식 후에도 1919년 후반기부터 국내 여러 곳에서 지역성이 농후한 지하조직 또는 비밀결사 형태의 독립운동조직들이 자생하기 시작했다.
이들 조직은 임시정부나 만주의 독립운동세력을 염두에 두고서 군자금 수취, 친일파 처단, 일제기관 파괴 등 의열적 성격이 강한 항일활동을 지향하고 적극 시도한 것이 앞 시기의 모습과 다른 점이었다. 특히 서북지방에서 그런 경향이 강하게 표출되었는데, 임시정부와의 교통로 요지인 만주 안동현과 인접해 있고 서간도의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도 비교적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 규모나 활동내용 면에서 특기할 만한 몇몇 비밀결사와 무장단체들의 경우를 들어 의열투쟁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한민회
1919년 10월 평양에서 기독교 장로교파 교회 집사인 박면하朴冕河와 신도 최원화崔元化가 북간도의 훈춘한민회琿春韓民會를 본떠서 같은 이름의 비밀결사 한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독립신문』 등 각종 선전물 배포, 밀정 및 불량 관공리 등 독립운동 방해자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이 발동될 시 관공리 및 친일 조선인을 암살하고 철도·전신·전화 및 관공서 건물, 공장 등을 파괴할 것을 활동 목표로 삼았다. 조직부서들도 그런 목표들과 상응하게 정하여서, 통신부·경고부·암살부·진멸부進滅部를 두었다. 독립군 국내진입작전에 대한 내응 공작의 하나로 의열투쟁을 위치시킨 것이다.
교회 교역자와 신도, 면서기·교사 등이 회원으로 규합되었는데, 그들은 1920년 9월 18일 평남 영원군 온화면溫和面 사무소를 습격하여, 현금 1천원을 탈취하고 민적부 등 중요서류를 불태워 없애버린 후 철수했다. 이어서 10월 16일에 덕천군 천도교구에 대하여 군자금 헌납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덕천경찰서에 즉시 탐지되어 조직이 발각되고 박면하 외 회원 9명이 체포되었다. 註62)
2. 숭의단과 공성단
1919년 11월,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숭의단崇義團이 결성되어 약 반년 동안 맹렬히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성천군은 3·1운동 때 천도교 조직의 주도로 3월 4일부터 시작된 만세시위가 4월까지 7차례나 연이어 벌어져서 연인원 5만 2천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망 36명, 부상 60명, 피체 535명 등 큰 희생이 난 곳으로 유명하였다. 註63)
이러한 배경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서간도의 류하현으로 건너가 있던 천성면天成面 출신 최병갑崔炳甲이 군자금 조달을 위해 귀향하여, 성천의 박돈수朴敦洙와 김홍록金洪錄, 이웃 순천군順川郡의 김영란金永蘭·주기정朱基鼎·윤홍수尹弘洙, 태천군泰川郡의 김병항金炳恒 등 감리교파 기독교 신자 및 농민 10여 명을 동지로 규합하고 비밀리에 조직한 것이 숭의단이었다. 최병갑 등 단원들은 단인團印을 새기고 영수증을 등사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해놓은 후, 군내 부호가를 방문하여 군자금 헌납을 권유하기로 하였다. 만일 응하지 않으면 민족반역자로 규정하여 처단키로 하였고, 이를 위해 신입단원 이창해李昌海가 권총 2정과 실탄 9발을 내놓았다.
1919년 12월 27일, 주기정과 김병항이 성천군 삼덕면三德面의 부호 정현조鄭鉉祚를 찾아가서 임시정부 특파원을 자처하고 군자금 헌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현조가 순순히 응하지 않고 경찰에 밀고해 버려서 두 단원이 체포되었다. 이에 정현조를 응징하기로 단 차원의 결정이 내려져서, 김영란·조기수趙基洙·한국언韓國彦·최태준崔泰俊이 1920년 1월 1일 정현조의 집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고, 그 가족들이 뛰쳐나와 도망치자 권총을 발사하였다. 註64)군내 부호들의 각성을 간접적으로 촉구한 셈이었다. 그 후 1월 5일 삼덕면 김덕팔金德八의 집을 방문하여 헌납 약속을 받은 뒤 300원을 수령하는 등 2월까지 모두 1,600여 원의 군자금을 거두었고, 이것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도록 박돈수를 상해로 보냈다.
