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8선,‘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
|
|
|
|
|
|
부친의 납북을 확인한 지훈은 부인도 만나지 않은채 집을 나서 시내로 들어간다. 그날
밤 당시 의사당 자리에서 촛불을 켜 놓고 귀환보고 강연회를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평양행을 결행한다. 그의 평양행은 종군기자의 임무에서,
그리고 납북된 부친을 찾는다는 두가지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을 떠난 지훈은 걸어서 봉일천(奉日天)에 이른다.
평양을 가야
한다. 임을 찾아서. 임이사 못뵈와도 소식이나 들을까 하고…… 비행기는 커녕 군용트럭 하나도 봐주는 이 없는데/여비를 준다는
<북한파견문화반> 그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다/맨주먹으로 나서도 평양은 내가 먼저 가고 말리라…… 여기는 파주땅 봉일천리. 주막집
툇마루에 앉아 술을 마신다…… (봉일천 주막에서, 마지막 부분)
봉일천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의 지명이다. 그리고 봉일천은 6.25
발발 직후 일선에서 밀려내려오던 백선엽의 1사단이 6월 28일 봉일천국민학교에 CP를 차리고 마지막 저항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국군은 수일간
적과 맞서 끈질기게 싸웠지만, 더 이상의 항전이 불가함을 알고 후퇴를 결행, 경기 시흥에서 합치거나, 아니면 지리산에 들어가 게릴라가 되자며
철수한 곳이다. 이 때 연대장에는 최경록, 최영희 등이 있었다.(백선엽 증언, 중앙일보)
봉일천에서 하룻밤을 보낸 지훈은 다음날
요행이 군용트럭에 편승하여 황해도 연백·해주를 향해 달리다 3.8선(현 휴전선 이전의 남북 경계)를 넘는다.
(전략) 젊은 중위는
연백 사람/고향집에 가는 것이 즐겁단다/문득 헷드라이트에 비취는 큰 글씨 있어 <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사진 左)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주 서서 우는/3.8선 위에 비가 내리는데/옮겨간 마음의 장벽을 향하여/옛날의 3.8선을 내가 이제 넘는다(너는 지금
3.8선을 넘고 있다, 끝부분)
젊은 중위의 고향집(중위는 4년전 월남하여 군에 입대, 북진하는 우군을 따라가는 길에 고향 연백에
들른 것이다)에 도착하여 푸진 음식을 대접받는다.
(전략) 한 잠든 닭을 잡아 모가지를 비틀고 둘러앉아 한 그릇씩 국수잔치가
푸지다. 내 뜻 아니한 이 촌가에 와/그 즐거움을 함께 하노니/반가운 손이 되어 아랫 목에 앉아 웃는 인연이여/흐린 하늘에서 달빛이 다시
나온다/평양 가는 트럭에 뛰어 오르니 밤은 3경! (연백촌가, 일부)
천신만고 끝에 지훈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한다. 대략 10월
중순경으로 생각된다. 지훈으로선 2번째 오는 평양이었다. 즉, 10년 전인 1940년, 평원선(平元線) 철로를 놓을 무렵, 친구 두명과 함께
돈도 없는채 걸어서 평양에 왔던 일이 있었다.
평양을 찾아와도 평양성엔 사람이 없다/대동강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소식(蘇式)장총을 메고 잡혀오는 여자 빨치산이 하나/스탈린 거리 잎지는 가로수 밑에 앉아/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중략)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평양을/오늘에 또 내가 왔다 평양을 내 왜 왔노/대동강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패강무정(浿江無情), 십년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같고나/서울 최후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패강무정, 끝부분)
지훈은 약 50일간 평양에 머물렀다. 그동안 많은
견문과 체험을 쌓았지만, 부친의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주로 한 일은 아직 평양에 남아있던 옛 지인들과의 문화활동, 후에 평양에 온
평양출신 친구들과 함께 “평양 문화인 서울 시찰단”의 구성과 이의 운영이었다. 그러나, 그해 말 중공군의 참전으로 부득이 12월 3일
오영진(吳泳鎭)과 함께 비행기 편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리고 중공군이 다시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1951년, 1월 3일, 마포에서 한강을
건너 다시 대구로 향한다. 이른바 1.4후퇴였다.
