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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선택
1. 우리는 지금 예수님에게 말을 배우고 있다. 성경을 통해 말을 배우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의 핵심은 말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말이 능력이 있는 이유도, 우리의 말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정리해 보라.
2. 말은 사람의 타락을 기점으로 변질되었다. 사람의 타락은 말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타락하기 이전의 말과 타락한 이후의 말이 다르다. 타락하지 않은 사람의 말과 타락한 사람의 말이 다르다. 타락 전 후를 다 살았던 아담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다. 인류 가운데는 타락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인류는 모두가 그 죄의 영향권 아래서 태어났고 살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예수를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 거듭남의 은혜, 회복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는 타락한 채로 사는 사람과 그 가운데서 구원 받은 사람이 있다. 말도 둘이다. 타락한 말과 회복된 말이 있다. 어떤 말이 타락한 말이고, 어떤 말이 회복된 말일까?
3. 정직한 말과 거짓 말, 창조적인 말과 파괴적인 말, 축복과 저주, 칭찬과 비판, 선한 말과 악한 말, 깨끗한 말과 더러운 말, 좋은 말과 나쁜 말, 약이 되는 말과 독이 되는 말, 치료하는 말과 병들게 하는 말, 흥하게 하는 말과 망하게 하는 말,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 이렇게 대조적인 두 종류의 말이 지금 당신 앞에 있다. 당신은 이 두 종류의 말 중에서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가? 혼자 판단이 잘 안서는 경우라면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다. 주변 사람에게 당신이 앞으로도 계속 했으면 하는 말과 그만 했으면 하는 말을 얘기해 달라고 해 보라. 그런 것들이 어떤 것인지 적어보라.
4. 당신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는가? 그렇다면 이 두종류의 말 중에 앞 쪽 말이 당신의 말이다. 예수를 믿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타락한 말을 하다 예수를 믿으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두 종류의 말을 두 종류의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다만 우리의 소망사항이다. 죽음 이후에나 두 종류의 사람과 두 종류의 말이 확실하게 짝을 이룬다. 천국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파괴적인 말과 저주의 말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혹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말이 바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예수 믿은 세월이 오래 지났음에도 말이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인한 갈등이 혹 있는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5.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 할찌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늘 두 종류의 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게되면 그 수고는 끝난다. 그 날까지 당신은 이 두 종류의 말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예수 믿기 이전의 삶, 예수 믿은 후의 삶, 예수 믿고 죽은 후의 삶을 지옥을 경험하던 삶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예수 믿고 저 천국에 입성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기간이다. 여기엔 당신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죽은 후에 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나 노력이 필요치 않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당신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당신은 당신 앞에 있는 두 종류의 말 중에서 회복된 말을 선택 해야한다. 이 세상에서의 천국 경험은 성경에 순종한 것과 비례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는 믿지만 타락한 말을 하고 산다면 그는 여전이 이 세상에서는 지옥을 경험하는 삶을 살다가 죽어서야 천국 맛을 볼 것이다. 타락한 말을 하면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을 사는 것은 무리다.
당신은 물론 늘 회복된 말을 선택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마음으로는 회복된 말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 하는데 입으로는 타락한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후회하고 또 낙심하고 낙담하기도 한다. 때로 이것이 깊어 짐으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맞나'하는 신앙의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자신의 말을 살펴보고, 회복된 말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는 달리 타락한 언어습관 때문에 갈등해 본적이 없는가? 있다면 당신의 어려움을 나눠보라.
6. 로마서 7장 15절부터 25절까지를 함께 읽어보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 사도 바울의 이 탄식이 혹 당신의 탄식은 아닌가? 당신이 지금 배우고 있는 말과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 보라. 당신은 이 바울의 탄식에서 받는 위로가 있는가? 만일 그동안 당신이 타락된 말을 극복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왔다면, 바울의 고백 속에서 '아, 이런 어려움을 겪는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구나'하는 공감어린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그 이중구조 속에서 갈등하며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실존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아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겪는 갈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한다. 이걸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기도 하고 선한 싸움이라도 한다. 이런 갈등을 겪으며 당신은 점진적으로 변화된다. 당신이 마음으로 원하는 말을 입으로 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걸 성장 혹은 성숙이라고 한다. 혹 당신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변화를 기대한 적은 없는가? 타락한 말의 실상을 깨달았을 때,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그런 언어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가? 만일 이 일을 위해서 당신이 한 어떤 노력이나 일들이 있다면 기록해 보라.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8. 이럼에도 우리가 소망 가운데 나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로마서 8장 1절부터 4절까지를 읽어보라. 그 안에서 당신은 소망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9. 그렇다. 마음으로는 죄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당신을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려선 안된다. 당신이 옛사람의 습관을 따라 마음이 원치 않는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이 확신은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당신은 죽으면 반드시 천국에 간다. 이 확신이 당신에게 항상 있는가?
10. 당신이 예수 믿고 예전 처럼 살다가 죽은 후에 천국가는 것은 하나님의 디자인이 아니다. 예수 믿은 그 날부터 천국에 입성하는 날까지 당신이 이 땅에서 해야할 일이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이 땅에 남겨두신 목적이 있다. 당신은 이 땅에서 저 좋은 천국을 미리 경험하면서 그 목적을 따라 살다 문화적인 충격없이 천국에 입성해야 한다. 이 공부가 그것을 도와줄 것이다. 당신이 오늘 선택한 그 회복된 말들이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삶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당신이 말을 통해 경험중인 천국을 함께 나누라.