정현조 집 방화사건으로 인한 일경의 추적이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숭의단원들은 활동을 계속하였다. 3월에는 천성면의 석봉름石峯廩으로부터 400원, 최병황崔炳璜으로부터 150원, 삼덕면의 최치민崔致珉으로부터 2회에 걸쳐 510원, 4월에는 천성면의 홍치재洪致載로부터 2회에 걸쳐 16,566원을, 5월에는 쌍룡면雙龍面의 이진수李珍秀와 조대술趙大述의 집을 방문하여 28원을 수합하였다. 註65)
그러던 중 5월 16일에 박돈수가 평양에서 피체되었는데, 이를 필두로 5월 29일에 김영란과 최태준이 성천군 사가면四佳面의 은신처에서 총격전 끝에 경찰대에 피체되고, 6월 11일 순천군 신창면新倉面 장봉오張鳳五의 집을 찾아간 여러 명의 단원들이 잠복 중이던 경찰대에 피체되고 말았다. 김영란은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선고되어, 1920년 7월 12일 평양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고, 최태준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註66)김영란과 박돈수는 공성단共成團의 단원이었다고도 하는데, 이 단체 역시 군자금 수합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평남 개천价川에서 재만 독립단원 현기정玄基正의 주도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3. 천마산대
1919년 12월에서 1920년 3월 사이에 평안북도 의주·삭주·구성 3군의 경계를 이루는 험준고산인 천마산에서 의주군 출신인 최시흥崔時興의 주도로 30여 명 규모의 무장조직이 건립되었다. 조직 명칭은 그 근거지로부터 유래하여 천마산대天摩山隊로 불리우게 되었다. 창도자 최시흥은 의주군 고령삭면古寧朔面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하얼빈에서 노농병勞農兵에 참가하였다가 부대가 해산되자 1919년 12월에 귀국하여 최지풍崔志豊과 함께 동지를 규합하고 천마산대를 조직하여 총대장 격인 사령장司令長이 되었다. 註67)
1920년 3월경부터 활동을 개시한 천마산대는 군자금 수합, 의주·삭주·구성·창성군 일대의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습격 파괴, 악질 순사 및 친일분자 응징처단 활동을 유격전 방식으로 맹렬히 전개하여, 서북지방 의열투쟁의 드높은 기세를 대변하였다. 註68)악질 한인순사 및 친일분자 등 일제주구 응징의 대표적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본다면, 1920년 3월 15일 저녁 7시경, 의주경찰서 순사 김명익金明翼이 의주읍 서부동 자택에서 총격 사살되고 그 처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註69)헌병보조원 출신인 김명익은 의주우편국에 근무하는 동생 김경륜金敬崙의 조력으로 우편물을 몰래 조사하여 독립군의 비밀문서를 찾아내어 많은 지사가 검거되도록 하고 독립군의 본가를 찾아가 그 가족을 핍박하기를 일삼은 자였다. 이 응징거사의 주체가 3명의 대한독립단 결사대원이었다고 적어놓은 문헌이 註70) 있기는 하나, 시점과 지점을 놓고보면 천마산대의 초기 의거 중 하나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동년 6월 10일, 평북 창성군 대창면大倉面 사무소에 천마산대 대원 3명이 내습하여 면장 강창헌姜昌憲을 사살하였다. 註71) 강창헌이 삭주경찰서 순사인 생질甥姪 강화희姜化熙에게 독립군의 행동을 일일이 밀고하여 천마산대 대원들도 체포되게끔 만든데 대한 응징거사였다. 7월 3일에도 대원들의 행동을 정탐하여 일경에 밀고해 온 의주군 고령삭면의 홍응렴洪應濂 부자父子를 처단하였고, 닷새 후인 7월 8일에는 최시흥 외 김치현金致賢·김상옥金尙玉·허기호許基浩 등이 의주군 월화면月華面 화하동化下洞으로 가서 독립운동 방해자인 친일유지 최학정崔學貞을 처살하였다. 註72)
이와 같은 일제주구 응징 활동 외에도 천마산대는 1920년 3월부터 8월까지 평북도내 전역에 걸쳐 면사무소 9개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방화하거나 공문서를 소각하고 공금을 탈취하는 등으로 일제 관공서 파괴 활동을 벌였고, 동년 6월부터 9월까지 사이에 평북도내 5개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 3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1920년 8월 대한광복군사령부가 설립되었을 때 최시흥은 제4영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곧 천마산대가 광복군사령부 휘하의 제4영으로 편입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그가 1919년 음력 10월경 서간도의 관전현으로 건너가서 광복단에 입단하여 ‘두목’의 지위로 있었다는 공판기록이 무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대한독립단 - 광복단 - 광복군사령부로 이어져 간 조직계보와 최시흥의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복군사령부가 실체 없는 편제상의 기관처럼 유명무실해진 때문인지 1920년 겨울에 천마산대는 ‘대한광복군총영 천마별영天摩別營’으로 이름을 바꾸어 무기를 공급받으며 계속 활동하였다.
