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