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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이 깨더니 (1:30), 다시 잠들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해 기상한다 (5:30).
-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 후 (7:00), 단체로 울타르메도우 트레킹을 위해 호텔을 나선다 (8:00).
- 울타르메도우 (Ultar Meadow)는, 훈자마을의 뒤에 있는 이 마을의 수호신격인 울타르피크의 골짜기에 위치한
초원을 말한다.
울타르의 뜻이 궁금해, 몇사람의 현지인에게 물어보았으나 정확한 의미를 듣지 못했는데, 뒤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가늘고 좁은 길이 있는 계곡'이라고 설명한 분이 있다.
- 복마니님이 동행하지 않아서인지, 현지인인 카리움이라고 하는 가이드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한다.
마을 뒷쪽을 지나서, 산 절벽을 깎아 만든 수로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라카포시와 디란으로 이어지는 산맥 - 앞쪽으로는 발티트성과 공동묘지가 보인다)
(아슬아슬한 수로길을 따라간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찔한 것 같다..)
(맞은편의 수로길은, 듀이가르마을과 알티트마을로 가는 물길이다)
(너덜길을 오르고 나니)
(또 너덜길이다..)
- 너덜길 오르막을 한참을 올라온 후에, 돌아보면 디란봉이 시원하게 보이는 초지가 나타나 잠시 휴식을 취한다.
몇분의 회원은 이곳에서 하산하기로 하고, 몇사람은 다시 산길을 올라간다.
(디란봉이 멋지게 보인다)
(양치기 목동과 함께)
(이 길을 지나)
(산 능선에 올랐다)
- 땀을 흘리며 힘겹게 오르다보니, 넓은 초원이 나타나고 그 뒤로는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한 고봉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3시간 30분에 걸친 산행 끝에, 해발 3,270m의 울타르메도우에 도착한 것이다 (11:30).
- 가이드로부터 산봉우리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울타르메도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풍광을 감상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 화강암 송곳니같은 부불리 무틴봉은, 레이디핑거 (숙녀의 손가락)라는 멋진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레이디핑거와 그 오른편에 있는 훈자피크는, 슬픈 전설을 간직한 부부라고 하는 글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궁금하다.
('야호 ! 다 왔다' - 뒤로 디란과 라카포시의 능선이 보인다)
(우측부터, 울타르피크2, 울타르피크1, 훈자피크, 레이디핑거)
(돌담집은 휴식장소로 이용한다고 하는데 가보지 않았다)
(단체사진 촬영 - 왼쪽에서 두번째가, 가이드인 카리움)
- 가이드에게 하세가와가 추락한 지점에 대해 설명을 듣고, 하세가와의 묘지에도 올라가본다.
- 하세가와 호시노는 일본의 유명한 산악인으로, 세계 최초로 알프스 3대 북벽 (아이거, 마터호른, 그랑죠라드 북벽)을
동계에 단독으로 등반한 세계적인 등반가이다.
하세가와는, 1990년에 일본정부에서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지원하는 울타르2봉 등정대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에 그는 동료들과 함께 울타르2봉에 재도전을 한다.
하세가와는 1991년10월10일에 울타르2봉을 등정하다가, 캠프1(4,900m)에서 캠프2(5,5500m)로 가던 중에 눈사태를 만나,
1,200m를 추락해 사망했다.
하세가와의 주검 부근에서 발견된 그의 수통에는 위스키가 들어 있었으며, 그때 나이는 43세였다.
- 남편의 부음을 듣고 훈자로 달려온 하세가와의 부인 미사미는, 남편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일본에서 가져온 수십 병의 위스키를 남편의 시신 위에 뿌렸다고 한다.
이후에 미사미는 스스로 원정대를 꾸려, 다시 울타르2봉을 공략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남편이 살고 싶다던 훈자를 자주 찾았고, 훈자마을에 하세가와를 기리는 학교를 세우고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월이 지나면서 훈자마을의 멋진 전설로 전해지지 않을까?..
숙소인 힐탑호텔 2층의 식당 벽에, 등반복 차림의 하세가와 사진이 걸려있는 걸 보았다.