천마산대의 활동이 치열했고 비교적 오래 지속된 만큼이나 희생도 많이 뒤따랐다. 예컨대 1920년 7월 8일 최학정 처살거사에 참여했던 제3소대원 김효준金孝俊·이정서李貞瑞·이한익李漢翼 등 8명이 그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고, 1921년 4월 14일의 공소심 판결에서 사형 3명, 무기징역 1명, 징역 13년 4명 등으로 전원 중형을 선고받았다. 註73)
최시흥은 1922년 겨울, 군자금 4천원을 갖고서 만주로 가던 도중 봉천성 임강현臨江縣에서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는데, 신의주경찰서 경부 이성근李聖根, 순사부장 김덕기金悳基 등의 간계에 의해 봉천감옥에서 석방되는 즉시 옥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경에 다시 체포되었다. 법정에서도 재판관을 준엄히 질타하는 등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최시흥은 결국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5년 3월 12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註74) 임시정부에서도 그의 순국을 크게 슬퍼하여 『독립신문』에 註75) 추도문을 실었으니, 담아潭兒의 「도최장군悼崔將軍」이 그것이다.
4. 보합단과 무장계획단
천마산대가 활동을 개시했던 시점인 1920년 3월초에 평북 의주군 월화면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인 김유신金攸信, 이명 金東植·백운기白雲起 등이 비밀결사 대조선청년결사대大朝鮮靑年決死隊를 결성하였다. 대한독립단과 연계되어 있던 이 지하조직은 처음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에 주력했는데, 5월 하순에 9연발 자동권총 6정 등 최신식 총기를 획득한 것을 계기로 조직 확대를 기하면서 대조선독립보합단大朝鮮獨立普合團으로 개칭하고 무장활동에 돌입하였다. 註76)
단원수 50명 정도이던 보합단의 활동은 의주·선천·용천·철산 등 도내 각지를 무대로 한 군자금 획득에 집중되었고, 친일주구배 처단과 일제기관 습격 파괴가 거기에 부수되었다. 1920년 3월부터 1921년 1월 말까지 총 41회의 모금 및 수취활동에 의해 1만1천8백원의 현금과 1만4천원의 어음을 군자금으로 거둬들였고,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거나 시위용 폭탄을 만들어 다시 군자금 획득활동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컨대, 1920년 11월 초에 용천군 외사면外士面 평안동平安洞에서 박초식朴初植과 조원세趙元世 등이 베 조각으로 화약을 싼 둥근 폭탄 11개를 만들어, 그중 8개는 이광세李光世의 집에 숨겨두고, 3개는 군자금 모금활동용으로 단원들이 항시 휴대하였다.
1920년 9월 26일, 선천군 산면山面으로 본거지 이동 중이던 백운기·김동식 등은 철산군 서림면西林面 일신동에서 사복 차림으로 순찰 중이던 양책良策 주재소 순사 송용범宋龍範을 불러세워 신분을 확인하고 권총을 쏘아 즉사시켰다. 註77) 이틀 후인 9월 28일 심야에는 월화면장 주봉중周鳳中의 집을 습격하여 미제 엽총 1정과 탄환 13발을 빼앗았다. 다시 그 하루 뒤인 9월 29일에는 의주군 비현면枇峴面에서 친일파 장모張某를 처단하였고, 전 순사로서 보합단원을 밀고했던 문치무文治武의 집을 습격하여 사형선고장을 낭독하고 척살刺殺하였다. 註78) 또한 같은 날, 백운기 등 대원 20여 명이 철산군 참면站面의 도참사道參事 오기원吳基源의 집을 습격하여 엽총 1정을 탈취하였다. 註79)
이에 철산경찰서 수색대가 추격해 와서 10월 2일 선천군 산면 신풍동新豊洞 산속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백운기 피체, 단원 3명 피살이라는 결과가 빚어졌다. 이 사건으로 조직이 드러나서 일제의 압박을 심하게 받게 되자 보합단은 압록강 너머 관전현으로 본거지를 옮겨갔고, 단원들도 대한독립단·광복군총영 등에 합류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註80)
보합단의 국내잔류 단원들은 1920년 11월에 서울의 무장계획단武裝計劃團과 제휴하여 활동하기로 약정하였다. 무장계획단은 항일청년 10만~20만명을 무장시킬 수 있을 군자금 획득의 포부 아래 9월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그 지도자인 이종영李鍾榮은 임시정부 국내특파원 장선욱張善郁의 부탁을 받고, 서울 운니동雲尼洞의 부호 변석연邊錫淵으로부터 3만원의 군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11월 5일에 가택방문했는데, 현금이 없다 하여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이종영과 차련관 주재 장선욱 사이의 연락원이던 조상백曺相伯으로부터 전해들은 보합단 간부 김도원金道源, 이명 金仁俊은 권총 3정과 탄환 200발을 휴대하고 이광세·장정용張廷鏞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리고는 이종영을 만나서 양단의 연합활동을 제의하였고, 그러기로 약정이 되었다. 이때 이종영은 부호 개인보다는 한성은행·한일은행 등 금융기관을 습격해서 단번에 거액의 운동자금을 획득·조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후 11월 28일에도 변석연의 집을 방문했으나 허탕을 친 김도원이 이종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간 12월 4일, 그 아들 변덕영邊德榮의 간계와 밀고에 의해 잠복 중이던 종로경찰서 형사대가 김도원을 기습하였다. 그는 즉각 응사하여 형사 이정선李廷善을 사살하고 근등무례近藤茂禮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나, 자신도 총상을 입고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서 일경의 대대적인 수사와 검거가 시작되어, 보합단원과 무장계획단원 22명이 체포되고 두 조직은 파괴되어버렸다.