|
|
|
피난 시절 모교 대구 임시교사 |
|
|
|
|
첩첩이 문을 닫아걸고/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버렸다/이룩하기도 전에 흔들리는 사직을
근심하고/조국의 이 간난한 운명을 슬퍼하여 (중략) 불의의 그늘에선 숨도 쉬기 싫어서/차라리 일체를 포기하고 발가숭이가 되고져/사람들은 모두 다
떠나버렸다/첩첩이 문을 닫아 건 종로의 적료(寂廖)/아아 이제 나마저 떠나고 나면/여기 오랑캐의 노래가 들려오리라/허나 꽃 피는 봄이
오면/서울은 다시 우리의 서울/내 여기 검은 흙 속에 가난한 노래를 묻고 간다. (종로에서-다시 서울을 떠나며-)
서울이 비록
오랑캐(중공군)에 짓밟혀도 다시 오고야 만다는 결의가 강렬하게 배어난다. 지훈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해방 직후 좌우로 갈라져 정치,
사회, 문화계가 상호 격렬하게 대립, 투쟁할 때, 우익, 민족진영의 선봉장이었다. 즉, 민족문화의 수립과 홍호, 전통문화의 긍정과 발전,
순수문학의 수호와 창달 등으로 좌파 진영의 계급문학, 경향문학 등 이른바 전위문학이란 허울을 쓴 정치적 사회주의 진영과 맞서 행동과
필봉(筆鋒)으로 싸운 투사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모함과 모욕을 당했고 테러를 맞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훈은 생명을 건 신념과
의지로, 불요불굴의 지조와 확고부동한 사상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6.25 동란 다음날인 6월 26일의 <절망의 일기>에서 “더럽게
살지 말자. 더럽게 죽어서는 안 된다/이 지조를 지키는 자승자박이여/내 오늘 그 힘을 입어 죽음 앞에 나설 수 있음이여”라 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신념과 사생관은 다음해인 1951년에 쓰여진 시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략) 진실로 나의 양심을 위하여/웃으며 무찌를 수 있는 나의
신명아/……내 여윈 살 한점을 저며서라도/안주 삼아 마시고 싶은 도적의 피/명기하라 세월이여/눈물 많은 시인이 이 아침에 총을 닦는다 (辛卯銘의
후반)
1951년이 저문다/역사의 분수령이 또 하나 침몰한다/후반기라는 꿈 많은 훈장은/동란 한국의 가슴 한복판에 달아주라…… 불이
붙었다 불이 탄다/스스로의 불길에 회신(灰燼)하는 공산주의…… (후략) (觀劇歲暮, 앞 부분)
전당에서 들리는 기도의 합창/날라리
부는 공산주의의 잔해(殘骸)/그 속으로 휴머니즘의 시위 행렬이 간다/구호도 없는 푸락카드…… 구원의 소리는 아직도 들리지 않는다/허나 이상은
항시 초음속이다/의미 없는 낡은 깃발을 찢어라 (Z환상, 후반, 1952)
지훈은 그 때 이미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멸망과
몰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두 번째 피난 온 대구에서 그는 매우 바빴다. 피난 온 가족들과 거처도 마련하였고, 공군 종군문인단 “창공구락부”를
만들어 1951년 5월에는 재탈환한 서울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대구의 원대동에 자리잡은 고대의 임시 교사(사진 右)에 근무하면서
<고대극회>와 속간된 <고대신문>의 지도교수로 활약하며, 1953년 고대 최초의 시전문지 <석탑문학>도
간행하였다. 당시 고대는 대구에서 졸업식도 행하고 신입생도 뽑는 등 학사를 진행하였는데, 국문과 교수로는 구자균(고전문학), 김춘동(한문학)이
학과 운영을 함께 하였다.
이러한 지훈의 활동은 1953년 휴전 성립 후 환도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환도 15년 후인
1968년 타계, 20년간 몸 담았던 안암 동산을 떠났다. 하지만, 지훈의 민주와 자유에 대한 신념과 정신은 본교 캠퍼스의 호상, 4·18탑,
시비(詩碑), 고대의 교가에 변함없이 살아 있다.
6·25 동란 60주년을 맞은 오늘, 6·25 동란의 원인을 북침이라 강변하고,
남침의 증거가 명확해지자 이번에는 남침을 유도했다는 절충설까지 내세우던 진보의 허울을 쓴 이른 바 친북좌파들은, 오늘의 천안함 폭침도 조사 시작
이전부터 남측의 음모, 조작이라 목에 힘을 주는 이 음산한 계절에, 만약 지훈이 살아 있었다면 뭐라 했을까 상상해 본다.
|
|
|
인 권
환
고려대 명예교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