(아래 하얀 눈이 쌓인 곳까지, 눈사태로 하세가와가 추락했다고 한다)
(하세가와의 추락 지점 위의 풍경들)
(하세가와 묘지 전경)
(하세가와와 동료 등반대원 등 2명이 묻혀 있다 - 몇명은 일본으로 운구되었고, 몇명은 아직 시신을 못찾았다고 한다)
(하세가와 호시노의 묘지)
- 울타르메도우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수줍어서인지 아직도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고 있는 레이디핑거를 다시한번 바라보고,
초원으로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물을 물병에 채우고서 하산하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레이디핑거의 손톱에 한번 할퀴면 볼장 다 볼 것 같다..)
(울타르의 물을 담아간다)
- 한시간 정도 내려오니, 산을 오르던 중에 쉬었던 초지에 도착했다 (오후 1:00).
케이씨대장님께서 가져온 바나와 코펠로 라면을 끓여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풀밭 위에 누워 하늘과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한다.
(라면을 끓이는 중)
(아이고, 라면이 이렇게 맛있나?..)
- 초지에서 30번 정도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하산을 시작한다.
가이드와 떨어져 각자 내려가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절벽에서 되돌아와 너덜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이 끊겼네유. 요 밑으로 가야할 것 같네유..)
(뒤돌아 올라와)
(너덜길 쪽으로 내려간다)
- 산을 올라갈 때는 힘들게 정신없이 오르느라, 울타르계곡에 쌓인 검은색의 빙하와 절벽을 깎아만든 수로 등을 자세히 보지
못하였는데, 하산하면서는 이러한 풍경들을 구경하면서 여유있게 내려간다.
(울타르빙하는 검은색깔을 띠고 있으며, 흙과 바위들도 섞여 있다)
(어떤 구간은 검은색 호스로 수로를 연결한 것 같다)
(맞은편 절벽의 수로가 나타난다)
- 울타르메도우 트레킹의 백미 중 하나는, 울타르빙하가 녹아내리는 물을 받아내기 위해, 울타르계곡 양쪽에 있는 산의 절벽을
깎아 만든 수로가 될 것이다.
훈자의 생명줄이자 젖줄인 이 수로의 광경을 보노라면, 인간의 의지와 생명력에 대한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 훈자의 관개수로 공사를 이끌어낸 지도자는, 10세기 이후 훈자왕가의 현군으로 불리는 나짐 카아한이다.
훈자사람들은 빙하 퇴적지의 척박한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나짐이 고안한 방식에 따라 바위투성이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냈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2~3m 높이의 방벽을 쌓은 후, 훈자강 주변에 퇴적된 흙을 져 올려 그 속에 부었다.
이렇게 훈자인들은 수십년을 노역하여, 10세기경에 비옥한 다랑이밭을 가파른 산비탈에 만들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울타르피크의 빙하지대에서 흘러내리는 빙하물을, 경작지로 끌어들이는 관개수로 개설의 대역사를
완성하였다.
- 이 수로의 개설로 인해, 훈자의 황량하고 버림받은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고, 미루나무와 살구나무, 사과나무 등
각종 나무와 꽃들이 우거진, 지상낙원과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이 덕분에, 실크로드의 대상과 구법승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흉폭한 산악부족인 훈자족이, 온순하고 친절한 농경족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 울타르계곡 옆의 산 절벽을 깎아 만든 아슬아슬한 수로를 보면서,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의 투루판에 있는 카레즈(칸얼징)를
떠올려본다.
카레즈는,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줄기에 일정 간격으로 우물을 파고, 뜨거운 사막지대에서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우물과 우물 사이를 지하로 연결해 만든 수로이다.
이러한 지하수로는 1,200여개에 달하고 총연장 길이는 5,000km에 이르는 등, 만리장성, 남북대운하와 함께 중국의 3대 역사로
꼽히는 관개시설이다.
이 카레즈로 인해, 화염산 아래에 있는 열사의 사막지대인 투루판이, 포도나무가 우거진 풍요로운 오아시스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 이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와 지혜, 노력은, 불가능해보이는 환경을 바꾸고 역사에 남는 대역사를 이루어, 인간 승리의
현장을 연출하게 된다.