피체된 단원들은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 기피신청까지 하는 등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운니동사건’의 주역인 김도원도 시종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며 판사를 힐난하고 항소하는 등 법정투쟁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결국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김도원은 1923년 4월 6일 장문의 유언장을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보다 1년 앞서 1922년 2월 2일에는 김내찬金迺贊·심창숙沈昌淑·김형석金亨碩·김흥도金興道 등 4명 단원이 평양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고, 나머지 단원들도 거의 모두 중형을 선고받았다. 註81)
5. 게릴라식 의열투쟁 기세의 확산과 고조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되었던 1920년 봄부터 가을까지 사이에 서북지방 곳곳에서 무장대의 관공서 습격 및 파괴·방화와 악질적 한인 관공리·순사 및 친일유지 암살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사건마다의 행동 주체를 정확히 가려내거나 판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게릴라식 의열투쟁 기세의 확산과 고조 분위기를 더욱 잘 드러내보여주는 것일 수 있었다. 앞서 여러 단체들의 활동사례로 들어졌던 것들은 제외하고, 자료에서 뽑히는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920년이하 같음 3월 20일, 평북 의주군 고관면 동상동의 전 신의주경찰서 형사 홍세헌洪世憲의 집에 무장대 2명이 들이닥쳐 권총으로 저격하여 중상을 입힘. 註82)
② 5월 7일, 평북 의주군 고관면 서하동의 친일부호 백성식白成植을 무장대 3명이 총살함. 註83)
③ 6월 4일, 평북 삭주군 구곡면 신안동의 경찰관주재소를 호굴독립단원 8,9명이 습격하여 순사 홍명근洪明根을 살해하려다 실패하고 그 대신 순사 오태봉吳泰鳳을 사살함. 註84)
④ 6월 8일, 평북 벽동경찰서 삼서주재소의 악질 순사 문치조文治朝가 소속 미상의 무장대에 의해 거소에서 사살됨. 註85)
⑤ 6월 25일, 평북 벽동군 학회면 학하리의 경찰관주재소에 무장대 여러 명이 내습하여 일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방화하여 전소시킴. 註86)
⑥ 7월 3일, 의주군 고령삭면 대하동의 오정련吳王漣이 무장대 6명에 의해 총살됨. 註87)
⑦ 7월 29일, 평북 삭주군 외남면사무소를 신원불명 무장대 2명이 습격하여 서류와 비품들을 소각한 후, 만석동 구장 최지현崔之鉉을 찾아가 사살함. 註88)
⑧ 8월 15일, 황해도 은율군에서 군수 최병혁崔丙赫과 부호 고학윤高學倫이 구월산대九月山隊 대원 10명에 의해 거소에서 사살됨. 註89)
⑨ 9월 1일 새벽, 국내 밀파된 서로군정서 암살단원 이창덕李昌德·이종식李宗植 등 7명이 악질적 친일분자요 독립운동 방해자인 평북 후창군수厚昌郡守 계응규桂膺奎의 관사를 습격하여 사살해 버림. 註90) 그후 이창덕이 일제 주구 김성진金成辰의 밀고로 강계경찰서에 체포되자 註91) 이항봉李恒鳳·송문하宋文河 등 다른 단원 5명이 1920년 10월 3일 김성진을 찾아가 사살 응징함. 註92)
⑩ 9월 10일, 평북 의주군 옥상면장 김인서金麟書와 옥상면 상목동의 악명 높은 친일분자 이준형李俊炯이 무장대 4명에 의해 총살됨. 註93)
⑪ 9월 16일, 평북 선천군 산면 용경동의 김낙범金洛範이 군자금 제공에 불응한 까닭으로 피살됨. 註94)
이처럼 격렬한 모습으로 연속 전개된 게릴라식 의열투쟁으로 서북지방의 일제 통치기관은 치명타를 입었고, 친일협력자들의 행동은 크게 위축·제어되었다. 1920년 봄부터 여름까지 평북 일원에서는 관공리와 친일분자들이 경찰의 보호 없이는 바깥출입을 할 엄두를 못내었다. 여러 군에서 면장과 면서기가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아, 선천·의주·구성군 등지에서는 면사무소 업무가 일시 중단되었다. 조선인 형사들 중에서도 사직자가 연달아 나오고, 부호들이 다른 도道로 이사가는 일이 속출했다. 註95)