<예수님에게 말 배우기반 학생 1의 리포트 중에서>
회복된 말은 반드시 회복된 관계를 가져온다고 믿는다. 에수님께 돌아와서 가장 놀랍도록 회복된 관계가 나의 경우는 어머니와의 관계이다. 예전에 나는 엄마와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이거나, 때로는 거친 말로 서로를 상처주거나 하는 적이 많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의 변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솔직하게 쓴다. 그래서 우리의 말속에는 언제 상대로부터 또 무슨 상처를 받을지 모른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안에서 회복되어감에 따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마를 이해하고 감사하고 수용하려는 내 마음이 자라나고, 그런 변화가 내 말속에도 반영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엄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의 평화가 든든히 자리잡도록 복을 부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엄마랑 다정한 농담도 자주하고,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11. 어떻게 하면 두 종류의 말 중에 회복된 말을 많이 하고 살 수 있을까? 당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결단하고 결심하는 것은 어떤가? 만약 지금 당신에게 회복된 말을 하겠다고 결단하고 결심하라면 하겠는가?
12. 결단하고 결심하는 것도 한 방법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단하고 결심한 대로 되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여기 있지는 않을 것이다. 천상 어디엔가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접시를 엎어놓고 원을 그린 후에 계획표를 짜서 내는 숙제는 대를 이어하는 방학숙제 같다. 나도 했는데 우리 아이들도 한다. 수련회를 가거나 부흥회를 하면 마지막 날은 대부분 결단의 밤이다. 새해가 되면 참 많은 결단과 결심을 한다. 그것이 우리 삶에 귀한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그러나 결단하고 결심했던 일이 며칠 후 더 큰 좌절감으로 다가와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13. 성경 속에서 좋은 방법 하나를 소개한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고 그 속에서 길을 찾아보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4. 온전케 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결심하고 결단했던가. 온전케 하기 위해 부지런히 문제를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사회구조를 바라보고, 제도를 바라보고, 법을 바라보았다. 온전케 하기 위해 스스로 결심도 하고 다른 사람을 결단시키기도 했다. 그 열심이 지나쳐 바로 잡으려고 달려들기도 했다. 오직 하나 온전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다. 그렇게 해서 온전케 되었는가? 그런데 성경은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다. 문제가 아닌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다. 사람이 아닌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다. 거기 답이 있다. 결단과 결심으로 안되던 일이, 개혁과 혁명으로 안되던 일이 예수를 바라볼 때 된다. 예수님에게 말 배우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예수를 바라보자. 순간마다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전한 말을 하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온전케 될까?
15. 두 종류의 말 앞에서 회복된 말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이 예수님에게서 온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힘을 얻는다. 힘이 있으면 회복된 말을 선택하는 것이 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회복된 말을 자연스럽게 할 때는 언제였는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해 보라.
16. 사람들은 생각하길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있어서 그렇다고 오해한다. 실상은 반대이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원하는 말을 그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그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죄에 매여 자유를 상실한 상태에서는 원치않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누가 타락한 말을 하고 살기를 소원하겠는가? 온갖 저주를 다 쏟아 놓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고 싶겠는가?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타락한 말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고, 또 자신의 상처를 자식에게, 다른 사람에게 옮겨주면서 살기도 한다. 마음이 원하는 회복된 말을 할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가 예수다. 예수는 우리를 자유케한다. 예수를 바라보면 자유인이 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당신은 마음이 원하는 말을 선택할 수 있는 이 자유를 누리고 사는가?
17.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면 회복된 말을 할 수 있을지를 배우고 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이 임하는 곳에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들이 있다. 말을 염두에 두고 다음 성경말씀을 살펴보라(행2:4, 2:17, 19:6-7).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행 19:6-7).
18. 성령이 임한 현장에 다른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둘다 '언'이 들었다. 말이 들었다.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다. 물론 여기 나오는 방언이 우리가 은사로 알고 있는 방언임도 인정한다. 나아가 이것을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말을 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도 있다. 같은 한국 말이지만 성령 받기 전의 말과 성령 받은 후의 말이 다르다. 새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다. 말로 관계를 깨던 사람이 말로 관계를 아름답게 한다. 더러운 말을 하던 사람이 깨끗한 새 방언을 한다. 말을 함부로 하던 사람이 사려깊은 말을 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새 방언을 말한다.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 당신의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9. 예수 믿고 성령을 받으면 새 방언을 할 뿐 아니라 예언도 한다. 이 예언을 혹 오해해서 점치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예언은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 중 한 곳을 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은 천국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이게 예언이다. 성경이 예언이다. 당신이 5년 후에 이루고 싶은 꿈을 말하고 있다면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예언이다. 그것도 장래 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화제가 과거에서 미래로 바뀐다. 사람들은 만나면 대화를 한다. 사람들의 주된 화제는 무엇인가? 사람, 과거, 문제, 허물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령을 받으면 화제가 바뀐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장래 일을 말하기 시작한다. 꿈을 말하기 시작한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예수로 세상을 덮는 꿈이 화제가 된다. 미전도종족이 다 주께로 돌아오는 그 날을 말한다. 천국을 말하기 시작한다. 바울의 예언 하나를 들어보자(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당신에게 이런 예언이 있는가? 당신의 대화에 주된 화제는 무엇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지금 당신이 말하고 있는 장래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20. 말이 회복된 당신의 삶을 기대하라. 오늘 당신이 예수님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선택한 한마디의 회복된 말을 통해 당신의 인생은 풍성해 질 것이다. 그 풍성한 인생을 미리 한 번 말해보라.
21. 이 공과를 통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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