- 울타르빙하지대에서 만들어내는 물줄기는, 계곡 양쪽의 산 절벽을 따라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한쪽 물길은 듀이가르마을과 알티트마을로 흐르고, 다른 한쪽은 카림아바드로 흐르는 물길이 된다.
마을로 흘러간 물줄기는 윗쪽 마을에서 아랫쪽 마을로 흐르면서, 훈자주민의 식수와 생활용수가 되고, 농경지의 농작물,
마을의 나무와 꽃들을 키워내는 훈자의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왼쪽 수로는 듀이가르마을과 알티트마을로 흐르고, 오른쪽 수로는 카림아바드로 흘러가게 된다)
(여름철 수로에 물이 넘칠 때는 이 길을 지나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 아슬아슬한 절벽 옆 수로를 지나오니, 시원한 풍경이 정면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라카포시에서 디란으로 이어지는 하얀 설산의 멋진 위용과, 푸른 미루나무에 싸여있는 나가르마을과 훈자마을 사이로는
훈자강이 흘러가고 있다.
(절벽 옆 수로를 돌아가면 나타나는 풍경들)
(울타르계곡 - 발티트성과 공동묘지가 보인다)
(라카포시와 디란, 나가르마을, 훈자강, 훈자마을이 차례로 보인다)
- 아침에 올라갔던 길이 아닌 지름길로 마을 입구까지 내려와서 주변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몇분의 회원들이 아침 산행길로
내려오고 있는 게 보인다.
(라카포시와 디란으로 이어지는 카라코람 산맥)
(빙하수가 흐르는 바위 절벽에서 양 두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게 보인다)
- 7시간에 걸친 울타르메도우 트레킹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 3:00).
- 힐탑호텔에서 내가 묶고 있는 방은, 구관 옆에 새로 신축하고 있는 신관이다.
방의 창문 앞을 담벽이 가로막고 있어 마을의 풍경을 전혀 볼 수 없을 뿐더러, 공사중이다보니 특히, 신나 냄새같은 게
많이 나 불편을 겪고 있다.
아마 이 냄새 때문에, 오늘 새벽에 잠이 깬 후에 다시 잠들지 못한 것 같다.
훈자 첫날 방 배정이 끝나고, 삼일 후에 구관의 방이 빌 예정이므로, 불편한대로 이틀 밤만 숙박한 후에 방을 교체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방을 교체해달라고 요청하였더니, 사정이 생겨 신관에서 하루만 더 숙박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사정 얘기를 들어보니 양해하기 어려운 사항이다.
아무튼 약간의 해프닝(?)이 발생한 후에, 구관으로 방을 교체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이 해프닝으로 인해 복마니님이 맘고생을 좀 했지 않나 싶다.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신나 냄새같은 게 나지 않고 전망이 좋은 구관으로 방을 옮겨, 배낭과 방 정리를 한 후에 세탁과
샤워를 마치고, 여행일지를 정리한다.
여행일지 정리 후에 베란다로 나가, 훈자마을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본다.
- 훈자를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사람들이 웃으며 일본말로 인사하는 것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럴 때면 '노, 코리언. 안녕하세요?' 라고 얘기하면, 상대방은 다시 웃으면서 '안녕하세요?'라고 답해준다.
- 훈자에는 일본 관광객이 많이 방문한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야지키 하야오는 일본의 유명한 만화영화 감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미래 소년 코난'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70년대 후반 막 개통된 카라코람하이웨이를 따라 훈자에 도착해, 마을에 머물면서 만화영화의 줄거리를 구상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의 출세작이 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이다 (1984년도 작품).
실제로 만화영화의 배경인 바람계곡은 훈자계곡과 상당히 닮아있고, 등장인물 역시 훈자사람들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는 또 중국 운남성의 아름다운 고도인 리장고성에 머물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만화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2001년도 작품).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더불어 하세가와와 미사미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도, 일본인들이 훈자를 찾게 하는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훈자에 저녁이 찾아오고 있다)
- 호텔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저녁식사를 한다 (오후 7:00).