1920년의 평안도지방 의열투쟁의 열기는 함경도로도 일부 파급되었다. 예컨대, 1921년 2월 4일 함경북도 갑산군 운흥면에서 관내 순시 중이던 군청 서무주임과 면장, 면서기가 3명의 무장대에 피습당해 면장이 즉사하고 군서기가 부상 당한 사건이 있었다. 註96)
6. 임시정부 연계 조직들의 의열투쟁 시도와 좌절
1)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
광복군총영의 기획과 의용단의 협력에 의해 합작 실행된 폭탄거사들이 1920년 여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기하여 벌인 의열투쟁의 한 갈래였다면, 대한광복회 계열 운동자들이 옛 계보를 되살려 조직과 무기와 인원을 서로 보태고 합하면서 추진한 거사계획이 다른 한 갈래를 이루었다. 후자의 거사계획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이는 한훈韓焄과 김상옥金相玉이었다. 註97)
본명이 한우석韓禹錫인 한훈은 1890년 충남 청양靑陽 출신으로 일찍이 10대 때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여하여 초모장招募長으로 활약했고, 1913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 조직자의 일원이었으며, 1910년대 후반에는 대한광복회의 주축 회원으로서 전라도 지방의 친일부호 처단 및 헌병분견대 습격 등의 활동을 주도한 바 있었다. 1918년의 대검거를 피해 만주로 탈출한 그는 3·1운동 발발 후 귀국하여 대한광복회의 재건을 구상하고, 상해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와 연계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이동휘·이시영·신익희申翼熙 등 정부 요인들로부터 지원 약속을 받은 그는 1920년 3월 초에 권총 40정, 탄환 3천발, 폭탄 10개를 제공받아 휴대하고 귀국하였다. 그리고는 우재룡禹在龍·박문용朴文鎔·김병순金炳淳, 고등계 형사 출신인데 한훈에게 포섭된 인물 등과 함께 조선총독·정무총감·이완용·송병준과 조선인 악질형사 등을 암살 처단할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고 동지 획득에 나섰다. 조직명은 광복단 계보를 되살려 잇는다는 의미로 광복단光復團결사대決死隊라 이름지었다. 註98)
이무렵 1920년 5월에 한훈의 광복단 시절 동지였던 김상옥도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일명 길림군정서에서 밀파되어 온 김동순金東淳과 손을 잡고 협의하여 암살단暗殺團을 조직하였다. 김동순은 1919년 12월, 군정서 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특명을 받고 서울로 들어와서 동지를 구하다 소개 받아 이듬해 1월경 김상옥을 알게 되었다. 김동순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만주의 독립군 조직들은 1년 동안 준비하여 1921년 정월경에 국경을 돌파하는 게릴라전을 개시하여 국경 일대를 점령 혹은 파괴하는 한편 동해 연안을 항행하는 외국 선박들을 파괴하여 국제문제를 유발하고 독립군을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로 승인하도록 할 계획인 바, 작전이 개시되면 국내에서도 크게 호응하여 일제 기관과 군경을 격파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전공작차 북로군정서에서 김동순을 들여보낸 것이다. 註99)
김동순과 김상옥은 곧 의기투합하여 협력하기 시작했고, 김동순은 본부로 귀임했다가 1920년 4월에 재입국하면서 사격 교관으로 장일진張一鎭을 대동하고 8연발 권총 3정과 탄환 300발도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암살단을 조직한 것인데, 김상옥이 총지휘자 겸 연락책임자가 되고, 무기공급책 김동순, 재정책 윤익중尹益重, 비밀문서책 신화수申華秀·최석기崔錫基, 집총대장 서대순徐大順 등으로 정해졌고, 정설교鄭卨敎·전우진全宇鎭·이혜수李惠受 등 1919년 『혁신공보』 비밀발간 시절 김상옥의 동지 여러 명이 단원으로 참여하였다.
