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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서 파노라마
주제 :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스가랴 선지자는 이사야 다음으로 메시아예언을 많이 증거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66장이나 되는 반면 스가랴서는 열네 장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적은 분량 속에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증거가 농축이 되어 있는 메시아예언의 정수(精粹)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움을 잘 드러내고 증거할 수가 있을 것인가?
“지혜와 계시의 영”(엡 1:17)을 우리 모두에게 주사 잘 증거하고, 잘 깨닫게 하여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스가랴는 학개보다 두 달 정도 뒤에 세움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의 1차적인 임무는 학개와 함께 14년간이나 중단된 성전을 건축하도록 독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 6장에서는
,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建築)할 일이 형통한 지라”(스 6:14)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성전재건”을 독려하기 위해서
두 명의 선지자를 동시에 세우셨을까요?
이는 구속사의 맥락에서 성전건축이라는 주제(主題)가 그마 만큼 중대(重大)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 21) 한 말씀에 드러납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공통점과 상이(相異)점이 나타납니다.
학개 선지자의 제일성(第一聲)은,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殿)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학 1:2) 하고 곧바로 방치된 성전건축을 거론하고 있으나,
스가랴 선지자의 제일성(第一聲)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震怒)하였느니라”(1:2) 하고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솔로몬의 성전을 던져 버리셨음을 상기시킴으로 물리적인 성전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있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적(優先的)인 일이 무엇인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1:3) 하신 “돌아옴”, 즉 회개입니다.
이는 물리적(物理的)인 성전보다 “마음”의 성전이 더욱 중요함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돌아오라”는 말씀을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세움을 받은, “학개(학 2:17), 스가랴, 말라기”(말 3:7), 세 명의 선지자가 공통적으로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형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인가를 말해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메시아언약 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애굽 천지를 죽음의 천사가 심판할 때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대문 안”에만 안전하고 구원이 있음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조상들은 메시아언약을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가 우상을 숭배하다가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존전에서 추방당한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돌아옴”은,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인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한
메시아언약 안에서만 가능하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70년이라는 징벌을 당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도 또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언약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는
물리적인 성전건축보다는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란 금이나 은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구속함을 얻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거운데 거할 것임이니라”(2:10) 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약속이 유대인에게 한정(限定)된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2:10) 하고 이방인에게까지 개방이 될 것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스가랴 1-6장에는 8가지 환상이 전개됩니다.
환상이란 현실(現實)이 어렵고 낙심이 될 때에 그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한 계시의 방편입니다.
포로에서 부푼 꿈을 안고 돌아온 저들 앞에 전개되는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지금 재건하고 있는 성전건물도 솔로몬의 성전에 비하여 너무나 초라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들에게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소망(所望)이 무엇인가?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 지니라”(9:12) 한
그리스도요, 궁극적인 소망은 오직 메시아왕국에 대한 비전입니다.
스가랴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6:12, 3:8) 하고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순이라 하는가?
바벨론에 의하여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한 그루터기”(사 6:13)에서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하고 “싹, 가지”라 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9:9)하신다고 말씀하는가?
그는 무력으로 정복하는 정치적(政治的)인 왕이 아니라,
노예 한 사람의 값인 은 30에 팔린(11:12) 종(從)이 되어서,
“찔림을 당하고”(12:10),
“치심”(13:7), 즉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심으로,
“죄와 더러움을 씨는 샘이 열리게”(13:1) 하여 돌아오게 해주실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3-4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3장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3:1)을 보여주십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대적하는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대적하는가?
네 주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자격이 없다,
그런 주제로 하나님 앞에 서서 섬길 수가 있단 말이냐?
당장 집어치우라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대제사장은 유구무언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대표자요,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책망하십니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3:2) 하십니다. 타나 남은 볼품이 없는 그슬린 나무를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이들은 바벨론이라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였습니다. 그냥 놓아 두셨다면 남은 것이 없이 다 타버렸을 터인데
하나님은 “남은 자”가 있게 하셨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내가 네 죄과(罪過)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3:4) 하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여지는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이 땅의 죄악(罪惡)을 하루에 제하리라”(3:8, 9) 하신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통해서 뿐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방도는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옷”, 즉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힘입을 뿐입니다.
3장의 초점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사명에 맞춰져 있다면,
4장은 총독(總督) 스룹바벨은 그리스도의 왕적(王的)인 사명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7상) 합니다.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리라”(7하)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의 방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제일 처음 놓는 돌이지만,
“머릿돌”은 건물이 완공(完工)되었을 때에
맨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돌입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殿)의 지대(모퉁이 돌)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9상),
즉 머릿돌을 내어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1차적으로는 재건하는 성전의 완공을 가리킨다 하여도
스가랴서 전체와 구속사의 넓은 문맥으로 본다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한 말씀과 결부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하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2-13) 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시작하신 것을 또한 완성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초림(初臨)하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루어놓으신 구속사역을,
재림하심으로 완성하시지 않는다면
주님은
“알파는 되시나 오메가는 되지 못하고, 처음은 되시나 나중은 되지 못하고, 시작(始作)은 되시나 끝은 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하셔서 “머릿돌”을 올려놓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 때에 주님의 재림을 대망(待望)하던 모든 성도들은,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하고 찬양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예언의 말씀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하리라”(14:5) 하고 주의 재림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14:5, 9) 하고
메시아왕국의 비전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치러왔던 열국 중에서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草幕節)을 지킬 것이라” 하고
“초막절”(14:16, 18, 19)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3대 절기,
즉 “유월절”은 주님의 십자가로,
“오순절”은 성령강림으로 성취가 되었고
오직 하나 “초막절”만이 남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再臨)하시는 날
우리는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