오늘도 한 회원께서 뽕술을 찬조하여 칵테일로 마시면서, 울타르메도우 트레킹에 대한 무용담들을 나눈 후에,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간다 (밤 8:30).
((*)) 이번에 파키스탄을 여행하면서 느낀 것 중 한가지를 정리해보기로 한다.
- 훈자 뿐 아니라 파키스탄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파키스탄의 길 위에는, 일본제 차와 오토바이가 뒤덮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파키스탄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는 만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학교와 도로건설 등 여러 공익사업에 기부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훈자지역에만도 동네 길목에, 일본의 기부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기념비가 여러곳에 세워져 있다.
- 파키스탄 사람들은 중국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이 카라코람하이웨이 공사 등을 비롯한 여러곳에,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인지, 파키스탄에는 중국제의 각종 생활용품이 널려있다.
파키스탄의 식자층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우려스러운 시각으로 본다고도 한다.
- 파키스탄과 중국, 인도와의 간계는 좀 미묘한 사안인 것 같다.
카슈미르지역 국경문제로 인해, 삼국이 서로 군사적 긴장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파키스탄과 중국이 손을 잡고
인도에 대항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대학생이나 젊은이들과 얘기를 해보면, 파키스탄과 인도는 형제국가라는 의식이 깔려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파키스탄인은 인도인에 대해 별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나, 인도인은 파키스탄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한 예로, 인도인들이 욕을 할 때 사용하는 말 중 하나가, '짤로 파키스탄' (파키스탄으로 꺼져라)이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가 사용했던, '빨갱이는 북쪽으로 보내버려라'는 식이 아닐까 한다.
- 아무튼, 파키스탄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 같으며, 우리가 여행 중에 인사를 나눌라치면,
으례히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라고 묻곤 한다.
그네들의 눈에는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비슷한 모습의 한국인으로서, 우리가 그렇게 언짢아할 일은 아니나,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여행할 때, 위구르족에게 한족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나타내는 티를 일부러 내야 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한국의 단순한 여행객 입장에서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 이러한 분위기에서 훈자라는 조그만 마을에서나마, 복마니라는 한 개인이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는
광경을 접하며, 훈자주민들에게 어깨가 약간 으쓱해지는 기분도 들고, 복마니님에게 고맙고 기특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 우리 정부도 앞으로 제3세계에 대한 외교, 경제 정책에 있어서, 파키스탄에 대한 투자와 지원 등에 좀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하기야, 미국과 파키스탄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외교노선도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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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은 큰데 나무들은 없고 바위만 잔뜩 있네요? 고도가 높아서 인가요? 날마다 35도를 오르내려 외출하는게 무섭습니다.
어젯밤에 부는 바람으로 뒷베란다에서 꿍 떨어지는 소리가 나 가보았더니 수퍼에서 맥주 한박스를 샀는데 12개에서 두병이 깨졌네요 아우 아까워... 그 바람덕에 시원하기는 합니다
바위만 있는 게 카라코람산맥의 특징 아닌가 싶네요.
파키스탄의 라호르나 인도의 델리에서는 45도는 보통입니다.
밤에도 35도를 넘습니다.
하세가와도 그렇고 우리나라 많은 산악인들 과 우리가 간 페리메도우에서 바라본 낭가파르팟(8,126) 내려오다가 실족해죽은 고미영을 생각해봅니다 무엇이 죽음을 무릎쓰고 산을 오르게 했는가 하고
히말라야 14좌를 꿈꾸는 산악인이 세계에 무수히 많씁니다
계곡에 곡갱이질을 해서 절벽 옆으로 수로를 만들고.. 방벽을 쌓아 전답을 일군 척박한 땅을 보니 아무 생각이 안납니다.
물길을 내기 위해 수로공사하다가 토목,건축학이 더 발전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득음님 대단하십니다.여자분은 혼자 트레킹하셨나봐요.
울타르계곡 양쪽 산절벽에 만들어진 수로를 보노라면, 아찔하다 못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듭니다.
촬영을 좋아하는 여성 한분이 더 올라오셨습니다.
매우 힘들어하면서도, 오로지 멋있는 풍경을 사진 찍겠다는 일념으로요.