북한산 골짜기에서 수차 사격훈련을 받는 등 필요한 준비를 해가면서 대거 행동할 기회를 고대하고 있던 김상옥과 그의 동지들은 미국 의원단 내한 소식을 접하고서, 총독 이하 일인 고관들을 격살하고 친일주구 및 한인 고등계 형사들을 소탕할 절호의 기회라 판단하였다. 그래서 6월경부터 암살단은 행동 준비에 돌입하고 북로군정서에 무기 공급을 요청하였다.
8월 10일경 김상옥은 유세관柳世觀의 소개로 한훈을 만나게 되었는데, 활동목적 및 행동방침과 당면한 거사계획까지도 거의 똑같은 조직을 비슷한 시점에 각기 따로 만들어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광복단 결사대는 아직 조직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여서 인적 구성이 약했고, 암살단은 무기가 거의 없는 실정인 것이 서로 보강되어야 할 점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두 조직이 한 조직처럼 힘과 자원을 합쳐서 같이 움직이기로 약정하였다. 그리고 주밀한 거사계획을 세워서 준비작업을 진행시켰다. 거사계획의 대요는 다음과 같이 매우 대담한 것이었다. 註100)
첫째, 8월 24일 아침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역에 도착하여 역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 미리 준비해 둔 취지서·통고문·경고문 등을 일제히 뿌리고, 환영 군중 속에서 동지들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시위를 격발시킨다.
둘째, 8월 25일 미국 의원단 일행이 서울을 떠나면서 남대문을 지날 때 미국기와 태극기로 열렬히 환송토록 하고, 실제의 거사는 종로에서 감행한다. 자동차 3대를 미리 확보해서 2대에는 사격 설비를 장치해놓고 1대에는 폭탄과 탄약을 실어서 길가 2층집 밑에 대기시켜 두었다가, 총독 이하 고관들을 사격대가 저격하여 암살하고, 경찰 경비대가 출동하면 사격대가 맞서서 교전하는 사이에 폭탄대가 관공서 및 경찰서를 폭파한다.
이러한 계획하에 무기는 한훈이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시켜 둔 것을 쓰기로 하고, 필요한 자금은 김상옥이 박영효朴泳孝를 찾아가서 취지를 설명하고 3천원을, 변호사 박승빈朴勝彬에게는 권총시위를 하여 1천원을 받아서 조달했다. 거사 때 뿌릴 취지서, 중추원 참의 및 한인 고등관들 대상의 통고문, 한인 고등계 형사들 대상의 경고문은 신화수가 원고를 정리하고 김화룡金華龍과 조만식趙萬植이 주선하여 운니동雲泥洞의 인쇄업자 김교석金敎奭과 박한주朴翰柱가 경기도 광주廣州의 산속 이재인李載仁의 집에서 3천매씩 인쇄해놓았다. 시위용 태극기와 미국기 각 100매, 변장용 경시복警視服 4벌은 한훈이 만들어놓았다.
그런데 거사예정일 하루 전인 8월 23일 오전에 경찰 당국이 약 1천 명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예비검속을 개시하였다. 『혁신공보』 사건으로 요시찰인이 되고 있던 김상옥도 우선검속 대상이 되었는데, 김상옥이 급히 피신하자 경찰은 그의 집을 급거 수색하였다. 숨겨두었던 인쇄물, 암살단 조직표 및 명부, 사진류가 모두 발각·압수되었고, 두 조직의 대원·단원 24명이 경찰의 잠복 또는 급습에 의해 연이어 체포되었다. 註101)한훈은 8월 23일 무기 전달차 김상옥의 집을 방문했다가, 김동순은 9월 8일 부호 이모李某로부터 군자금을 전달받기로 한 종묘宗廟에서 각각 잠복해있던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피체 당시 한훈은 권총 3정과 탄환 300발을 소지하고 있다가 압수당했는데, 그것의 구득 경위를 7월 7일음력인 듯안동현으로 가서 임시정부 요원인 최우영崔宇榮을 만나 건네받은 것처럼 진술한 듯하다. 註102) 그러나 이는 3월 귀국시의 다량의 무기반입 및 은닉보관 사실을 감추기 위한 허위진술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군산群山의 김병순, 대전의 윤희병尹希炳, 서울 낙원동의 안소사安召史, 서울역 운송점 등에 분산은닉 혹은 위탁보관되고 있었는데 다행히 발각되지 않은 폭탄과 권총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상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강행하려 한 김상옥의 지시에 의해 8월 24일 아침 서대순·이운기李雲起 등 집총대원들이 서울역에 나가 대기했는데, 미국 의원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상옥의 가택 수색 결과 때문이었는지, 전날 밤 예정되었던 봉천 출발이 돌연 취소·연기된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 의원단 내한을 계기로 한 서울거사의 준비는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채 실행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재판은 연일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반향이 컸다. 대한광복회 계열 인사들이 지하에서 계속 활동해 왔음도 확인되어 화제가 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김동순은 10년, 한훈은 8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가 대한광복회 활동 때 벌교筏橋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한 것이 드러나서 5년형이 추가되어 긴 옥고를 겪었다.
2) 기타 조직들
보합단이 창립되었던 때인 1920년 5월 평북 구성龜城에서는 대한민족자결국민회大韓民族自決國民會가 조직되어, 연통제 조직인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와 기맥 상통으로 경찰관습격대 및 암살단 보호·원조, 총기 소재 및 친일자 조사 등의 목적 아래 활동을 개시하였다. 註103) 평남 진남포鎭南浦에서도 5월경에 ‘임시정부 운동기관’ 성격을 띤 국민회國民會가 결성되어, “군자금 수합과 관공리 살해, 관청 파괴 등의 무력투쟁으로 독립 관철에 노력키로 한다”는 방침의 실행에 나섰다. 註104)
이해 6월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임시정부의 황해도 교통국 통신원 중심의 비밀결사인 독립청년단獨立靑年團, 별칭 獨立團決死隊이 손재흥孫在興의 주도로 설립되었다. 註105) 이 조직의 활동 목적은 임시정부 군대의 국내진입시 일본군과 교전하며 길 안내를 할 것, 사직 권고에 불응하는 관공리를 처단할 것 등이었다.
임시정부의 연통제 또는 교통국 조직과 은밀히 연계되어 있거나 기맥을 통하여 성립한 의열 성향 비밀조직들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였다. 활동 개시 후 얼마 못가서 일경의 정보망에 포착되고 검거망이 가동되어 조직이 파괴되어버린 것이다. 진남포 국민회가 1920년 7월에, 대한민족자결국민회는 9월에, 그리고 사리원 청년독립단이 11월에 각각 그렇게 되었다.
7. 자발적 주민결사체들의 폭탄의거 기도 및 실행
1920년 3월 초에 총독 및 정무총감 암살을 꾀하는 천도교도들의 결사대가 경남 고성군固城郡 구만면九萬面 화림리華林里 산중에서 결성되었다. 황태익黃泰益, 50세·강재순姜在純, 32세·임태준林台俊, 25세 등 8명의 대원은 3·1독립선언서의 취지대로 민족 전원이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결사 투쟁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는 신념으로 수차 회합하여 서약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경남 일대의 여러 군郡과 서울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조달하였다.
재등실 총독이 4월에 경남지방을 순시하면서 진주晉州도 들를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원들은 이 기회에 그를 요격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총독의 진주 방문 당일의 시내 경비가 너무 엄중하여 거사를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항 축항築港 낙성식에 정무총감 이하 총독부 고관들이 대거 참석한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지자, 대원들은 고관암살을 계획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번 역시 경비가 엄중하여 거사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행적들이 결국 일경의 첩보망에 포착되어서, 5월에 대원 전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조직에 사후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경남결사대’였다. 註106)
1920년 7월에는 경북 대구에서 양한위梁韓緯와 권태일權泰鎰이 한국독립 촉진 방법으로 한인 관공리 습격을 밀의하고 폭탄 입수 또는 제조를 획책하다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註107)
1920년 9월 18일 밤 9시 30분, 평안남도 강동경찰서 청사에 폭탄이 투척되어 유리창 일부가 부서지고 일경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이 현상금 3천원을 걸고 수사망을 편 결과, 강동군 관내의 20세 이상 30세 미만 농민과 광부들로만 조직된 비밀결사 농민당農民黨의 거사였음이 밝혀졌다. 그해 8월, 군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에 전달하자는 이환욱李桓旭의 제의에 동의한 청년층 주민들이 그 실행기관으로 조직한 것이 농민당이었다.
군자금 모집을 용이하게 하려면 경찰관서에 폭탄을 던져 민심을 격동시키고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할 것이라는 이근배李根培와 이석돈李錫敦의 주장에 당원 모두가 동의하여, 먼저 강동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나서 원탄元灘·고천高泉 두 주재소를 투탄 공격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이에 따라 원탄면 송오리松塢里 탄광의 광부 최인택崔仁澤이 작업 중 채집한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을 이근배와 이환욱이 건네받아 원통형 폭탄 1개를 제조했고, 폭탄 투척은 금융조합 사환인 이치모李致模가 맡아서 실행하였다.
그후 이근배 등 단원들은 9월 30일 밤에 원탄면 삼청리의 이관식李寬植, 10월 9일에 원탄면 흑룡리의 서상목徐相穆을 찾아가 임시정부 특파원을 자칭하며 군자금 기부를 요구하여 200여 원의 현금을 수취하였다. 그러나 10월 12일, 평양경찰서 형사들에게 단원 11명이 피검되었고, 이치모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註108)
1920년 10월 하순에 평남 안주에서도 모종의 거사를 위해 폭탄을 만들어둔 사실이 발각되어 강구연康龜年과 서광헌徐光憲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평양과 강동에서 발생한 폭탄거사에 자극받아 안주경찰서와 읍내의 특정 부호가에 투척할 생각으로 연통·철선·성냥·유황·초석·목탄·면실 등 각종 재료를 조합한 원통형 폭탄을 직접 제조하여, 안주청년회 운동장에서 시험폭발까지 해본 후 투탄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註109)
[註 62]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36~537쪽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470~472쪽. ☞
[註 63]이윤상, 「평안도 지방의 3·1운동」, 『3·1민족해방운동 연구』, 청년사, 1989 참조. ☞
[註 64]『동아일보』 1921년 11월 12일 「동지의 報讐로 방화」. ☞
[註 6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88~90쪽 참조. ☞
[註 6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300~301쪽. ☞
[註 67]『독립신문』 제158호 1923년 3월 14일 「천마대 약력」. ☞
[註 68]박걸순, 「1920년대초 국내 무장투쟁단체의 활동과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287~292쪽 참조. ☞
[註 69]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19쪽. ☞
[註 70]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56쪽. 피살자가 ‘金明沃’ 순사로 되어 있다. ☞
[註 71]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60쪽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65쪽. ☞
[註 72]『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 「천마대장 공판」. ☞
[註 73]『독립신문』 1921년 5월 7일 「판결사건 一束」 ; 『동아일보』 1921년 4월 20일 「평북지방을 소란케 한 대한독립단의 공소판결」. ☞
[註 74]박걸순, 「1920년대초 국내 무장투쟁단체의 활동과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301쪽. ☞
[註 75]『독립신문』 1925년 3월 23일자. ☞
[註 76]박걸순, 「1920년대초 국내 무장투쟁단체의 활동과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302~303쪽 ☞
[註 77]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07~508쪽. ☞
[註 78]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29~530쪽. ☞
[註 7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18~119쪽. ☞
[註 80]박걸순, 「1920년대초 국내 무장투쟁단체의 활동과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309~311쪽. ☞
[註 8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 780~786쪽 ; 『동아일보』 1921년 11월 26일 「변석연가를 침입한 일」 ; 박걸순, 「1920년대초 국내 무장투쟁단체의 활동과 추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308·312쪽 ; 김주용, 「1920년대 초 독립운동단체의 군자금 모금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2,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94~202쪽.
47세의 醫師이던 朴世正도 보합단의 軍醫가 되어 나이 어린 단원들을 보살피고 부상자나 질병자를 은밀히 치료해 준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았다. ☞
[註 82]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22~423쪽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309쪽. ☞
[註 83]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39쪽. ☞
[註 84]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434쪽. ☞
[註 85]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62쪽. ☞
[註 86]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69쪽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62쪽. ☞
[註 87]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73쪽. ☞
[註 88]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87쪽. ☞
[註 89]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92·498~500·511쪽. ☞
[註 90]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02쪽 ; 송상도, 『기려수필』, 296~297쪽. ☞
[註 91]이창덕은 1921년 2월 26일 경성고등법원에서 1·2심의 사형판결이 확정되어, 동년 4월 22일 평양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
[註 9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390쪽. ☞
[註 93]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01쪽. ☞
[註 94]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01쪽. ☞
[註 95]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319~320쪽 ;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618~619쪽 ; 『동아일보』 1920년 8월 18일 「조선독립운동의 무단화」 같이 참조. ☞
[註 96]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14쪽. ☞
[註 97]이하의 서술은 김상옥·나석주열사 기념사업회, 『김상옥·나석주열사 항일실록』, 52~86쪽의 내용을 많이 참고한 것임. ☞
[註 98]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 1054~1055쪽 ; 장석흥, 「광복단결사대의 결성과 투쟁노선」, 『한국근현대사연구』 1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참조. ☞
[註 99]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06~110쪽. ☞
[註 100]김상옥·나석주열사 기념사업회, 『김상옥·나석주열사 항일실록』, 73~74쪽. ☞
[註 10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06~111쪽 ;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02~505쪽 참조. ☞
[註 102]『동아일보』 1921년 6월 25일 「한우석 등 예심종결(1)」 참조. ☞
[註 103]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95~496쪽. ☞
[註 104]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474~475 쪽. ☞
[註 105]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39~540쪽 ; 이성우, 「주비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25, 319쪽 참조. ☞
[註 106]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379~380쪽. ☞
[註 107]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269~270쪽. ☞
[註 108]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43~545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19~122쪽. ☞
[註 109]강덕상 편, 『현대사자료』 27, 52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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